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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자유의 에세이, <구름이하는말>로부터 지역영화란 것을 떠올리며
이우빈 2026-01-08

카페의 구석 자리에서 어느 화가와 음악가가 협업을 논하고, 카메라는 공기 중을 떠도는 먼지처럼 자유로이 움직이며 그들의 얼굴을 찍다가 어떠한 충동에라도 매혹된 듯 창문으로 스멀스멀 접근하는데 유리의 경계 너머엔 주택가의 철거 현장이 보인다. 뿌연 창문 뒤로 보이는 건물의 잔해 위로 느닷없는 짙은 군청색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덧대지자, 영화는 빛의 흐름을 따라서 온갖 사람과 동물을 몽타주하더니 이야기의 속내를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의 연결로 이어진다. 지역의 장소성을 부각하거나 연출자의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순간도 없고, 스크린 위에 비치는 부산 지역의 풍경을 이런저런 의미로 조합하여 도출하거나 그 너머의 함의를 내세우려 하지도 않는다. <구름이하는말>은 그저 그 풍경들이 흐르고 보이는 영화의 가시성만을 지속한다. 의미를 생산하기보다, 의미가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를 조명하는 것이다. 이는 작금 독립영화의 체제가 상실하고 있던 자유로운 에세이영화의 방법론을 입증하며, 중심으로서의 서울(수도권)과 구분되는 지역영화의 실체적인 영화 만들기 과정이 어떠한 유효함을 지니는지 상기하게 만든다.

<구름이하는말>의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영화 속 이미지의 상관관계를 텍스트로 전환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가 어렵고 모호하다거나, 이미지의 연결이 지나치게 지적이라거나 시적이어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구름이하는말>은 결과물로 보이고 들리는 그 부피감과 질량감, 이 시공간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 형식이 영화의 전부인 작품이다. “노래하는 선희, 그림 그리는 준상, 지봄의 시. 흩어져 있던 구름 조각들이 서로를 만나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고 일상이 된다”라는 영화의 기본적인 로그라인이 배포되긴 했으나, 상술한 문단에서 밝힌 것처럼 실제 <구름이하는말>을 이루는 질료의 상당 부분은 다양한 질감으로 섞인 극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푸티지들, 무빙 이미지와 사진적 이미지의 교차,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외양, 전철과 철새 떼의 방향감 같은 것들로 채워지고야 만다. 범주와 종류와 목적을 헤아리기 어려운 이미지들의 배치는 굉장히 파편적이고 기호적으로 텅 비어 있는데, 영화 전반의 일관성은 놀라울 정도로 끈끈하여 총체적인 상을 구현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에서 연상하자면, 구름이 건네는 말을 우리가 듣지 못하는 대신 부분적인 모양의 유사성에 사로잡혀 강아지 구름, 고양이 구름, 공룡 구름의 조각을 종합적으로 이어 붙이고 각자의 몽상을 펼치듯이, 또는 글자 사이의 띄어쓰기를 없애 언어적 기호의 기준을 흩뜨리고 그 요소의 의미들을 재배치하듯이 부산이라는 장소의 이미지를 직접 발화하지 않되 총체적으로 온존한다.

이것은 에세이다. 영화의 이미지 사이사이를 열심히 이어 붙이는 스토리나 플롯의 놀음 없이, 혹은 관념적 주축이 되어주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긴장감, 이를테면 자연과 도심, 멈춤과 이동, 비인간 동물과 인간, 보존과 개발, 지역과 수도권 같은 것들의 대립 구도 없이 <구름이하는말>이 하나의 영화로 편집되어 산출될 수 있는 이유는 작품이 만들어진 실질적 방법론이 에세이의 원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에세이의 어원으로 흔히 논해지는 몽테뉴의 <수상록>이 하나의 상으로 엮이는 이유는 이것이 특정한 철학, 사조, 미학을 견지해서라기보다 몽테뉴라는 에세이스트의 주체성이 하나의 태도로 자리 잡았다는 배경에 있다. 구전으로 몸체를 불리는 이야기의 활력에 기대거나, 거대 이데올로기에 흡수되는 사회적 의제에 기반하거나, 특정한 기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명의 사람이 하나의 방법론이 되는 너른 대지가 바로 에세이적 영화의 자유 공간이다.

다만 위와 같은 에세이영화의 작법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에세이스트가 에세이보다 커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에세이스트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정하여 그 안팎의 모양을 형성하는 방식에 가까울 뿐, 에세이스트가 자신을 내세우는 작업은 아니다. 영화는 만드는 형식에 그 내용이 깃든다. 만약 이 반대의 순서를 원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이미 만든 이의 의지가 이미지를 삼킨 선전영화에 가까워질 것이다. <구름이하는말>의 성취는 그저 예술 창작에 임하며 사는 여러 에세이스트의 이야기로써 그 주변에 있는 지역의 기반과 풍경이 자연스레 뒤섞인다는 점에 있다. 으레 지역영화를 거론할 때 나타나는 지역사회의 정치적 풍광이라거나 지역민의 향토적 삶, 이른바 ‘기획 의도’로 불리는 주제 의식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첫 문단에 적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창작과 폐허와 바다와 카페는 자신으로부터 흐르거나 내가 보게 되는 것들일 뿐, 그 어떤 것도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는 기존에 시사되던 지역영화에 대한 편견에서의 탈출이기도 하고, 시놉시스화되는 서사적 주제에 대한 강박에서의 탈피이기도 하며, 에세이영화의 토대에서 노니는 독립영화의 이상적인 자유로움을 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독립영화를 대하는 준거의 근간에도 자유 혹은 자율이 있다. 미학의 차원이든 현실 경제의 차원이든 무엇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빠져나가거나 항거한다는 의식은 한국적 독립영화를 지탱하는 뿌리였으며, 지금도 그 지향성을 새삼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빗대자면 모두가 자신만의 에세이영화를 쓸 수 있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다만 근래의 많은 평자가 언급하듯이, 공적 지원이란 제도의 품에서 환원되어야만 하는 대개의 독립영화가 특정 에세이스트의 필치로만 쓰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이 제도의 토대마저 점차 부서지고 있으며, 영화의 어떤 체제와 방법론에 대해 말하는 지면에서 돈 문제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이 시점에 극장에서 282명만이 본 <구름이하는말>은 부자유라는 최근 독립영화의 자기 부정성으로부터 사뿐히 탈피하며, 우리가 원래 상상하던 독립영화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만든다.

<구름이하는말>도 기본적으론 부산시로부터 나온 공적 자금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장태구 감독이 속한 소규모 창작 집단 깐따삐아 필름을 매개로 모인 지역의 인물들이 제작진을 구성하고 배우들은 실제 자신의 직업을 들이밀며 스크린에 침입한 사례이다. 영화는 작중 선희, 준상, 지봄이 자기들의 작업물로 거대한 이상을 좇거나 현실에 채여 비토하는 구체적 모습보다 전술한 풍경들의 연속 안에서 흘러가듯 사는 이들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곧 <구름이하는말>을 만든 이들이 지역에서 꾸리는 창작의 태도를 영화에 디졸브하는 상상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물론 이는 다분한 관객의 바람일 뿐, 그 현장에 있지 않은 이가 영화만을 보고 카메라 뒤편 사람들의 삶까지 유추하는 것은 지나친 야욕일 것이다. 그럼에도 독립영화가 애초에 이상화했던 자유의 실현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약 가능하다면 그 단서는 지금 지역영화라는 체제에 있지 않을지 <구름이하는말>을 보며 꿈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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