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더릭 와이즈먼 전작 순회 회고전을 준비하던 2025년 3월 와이즈먼의 오랜 협력자이자 프로듀서인 카렌 코니첵에게 그의 생애와 이력 전체를 기리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원대한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감독이 머물고 있다고 알려진 프랑스 파리까지 사람을 보내 인터뷰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코니첵은 “프레드는 현재 파리가 아니라 보스턴 자택에 있습니다”라고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는 인터뷰에 응하고 싶어 하지만 건강이 다소 좋지 않아 어려울 수 있으며,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하기에는 체력이 따라주지 않 가능성이 높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오랜 시간 파리에 거주하며 <라 당스>(2009), <크레이지 호스>(2011)로 이어지는 쇼타임 다큐멘터리, 프랑스 교외 지역을 배경으로 한 픽션영화 <부부>(2022),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2023) 등을 제작한 와이즈먼은 건강 상태가 심각해지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한국에서의 회고전에 즈음하여 보내온 짤막한 인사 영상에 담긴 그의 음성에는 숨이 차올라 다소간 쇳소리가 섞였고, 수분간 이야기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코니첵에게서 건강 문제에 대해 들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영면에 들었다. 그사이 한국에서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작가전을 필두로 하여 와이즈먼에 대한 전작 순회 회고전이 전국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1971년 아내인 지포라 뱃쇼의 이름을 빌려 설립한 제작·배급사 지포라 필름스는 지난 2월16일 와이즈먼의 가족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예술적 업적과 영향을 기술하고, 장례와 애도 절차를 알린 보도자료 형식의 공식 부고는 와이즈먼의 영화처럼 건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통합 영화의 이상을 추구하다
와이즈먼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일화로, 내가 직접 본 한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2013년 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프레더릭 와이즈먼과 에롤 모리스, 현대 다큐멘터리를 대변하는 두 전설이 손을 잡고 등장한 순간이었다. 그 장면은 특별했고,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는 모리스의 <언노운 노운>(2013)과 와이즈먼의 <버클리에서>(2013)가 나란히 초청되었다. <언노운 노운>의 공식 시사회가 열린 날, 대극장 무대에서 모리스는 와이즈먼에 대한 경외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도 이분처럼 되고 싶습니다.” 모리스는 “와이즈먼이 일상생활을 해석하는 방식이 강렬하면서도 미묘해서 다큐멘터리영화라기보다는 부조리극에 가깝다”라고 촌평했다. 과연 와이즈먼은 미국과 유럽에서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며 사뮈엘 베케트와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다. 모리스는 “와이즈먼에게는 현실 속에서 초현실적이고 부조리한 순간들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모리스의 이 말을 따랐을 때, 내 머릿속엔 여러 장면이 동시에 떠올랐다. 1993년 영화 <동물원>에는 동물원의 여성 수술팀이 늑대를 거세하는 시퀀스가 있다. 이 신은 가히 여성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손을 사타구니에 가지런히 얹고 초조하게 바라보는 남자 직원 한명을 제외하고 그 시퀀스 전체가 여성의 힘으로만 지탱되는 것처럼 보인다. 와이즈먼은 4명의 와일드한 여성들이 버둥거리는 야생 늑대를 제압해 마취주사를 놓고, 테이블 위에서 아랫배를 가르고 고환을 꺼내는 광경을 긴 시간 동안 응시하게 한다. 늑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늘어진 혓바닥과 가위에 잘리기 직전의 늘어진 고환의 대비는 날카로운 몽타주 효과를 창조한다. <청소년 법원>(1973)에서 아동 성폭력에 대한 재판을 주재하는 판사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는 숏, <복지>(1975)의 라스트신에서 오지 않을 고도에 대한 푸념을 토로하는 깡마른 사내의 얼굴 따위도 모리스의 평가를 뒷받침한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당시까지 프레더릭 와이즈먼과 에롤 모리스는 화합할 수 없는 감독이었다. 두 작가 모두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만, 주제와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한 접근법, 스타일 면에서 완연히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다큐멘터리의 관습을 거침없이 깨뜨리는 모리스의 영화는 스타일리시한 카메라워크와 날카로운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된 인터뷰, 장중하고 상징적인 음악을 사용하여 다큐멘터리 미학의 불문율을 파괴했다. 반면 와이즈먼은 인터뷰와 내레이션, 음악, 설명 자막을 배제한 관찰 양식의 신봉자로 알려졌다. 이 훈훈하지만, 동시에 기이했던 연대의 자리를 목격한 뒤 나는 두 작가의 관계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프레더릭 와이즈먼 전작 순회 회고전은 당시에 떠올랐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와이즈먼에 대한 오해와 억측에 휩싸여 있었고,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그의 영화는 덜 탐구됐으며, 따라서 과소평가됐다.
현대 다큐멘터리영화 제작 방식과 다른 길을 갔던 와이즈먼은 사회적 전형에 의해 운항되는 제도의 본질을 다루기 위해 다큐멘터리의 범주적 정의와 스타일 관습을 넘어서고자 했다. 논픽션의 형식 안에 극적인 구조를 도입한 것, 사실의 서사 안에 추상의 서사를 도입한 것,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위에 관대함과 낙관을 입힌 것은 그가 사실과 허구의 이분법으로 유리(遊離)시켜왔던 영화언어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통합 영화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야심가였음을 입증해준다. 가장 복잡하고 불행한 곳에서조차 고귀하고 상냥한 몸짓, 작은 용기와 인내의 순간들을 발견하는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병원>(1970)에서 의사가 공황 상태에 빠진 노인 환자를 달래거나, <시각 장애인>(1986)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린 소년이 선생님에게 자신의 학업 성취를 자랑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길고 감동적인 여정을 그 자신의 본능에 따라 포착했고, 기록했다.
