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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이해를 넘어서, 오진우 평론가의 ‘김응수 망자 3부작’
오진우(평론가) 2026-01-28

앞으로 돌파하기가 어려워진 시기에 재개봉과 최초 개봉은 하나의 트렌드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됐다. 영화를 다시 상영하는 것 이외에 영화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전기영화도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신작 <누벨바그>는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제작 현장을 그린다. 이 영화를 재밌게 볼 수는 있어도 그저 과거에 머무는, 다시 말해 그 시절, 그 세대를 특권화하는 작품이다. 영화 속 고다르의 행동에 감화돼 영화 현장에서 따라 하는 어리석은 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과거는 보정되고 미화된다. <누벨바그>를 보며 다음 뉴웨이브가 과연 올 것인가를 논하는 건 이 영화가 요구하지도 않는 진지한 질문일 것이다.

여기 한 감독은 독특한 방법으로 영화를 기억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작가를 만나다-김응수’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1월 한달간 선보인다. 상영작은 김응수 감독의 ‘망자 3부작’인 <고다르> <그들의 이런 만남> <데이비드와 린치>다. 여기에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함께 상영한다. 김응수의 망자 3부작은 최근 우리 곁을 떠난 장뤼크 고다르, 장마리 스트로브, 데이비드 린치를 추모하며 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다. 멋들어진 풍경이 담긴 엽서에 쓴 편지 같다. 그가 부친 편지는 망자가 된 감독들에게 도착하지 못한다. 대신에 우리는 스크린에 띄운 편지를 읽으며 감독과 영화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망자 3부작은 작고한 감독의 사진이나 영화 이미지를 활용하지만, 적극적으로 발췌하여 비평하는 비디오 에세이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주로 풍경이다. 풍경은 감독과 영화를 소환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가? 망자 3부작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을 꼭 알아야만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감독들의 영화를 봤지만 이해하지 못한 관객일수록 망자 3부작은 더욱더 흥미로울 것이다.

실패담을 고백하기

<고다르>

김응수는 망자 3부작을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험난한 체험기라 소개한다. 감독은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솔직한 고백을 터놓는다. 따라서 험난한 체험기는 실패담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망자 3부작의 풍경을 보며 겪는 체험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를 보며 풍경 너머로 무언가가 있을 거란 기대를 버리는 쪽이 낫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성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에 겹쳐진 이러한 실패들은 오히려 영화가 다루는 감독들과 이들의 영화로 향하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혹은 전혀 다른 방향의 사유로 이끌며 물음표를 연신 던질 수도 있다. 이 글은 망자 3부작을 보며 겪은 나의 험난한 실패의 기록이자 오독이다.

망자 3부작의 방법론은 얼핏 보면 간단해 보인다. 누구라도 따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풍경과 텍스트다. 이 둘은 조응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전혀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궁금한 점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이미지와 텍스트 중 어느 것이 선행하는지다. 각본을 작성하며 상상한 풍경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변화무쌍하기에 카메라에 담긴 풍경은 자연이 선물한 우연의 산물이다. 작업의 선후를 알 수 없지만 둘이 합쳐지는 과정은 아마도 편집할 때다. 편집 프로그램에서 풍경을 배열하고 그에 맞춰 텍스트를 배치하며 리듬을 만드는 김응수의 작업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편지이자 시다. 관객은 풍경 위에 적힌 텍스트, 즉 완성품을 볼 뿐이다. 둘의 조응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언어라는 속박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망자 3부작의 출발점인 <고다르>는 이 지점을 화두로 삼는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장뤼크 고다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그 어떤 논리로도 고다르를 추론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고다르>는 고다르를 이야기하지만 달리 보면 고다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럼으로써 고다르에 도달하려는, 다시 말해 불가능에 도전하는 영화다. 주인공이 고다르의 영화로 진입하기도 전에 막힌 지점은 바로 영화 제목이다. 주인공은 영화 제목에서 모순성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을 두고 언어와의 작별이 가능하냐고 주인공은 질문한다. 그는 고다르의 영화들을 언급하며 불가능한 제목을 사랑하냐고 질문한다. 그는 고다르를 통해서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인하며 괴로워한다. 고다르의 영화 제목은 양립하기 어려운 두개를, 무관해 보이는 두 개를 몽타주하는 고다르의 ‘그리고’(et) 방법론을 보여주는 첫 관문이기도 하다.

김응수는 <고다르>에서 이 방법론을 수행하는지도 모른다. <고다르>의 부제는 “언어와 비언어의 세계”다. <고다르>의 세계는 비언어인 풍경 이미지 위에 언어인 텍스트가 표기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텍스트를 계속해서 읽는 과정에 놓인다. 텍스트를 내레이션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편의성을 이유로 들 수도 있겠지만 텍스트는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다. 두개의 상반된 감각이 스크린에 교차한다. 어느 해변가의 퇴적층을 담아낸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인도하고 동시에 끊임없이 자막으로 나오는 텍스트는 계속해서 주의를 요구한다. 풍경에 집중하면 텍스트를 놓칠 때가 있고, 텍스트만 연신 읽다 보면 풍경을 놓칠 때가 많다. <고다르>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외따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텍스트를 읽으며 풍경에 무언가를 투사하여 둘을 자꾸 의미화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과정을 알기라도 한 듯 김응수는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의 대사를 인용하며 이를 넌지시 시사한다. “내가 지금 이 풍경을 보는 것은 다른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이를 이상야릇한 비문이라 지적한다. 그는 보고 있으니깐 무엇이 연상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는 고다르에게 비논리의 논리를 정리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고다르는 대답이 없다.

