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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역사를 만든 사람들 -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주의 이론’과 그 이후
배동미 2026-04-03

<카이에 뒤 시네마> 창간호. 사진제공 <카이에 뒤 시네마>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는 한권의 종이 뭉치를 넘어 영화사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영화잡지다. 시작은 1951년, 7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편집장은 영화의 리얼리즘을 특별히 강조한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이다. 바쟁은 영화잡지 <레뷰 뒤 시네마>에서 글을 써오다가 1949년 창업자의 교통사고 사망으로 폐간을 경험한 뒤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창립하고 스스로 편집장에 올랐다. 바쟁은 1호의 커버로 미국 할리우드영화 <선셋대로>를 내세웠는데, <카이에 뒤 시네마>를 떠올릴 때 프랑스의 영화잡지란 인상이 강하지만 창간호부터 미국영화를 비추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창간 초기부터 프랑스영화계와 심하게 불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4년 <카이에 뒤 시네마> 1월에 실린,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평문이 된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은 22살의 젊은 평론가가 쓴 프랑스영화 살생부에 가까웠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 글에서 프랑스영화계 전체를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며 오직 8명의 감독만 여기서 자유롭다고 주장하였다. 장 르누아르, 로베르 브레송, 장 콕토, 자크 베케르, 아벨 강스, 막스 오스, 자크 타티, 로저 린하르트, 모두 프랑스 비평계에서 비주류로 평가받던 감독들이었다. 트뤼포는 이후 자국에서 열리는 칸영화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1958년 취재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그의 데뷔작 <400번의 구타>가 칸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이 된 건 <카이에 뒤 시네마>와 프랑스영화계의 묘한 관계를 요약하는 사건이 되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를 언급할 때 ‘작가주의 이론’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의 창의성은 감독에게서 온다는 이 이론은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켰고, 그 여파는 <카이에 뒤 시네마>내부로도 향했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을 주요한 가치로 내세운 초대 편집장 앙드레 바쟁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주목했지만, 장뤼크 고다르, 트뤼포 등 젊은 평론가들은 앨프리드 히치콕하워드 호크스와 같은 지극히 상업적인 할리우드에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을 칭송했다. 필진이었던 트뤼포,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는 1년차를 두고 순서대로 영화를 공개하며 새로운 흐름, ‘누벨바그’의 기수로 떠올랐다.

프랑스를 넘어 세계 영화사에 기록될 사건의 중심이었던 <카이에 뒤 시네마>는 어느새 활력을 잃고 여러 번의 인수를 경험해야 했다. 1998년엔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에, 2009년엔 영국의 파이돈 출판사의 소유주 리처드 슐라그만에게 넘어가야 했다. 10년 경영 끝에 2019년 슐라그만이 이 잡지를 매물로 내놓으면서, 2020년 <르 몽드> 소유자인 그자비에 니엘, 데이팅 사이트 창립자인 마크 시몬치니와 같은 사업가들로 구성된 20명으로 이뤄진 컨소시엄이 사들여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다.

현재 <카이에 뒤 시네마>는 3인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비평가로 활동했던 마르코스 우잘 편집장, 프랑스의 또 다른 영화잡지 <소필름>의 편집장 출신 페르난도 간조 부편집장, 12년간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평론 활동을 해온 샤를로트 가르송 부편집장. 이들은 들로르메 전 편집장이 걱정한 독립성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계약 당시 20인의 주주들이 편집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헌장에 서명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은 지도 6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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