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점만으로 과연 한편의 호러영화가 성립될 수 있을까. 그 방식이 일으킬 공포와 불안, 혹은 슬픔의 층위는 얼마나 창의적일 수 있을까. 영화 전체를 일인칭시점으로 구성하는 화법 자체가 새롭지는 않지만, 그 시선이 유령의 것이면 사정은 다를지도 모른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연출, 촬영, 편집을 겸한 <프레젠스>를 본 건 순전히 그러한 호기심 때문이다. 영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캐릭터와 서사는 빈약했고 그 허술함을 만회하려는 극적 설정은 작위적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무섭지 않았다. 작품의 결이나 감각적 충격의 차원에서는 그다지 더할 말이 없지만, 유령의 시점을 고집한 설계가 실패에 이른 데 대해서는 이런저런 생각 거리가 남는다. <프레젠스>의 밋밋한 감흥은 서사의 미흡함보다는 그 시점이 야기한 결과로 보인다.
육체성 없는 시선으로 시공간을 부유하는 혼령을 간명하고 강렬하게 물질화하기 위해 소더버그가 도입한 장치가 유령의 시점숏이라고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는 얼마간 기발하게 여겨지는 이 아이디어를 영화의 주요한 힘으로 내내 고수할 때의 문제를 세심히 살핀 것 같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시점숏의 출현을 카메라와 인물과 관객의 시선이 중첩된 순간으로 여긴다. 물론 감독이 그 셋의 통합을 의도한 순간에조차 영화에는 이들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 없는 균열과 잉여가 작동한다고 말해야겠지만, 일단 그 전제를 수용해보자. 주류 영화에서 시점숏은 인물이 바라보는 대상에 관객의 시야를 제한함으로써 주로 감정적 동일시를 요청하거나 관람자가 쫓아야 할 서사의 방향성을 일러준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한밤중 어두운 실내에서 겁에 질린 주인공의 얼굴에 이어지는 열린 창문과 흔들리는 커튼 숏 같은 것. 우리는 침입자의 흔적에서 주인공의 불안정한 심리를 나누고, 그에게 닥칠 사건을 예견하며, 자연스레 주인공과 같은 잠재적인 희생자의 위치에서 서사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프레젠스>의 경우는 이와 같은 전형적인 구도로 설명하기 애매하다. 초반부터 끝까지 귀신의 시점을 체현한 카메라가 집 안 곳곳을 유영하는 동안 관람자는 혼령의 시선과 움직임, 혹은 그렇게 가정된 물성을 체험한다. 문제는 관객이 혼령의 시점을 점유하면서도 일차원적인 운동성 외에는 그 영혼의 무엇도 공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통상의 호러영화에서처럼 관람자는 혼령이 불현듯 출몰하리라는 예감에 공포를 느낄 여지 없이, 이미 그것이 주시하는 대상을 동시에 보지만, 그 혼령을 알거나 이해하거나 느낀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인상은 우선 영혼의 정체와 사연을 내내 비밀에 부치며 내레이션이나 플래시백의 흔한 개입마저 차단하는 영화의 전략에서 비롯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영화 전체를 유령의 일인칭시점만으로 전개하는 방식 자체에 기인한다.
인간이나 영혼이나 존재는 자신이 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인다는 사실에 의해 변모한다. 요컨대 시점숏이 영화의 감정으로 기능하거나 동력이 되는 순간은 개별 숏의 역능보다는 시선의 양방향성이 일으키는 이미지의 상호작용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해, 이미지 A의 시점숏으로 등장한 이미지 B가 A의 시선을 되돌려줌으로써 그저 그 자리에 기계적으로 놓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반응’할 때, 그리하여 그 요동이 다시 A에 이를 때 둘 사이에는 교류라는 것이 생기고 이들이 놓인 세계에도 일말의 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 설령 힘의 우위가 한쪽에 기운다고 해도 교류는 여전히 발견될 수 있으며, 그것을 형식화하려는 노력이 영화의 태도와 쾌감을 가른다. 감독이 말하듯 “유령이 내리는 시각적 선택에 따라”(<씨네21> 1543호,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인터뷰) <프레젠스>가 전시하는 일방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시점의 능동성은 그런 ‘교류’에 무심하다. 이 영혼은 시각적 이미지로든, 특정 기운으로든 자신이 주시하는 인물들의 역숏이 되길 거부하며 지배력을 행사한다.
주로 호러와 멜로를 뒤섞은 영화들에서 억울한 사연을 안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영혼은 <사랑과 영혼>(감독 제리 주커, 1990)이나 <러블리 본즈>(감독 피터 잭슨, 2009)처럼 초능력을 선보이는 운동성만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형상으로 재현되어 산 자의 세계에 죽음을 각인한다. 이들은 유령영화라면 피할 수 없을 비가시적 영혼의 시청각적 현시의 욕구에 더없이 감상주의적으로 응답하는 사례다. 그렇다면 혼령을 이미지화하거나 서사적으로 규명하지 않으려는 <프레젠스>는 죽음을 손쉽게 의미화하는 주류영화의 관습적인 기조에 저항하는 세계로 분류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아무리 유령의 모호한 정체성을 내세운다고 해도, 그것의 시점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작동시키는 방식은 매우 명징하다. 이승을 부유하는 이미지의 매개 없이 죽음의 시야를 직접 선취하는 형식만큼 죽음에 접촉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태도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프레젠스>의 패착 중 하나는 카메라의 동선으로 유령의 시점을 강조하고 주장할수록, 우리가 실감하는 것이 유령성의 위력보다는 카메라의 욕망이라는 사실에 있다. 클로이(칼리나 리앙)의 벽장을 거처로 삼아 집 안을 돌아다니는 영혼은 처음에는 클로이의 수호신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의 역할과 목적은 점차 아리송해진다. 이 혼령의 시선과 동선은 클로이의 비밀 연인 라이언(웨스트 멀홀랜드)이 클로이 몰래 꾸미는 음모를 목격하고 그 시도에 훼방을 놓으며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도, 둘의 섹스를 벽장 안에서 엿보고, 급기야 정신을 잃은 클로이가 라이언에게 위태롭게 농락당하는 시간을 지연하며 관음한다. 이 시선은 편의적이다.