<고다르>는 해변가의 퇴적층 바위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수평선 너머로 저무는 태양을 비추며 끝난다. 퇴적층을 바라보면 강물에 의한 침식과 퇴적이란 지질학적 은유를 통해 영화의 미래를 논하는 앙드레 바쟁의 ‘비순수 영화를 위하여-각색의 옹호’라는 글이 떠오른다. 바쟁은 영화가 더이상 침식이 일어나지 않는 “평형단면”에 이르렀고 따라서 영화에 남은 일이라곤 예술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지하로를 파는 일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다르가 영화를 갱신하며 행했던 예술적 실천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다르>가 퇴적층, 흐르는 물소리와 파도 소리 그리고 저무는 태양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고다르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추모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한마디를 더한다. “언어로 정확히 묘사되는 객관적 풍경이란 게 존재하나요?” 있는 그대로의 풍경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나는 바쟁 이야기를 꺼내며 알량한 영화 지식을 드러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언어는 이미지를 포획하여 살해한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그들의 이런 만남>

<고다르>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은 <그들의 이런 만남>에서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풍경에서 본질이나 진리를 찾아보라고 주문한다. 그는 본질에 곧바로 진입할 수 없고, 본질은 “현상의 현상”으로 자신을 표상한다고 말한다. 이를 영화의 숙명이라고도 말한다. 어느 순간 주인공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등장한다. 자신이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태어났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장마리 스트로브인 것이다. 그는 진리가 “현상의 현상”으로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뒤집는다. <그들의 이런 만남>은 단숨에 이해하기 어렵고 아리송하고 모순된 말들로 가득하다. 스크린을 수놓는 텍스트를 읽으며 머릿속은 복잡해지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인 대낮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순수한 형태의 자연은 아니다. 색보정을 거친 하늘과 구름이지만 아름다움에 매료돼 결코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그것에 가까운 표현이 영화에 나온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감각의 불가능과 포기의 감미로움”이다. <그들의 이런 만남>은 현상의 현상을 형식으로 취하여 장마리 스트로브-다니엘 위예에 접근한다. 곧바로 두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언급하며 에둘러 접근한다. 김응수는 스트로브의 입을 빌려 스트로브-위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김응수는 그간 스트로브-위예의 영화를 모방하려고 애썼는데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영화에 스트로브-위예의 <그들의 이런 만남들>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 그는 동네 산책로에서 이 영화를 모방해보기로 마음먹고 <그들의 이런 만남>을 만든다. 인용이라기보다는 산이라는 장소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쪽이다. 스트로브-위예 영화 속 인물들의 낭독은 한국의 어느 산에 잠시 울려 퍼진다. 자막을 표기하지 않아서 무엇을 낭독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다. <그들의 이런 만남 들>은 2006년 작고한 다니엘 위예가 생전에 스트로브와 마지막으로 협업한 영화다. 이들의 재회를 성사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가져온 작품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런 만남>은 그간 불가능했던 ‘만남’을 성사시키려는 영화다. 스트로브와 위예의 사진을 포개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 영화는 일종의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이런 만남>은 작고한 두 감독이 재회하는 만남의 장소이자 관객이 이들의 영화로 향하게 하는 마중물과도 같다. 김응수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는 스트로브-위예에 도달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길을 잃거나 전혀 엉뚱한 곳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런 만남>은 길을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영화다.

진실의 세계가 지닌 어떤 속성

<블루 벨벳>

앞서 살펴본 두 작품에 비하면 <데이비드와 린치>는 직관적이다. <그들의 이런 만남>의 푸른 하늘과 상반된 하늘이 등장한다. 김응수가 택한 풍경은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드는 황혼이다. 이 황혼의 이미지는 무언가를 상징하지 않는다. 황혼은 그 자체로 매혹이다. 매혹적인 황혼으로 시작한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매혹을 거쳐 또 다른 매혹의 서사를 암시하며 끝이 난다. 그렇게 매혹은 번지고 영화 전체를 물들인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풍경 너머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왜냐하면 현실이 진실을 왜곡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입구는 현실의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 진실의 세계는 문학이나 영화를 가장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데이비드와 린치>는 그러한 세계를 그리는 작가로서 데이비드 린치를 소환한다.

<데이비드와 린치>의 대부분은 <블루 벨벳>을 소개하고 논평한다. 진실로 향하는 입구로 <블루 벨벳>에 등장하는 귀를 제시한다. 제프리가 발견한 귀가 바로 진실에서 떨어져나온 신체의 기이한 조각인 것이다. 제프리는 귀를 발견한 이후 진실의 세계로 넘어간다. <데이비드와 린치>의 주인공은 그러한 세계가 현실의 인과율을 초월했지만, 현실에 붙어 있는 장소라 소개한다. 그곳을 통치하는 자는 폭력적인 아기 프랭크다. 제프리가 목격한 진실은 바로 폭력이다. 폭력은 학습되고 전이된다. 영화는 프랭크를 보며 대한민국을 어지럽힌 한 인물을 화면에 디졸브한다. 김응수는 데이비드 린치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비춘다. 그는 폭력에 길들여진 한국인은 폭력을 사랑하기에 <블루 벨벳>의 세계는 멀리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데이비드와 린치>는 현실을 넘어선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린다는 데이비드 린치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반하는 입장을 내놓는다. 데이비드 린치가 그린 세계는 현실의 왜곡이 아니라 현기증나는 진실을 상연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진실이 이해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데이비드와 린치>는 마지막에 이해의 영역 밖에 놓인 진실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주인공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 시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뮤트됐던 영화에 바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어릴 적 일화를 풀어놓는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낸 그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영화 내내 아름답게 봤던 풍경은 그 순간 찢긴다.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이 과연 진실의 세계일까? 김응수는 그 세계로 넘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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