작가는 하나의 영화를 만든다
아마도,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에서 누구를 찍어야 할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실행한 것이다. 전통적인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영화는 감독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가(auteur)의 작품이다. 길게 촬영하고 정밀하게 편집한 영화에서는 직접 느낄 수 없지만, 기록된 대화와 다채로운 편집을 통해 그 역동성을 경험할 수 있다. 처음과 끝의 비교를 통해 보자면 정신병원의 실상을 담은 <티티컷 풍자극>(1967)과 미슐랭 3스타 프랑스 레스토랑을 소재로 한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의 거리는 태평양만큼 멀어 보이지만, 견고한 일관성을 가진 같은 작가성의 소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수감자들이 발가벗겨지고, 조롱당하고, 학대당하고, 그들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티티컷 풍자극>의 끔찍하고 황폐한 스타일과 향신료와 콜라비, 느타리버섯, 신선한 해산물 등 최고급 요리 재료의 풍부한 질감과 화려한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의 유려함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제도와 기관의 이면, 대외적인 모습을 모두 담은 생활 드라마 양식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영화이다.
와이즈먼의 작가성의 지표는 그의 세계관이나 일관된 대상의 탐구뿐 아니라 독창적인 시각시스템에 있다. 와이즈먼 시스템의 근간은 극적 구조이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평범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구조를 따라 주제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고, 일했는지, 그들의 행동이 어떻게 제도에 반영되는지, 또 제도가 어떻게 더 큰 사회를 압축하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와이즈먼의 이야기에는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이 있다. 예외 없이 시간의 데드라인을 설정하고,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인물과 사건이 진화하도록 만들어 결말에 도달하도록 한다. 하지만 와이즈먼의 구조는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와 다르다. 다분히 추상적이다. 한대의 카메라로 촬영한 숏의 연속성이 그토록 정확하게 지켜질 수 있는가? 시간의 연대기는 와이즈먼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기관 운영자들끼리의 회의 중에 나온 발언의 연속성을 유지하지만, 그외의 사건들은 시간 순서가 아닌 구성의 논리에 따라 배열한다.
일관성의 표본은 공동체의 기반을 제공하는 제도, 기관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 대한 탐구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제목은 묘사된 기관, 장소 또는 직업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병원, 청소년 법원, 영장류, 운하 지대, 모델, 백화점, 벨파스트 메인, 센트럴파크, 복싱 체육관, 잭슨 하이츠는 제목이자 장소, 제도이다. 특정 시점의 특정 장소와 사람들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작은 소우주를 확장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움직이는 제도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와이즈먼의 영화는 관객들을 등장인물과 그들이 속한 사회의 세계로 끌어들이며,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듯하면서도, 관찰 영화의 강력한 선택들을 통해 일상적인 시선이 간과하기 쉬운 대상을 포착한다. 관찰적 접근 방식을 일관되게 선호했지만, ‘다이렉트 시네마’나 ‘시네마베리테’라는 정형화된 분류에는 저항했으며, 카메라를 어디로 향하게 할지는 의식적인 선택이라고 늘 주장했다. 예리한 안목을 지닌 그는 감독, 프로듀서, 편집자, 그리고 대다수의 작품들에서 붐마이크를 들고 사운드 녹음을 전담하는 희귀한 경력을 보여주었다. 와이즈먼의 시각 양식은 그가 ‘마이크를 든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수십년을 누적한 와이즈먼 시스템은, 탁월한 관찰력으로 현장에서 무엇을 좇을 것인가를 직관적으로 알았던 감독이 일상생활의 마법에 관객들의 주의를 몰입시키기 위해 개발한 것이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깐깐한 작품들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때로는 견디기 힘들 만큼 길지만 언제나 풍요로운 그의 문체는 작가 자신처럼 고집스럽고 단호하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긴 상영시간을 가진 기관 홍보 영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모두는 인간 경험의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서사적이고 시적인 작품이다. 그는 대상이자 장소를 통해 비즈니스, 의미, 갈등, 예술, 그리고 인간 신체의 연약한 생리적 구조와 같은 추상적인 스토리텔링을 창안했다. 정확하고 의도적인 장면의 배열은 상당히 미묘해서, 지극히 의식적인 관객들만이 겉보기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인물, 사실, 사건 사이의 연결고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은 수십년에 걸쳐 확고한 시각과 비할 데 없는 비전을 가진 작가만이 성취할 수 있는 드문 업적이다.
<티티컷 풍자극>으로 돌아가 짧은 조사(弔詞)를 마무리 짓자. <티티컷 풍자극>은 수감자들에 대한 학대를 선정적으로 보여줬다는 이유로 발표 당시 상영 금지를 당했지만, 와이즈먼은 한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의 초점이 수감자들만큼이나 그곳의 교도관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교도관들의 업무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그들은 거칠고, 교육 수준도 낮았으며, 급여도 적었지만 하루 8시간씩 그곳에 근무하는 것에 동의했어요.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저널리즘적인 이슈보다 폭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두 가지는 부분적으로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 끔찍한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와이즈먼은 이후 60년 동안 그의 모든 영화를 통해 이 인터뷰에서 예고했던 바를 실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