이처럼 모순된 시선에는 영화 말미 반전이 드러날 때까지 혼령의 정체를 헷갈리게 하려는 소더버그의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혼령의 시점이 실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오빠 타일러(에디 매데이)의 것이라는 반전은 영혼의 시간은 “흘러가는 방식이 달라서 과거와 현재가 같이 흐를 수 있다”는 영화 속 영매의 말을 끌어오더라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설령 이 조악한 반전을 수용하더라도 앞선 장면들에서 클로이의 섹스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벽장 안 시선의 주인이 오빠라면, 이 시점의 성질은 더욱 음흉하게 돌이켜진다. 그렇다. <프레젠스>의 형식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바가 있다면, 세계를 내내 주관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인칭시점, 관음의 쾌감과 구원자의 희생정신을 동시에 희구하는 카메라의 시선이란 도착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클로이의 입장에 이입하지도, 영혼의 시점에 동화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어정쩡한 구경꾼의 위치에 서게 된다.
카메라의 동선이 인물들의 움직임에 발맞추는 대신 제한 없이 자율적으로 이행한다는 착각을 안기는 일. 아마도 소더버그가 혼령의 시점을 구축하며 가장 공들인 부분일 것이다. 계단을 날 듯이 빠르게 오르내리고 각기 다른 공간에 자리한 인물들을 단번에 오가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일인칭시점의 역량을 한껏 과시하는 과정에서 그것의 한계 또한 명백히 노출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연결하는 이 시선도 시간의 간극은 어찌하지 못한다. 영화에 반복해서 삽입되는 검은 화면이 그 사실을 자인한다. 이를테면 한낮 부엌에 앉아 시름에 잠긴 아빠의 장면은 검은 화면으로 단절된 후에야 한밤 여전히 그곳에 자리한 그의 모습에 이를 수 있다. 극영화의 기본 전제인 장면과 장면 사이 분절된 시간을 자연스레 이어내는 편집술의 환영은 단일 시점의 연속성을 역설하는 형식 앞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일인칭시점의 행로만으로 포괄할 수 있는 세계의 시공간은 단편적이다. 시점을 전환할 수 없는 세계의 호흡은 짧고 시야는 좁다. 그 시선이 가동 범위를 집 외부로 뻗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죽음 혹은 초자연적 현상을 재현하는 영화에 사로잡히는 한편, 영화가 그 불가해한 영역을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상투적인 이미지로 화면에 불러들이는 기법과 태도에는 불만을 느낀다. 만만한 이미지 대신 비가시적 존재의 세계를 환기하는 새로운 설계를 기대한다. 그러나 <프레젠스>를 보는 동안만큼은 좀 다른 생각이 든다. 우리는 여전히 이미지를 원한다고 고백하고 싶다. <디 아더스>(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1)나 <식스 센스>(감독 M. 나이트 샤말란, 1999)처럼 자신이 죽은 줄 모른 채 현실을 활보하던 사자의 초상이건, <물안에서>(감독 홍상수, 2023)처럼 완전한 소멸에 다가가는 세계의 뿌연 존재 양식이건 안간힘을 다해 화면에 맺히려는 죽음의 이미지에 우리는 감응한다. 단순히 죽음의 시각화를 탐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다양한 양태로 잠재하는 죽음의 지평이 다른 이미지, 다른 시선과 끈질기게 접촉하며 허구에 열어내는 미지의 시공간을 체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프레젠스> 리뷰(<씨네21> 1543호)에서도 짧게 언급된 데이비드 라워리의 놀라운 영화 <고스트 스토리>(2017) 속 유령의 숙명을 떠올려보는 게 좋겠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죽는다. 흰 천을 뒤집어쓴 그의 시신이 영안실에 안치된 장면에서 영화는 무모한 비약을 아무런 장치 없이 감행하는데, 그가 그 형상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것이다. 흰 천에는 단 두개의 검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것은 유령의 눈이다. 더없이 뭉툭한 아날로그적인 형체가 유령이라고 감독은 진지하게 우기고, 어느덧 우리는 이를 진심으로 수긍하게 된다. 표정도 없고 육체도 없고 눈동자도 없는 유령의 눈은 영화 결말에서 흰 천이 폭삭 주저앉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화면에 끈질기게 남아 자신이 더는 속할 수 없는 세계를, 나아가 화면 밖을 응시한다. 이 영화는 흰 천에 새겨진 투박한 눈의 평면적 이미지로 마지막 기운이 다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못하던 영혼의 마음을 탐구하고 혼령의 시간을 모험한다. 이 눈의 부동성이 <고스트 스토리>의 역동성을 성취한다. <프레젠스>에서 끝내 자신의 얼굴을 스크린에 비추지 않은 채 자신만만하게 움직이던 혼령의 시점으로는 결코 꿈꿀 수 없는 심연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