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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클로징] 웃기고 자빠졌다

2016년에 트럼프란 인물이 대통령이 됐을 때부터 한마디로 미국은 우스꽝스러워졌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약해졌다는 게 아니라 우스워졌다는 거다.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지만 그런 강함에 대한 경외라든가 공포를 품게 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존경하든 무서워하든, 어떻게든 신경을 쓰거나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송능한 감독의 1997년 영화 <넘버 3>의 송강호 배우가 맡았던 불사파 두목 조필을 떠올리면 된다. 조금 고쳐 말하자면, 그런 조필이 거대 조직의 두목이 되어 있다고, 거대 조직이 그런 조필을 두목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처한 셈이라고 여기면 적절할 것 같다.

<넘버 3>의 조필에게는 힘이 있다. 딱히 반기를 든 것도 아닌 그저 자기 자존심을 조금 상하게 했을 뿐인 부하를 흠씬 두들겨패도 누구 하나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지배력 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그런 힘이 있다. 인구 1억에 가까운 국가인 이란의 최고지도자들을 한방에 날려버리고는 “한 문명이 사라질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아도 그리도 잘나신 서방국가들 어느 하나 국제법을 논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필은 우습다. 단지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드러난 무식을 “내가 현정아 그러면 무조건 현정아야”라며 찍어 누르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다. 마찬가지로 트럼프도 우습다. 자기 국가의 압도적 무력과 경제력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고서는 누구도 자신을 우러르지 않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두목 조필이 그렇다는 건 그의 조직 불사파가 그렇다는 거고, 대통령 트럼프가 그렇다는 건 그의 국가 미국이 그렇게 됐다는 뜻으로 이젠 받아들여진다.

조필의 우스꽝스러움은 단지 불사파의 비극일 뿐이고 영화 속의 희극적 요소일 따름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우스꽝스러움은 미국의 비극을 넘어 전 세계의 ‘비극적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무척 큰 차이가 존재한다. 희극이 희극으로 그치지 않고 비극을 넘어 파국으로 번진다. 그래서 깔깔대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으로 끝내지 못한다. 우스꽝스럽지만 도무지 웃을 수가 없다. 체제 변경이라고? 자국민을 학살하는 이란 권위주의 체제를 외부에서 무너뜨리려 했던 시도는 실패했고, 오히려 내부의 저항조차 불가능해진 조건을 만들었다. 실은 미국은 내내 그랬다. 자유의 수호자이기는커녕 권위주의의 배후 세력이기 일쑤였고, 민주주의를 수출한답시고 세계 곳곳에 극단주의만 키워놓았다. 그리고는 이젠 스스로 극단주의에 먹히고 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아직도 입만 열면 미국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 나라 교육계, 학계, 정치계, 관계, 경제계, 종교계, 언론계의 상층을 단단하고도 두텁게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끔찍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입만 열면 극단주의와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선정적인 미디어를 운운하며 비판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럴 거면 각자의 자리라도 걸고, 돈이라도 내어, 이 세계와 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 반인권적인 의식과 행위를 막아 나서기라도 할 일이지, 웃기고 자빠지셨다. 아니 솔직히 웃기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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