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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불가항력의 섬, 오진우 평론가의 <바얌섬>
오진우(평론가) 2025-11-19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는 영화의 영원한 숙제다. 최근 탈출에 관한 흥미로운 영화 두편이 개봉했다. 하나는 <8번 출구>다. 이 영화는 탈출의 방법보다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관객은 뫼비우스의띠 같은 지하철 복도를 같이 걸으며 탈출할 방법을 주인공과 함께 익힌다. 하지만 게임은 허울에 불과할 뿐 주인공이 탈출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주인공이 미로에 갇힌 것은 인생을 재고해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영화는 8번 출구 밖을 구경시켜주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과 비슷한 상황에 주인공을 데려다놓고 그의 변화된 행동을 지켜본다. 이상 현상으로 복도 바깥을 비추는 장면 역시 주인공의 과거나 미래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8번 출구>는 탈출극을 표방하지만 심리극의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김유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바얌섬>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인물들이 탈출할 의지가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때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세 남자가 태풍을 맞아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표류한다. 몽휘(이상훈), 창룡(김기태), 꺽쇠(이청빈)는 각기 다른 사연이 있고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다. 처음엔 체격이 좋은 창룡이 탈출 의지를 불태운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특히 몽휘는 유유자적하는 한량으로 섬을 떠날 생각이 없다. 결국 창룡의 탈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창룡은 강력한 생존 본능으로 배를 만든 것이었다. 여기서 계속 있으면 죽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죽다 살아난 꺽쇠가 깨어나서 죽은 것이냐고 물은 것처럼 섬은 결과적으로 세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장소다. 영화의 엔딩에서 섬은 점차 소멸하다 완전히 사라진다. 섬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기 전 잠시 들르는 비-장소인 것이다. 이들의 탈출의 의지는 후반부에 불타오르지만, 그때는 이미 한참 늦었다. 섬은 탈출보다는 이들을 이곳에 눌러앉게 만드는 매혹의 장소다. 애초에 이들이 표류했다기보다는 섬이 이들을 끌어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불가항력이 작용하는 장소로서 섬은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세 사람을 섬에 붙들어두는 데는 이 영화가 택한 시대 배경도 한몫한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 시대이기에 섬에서 탈출한다 해도 별다를 바 없는 삶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섬은 그 기억마저도 흩어지게 만들고 탈출할 일말의 의지마저 사라지게 만든다.

“위로는 하늘 끝이 없듯이, 아래로는 바다 끝이 안 보일게유.” 꺽쇠의 대사처럼 그 중간에 해당하는 섬은 기묘한 위치와 시간성을 드러낸다. 섬은 또 다른 먹잇감이 등장하면 다시 나타나 며칠간 하늘과 바다 사이를 점유할 뿐이다. 요물에 가까운 이 섬에는 당연히 사람들의 흔적이 존재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처음 본 세 사람이 의심하거나 놀라지 않고 매혹된다는 것이다. 창룡은 돌탑이 쌓인 장소를 발견하고 자신도 돌탑을 쌓는다. 섬에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전에 사람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꺽쇠는 한 여인의 해골을 발견하고 대화 놀이를 한다. 의심과 경계심은 점차 사라지고 유희의 공간을 만끽하는 이들은 섬에 완전히 잠식되어간다.

<바얌섬>의 결정적인 사건이라면 해골을 만난 순간부터다. 꺽쇠가 가지고 놀던 해골 옆에 두개의 머리가 붙은 해골이 있었다. 창룡은 이를 보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한 아낙네가 욕정을 참지 못하고 구렁이와 잠자리를 한 후 낳은 것이 대가리 둘 달린 요괴 자식이라는 것이다. 적극적이지 않던 몽휘는 망자를 가지고 논 꺽쇠를 혼내고 혼자서 해골을 묻어준다. 그 근처에서 몽휘는 놋그릇을 발견하고 숨겨둔다. 그 일이 화를 부른다. 결과적으로 몽휘의 행위를 통해 망자는 부활한다. 여기에 꺽쇠의 손톱, 발톱을 먹고 자란 꺽쇠의 분신들도 등장한다. 섬은 부활과 증식이라는 생의 에너지를 내뿜기 시작하며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뱀 비늘 같은 화려한 조각의 형상을 중간에 삽입함으로써 영화는 섬의 생명 활동을 본격적으로 알린다.

증식과 부활은 곧 세 사람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표다. 죽음의 사신들인 것이다. 시간마저도 뒤틀리기 시작한다. 몽휘와 창룡은 섬에 머물렀던 기간을 두고 다툰다. 시간의 벽이 무너지고 공간의 벽 또한 무너지기 시작한다. 섬이란 장소에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틈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단초를 제공한 술은 꺽쇠의 분신이 알려준 것이다. 분신은 보물이라 말했지만, 이들의 손발을 묶는 덫에 가까운 것이 된다. 산속 깊은 곳에 묻어둔 장독대의 청주는 뱀으로 담근 술이었다. 술판이 벌어지고 두 형님의 요구에 꺽쇠는 바다에서 세 여인을 데려온다. 이들 또한 분신이다. 전희연 배우가 1인3역을 한다. 매화, 춘화, 도화는 섬에 갇힌 세 남자를 위로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주팔자를 봐주며 재밌게 놀고 있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여자들은 섬 언니가 온다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 여자는 아마도 몽휘가 묻어준 망자일 것이다. 부활한 망자는 몽휘의 눈에만 보인다. 그녀의 물건일 것 같은 놋그릇에 몽휘는 매료된다. 그릇에 비치는 것은 자신의 얼굴인데도 그는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다 폭포까지 보게 된다. 환각을 겪은 그는 체감상 두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지만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었다. 시간은 점프하고 같은 공간에 있으나 인물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현상도 발생한다. 환청과 환각을 겪는 이들에게 섬은 이제 환상이 아니라 환멸의 장소가 된다. 비로소 탈출을 꿈꾸는 이들은 밤새 배를 만들다 빨간 포대기를 두른 소복 입은 여자를 발견한다. 이들은 잠들면 죽을 것을 직감했지만 잠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바얌섬>의 가장 흥미로운 편집 포인트는 점프컷이다. 밤과 아침을 연결하는 점프컷 사이에 발생하는 공백의 시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 그 일들은 오직 흔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모래사장 위에 파놓은 수많은 구덩이, 뱀이 이리저리 훑고 간 흔적과 발자국은 <바얌섬>이 만들어낸 놀라운 스펙터클이다. 이러한 흔적의 특징은 파도와 함께 사라질 운명에 놓인 덧없는 이미지라는 것이다.

섬은 장난꾸러기다. 세 사람을 가지고 논다. 잠시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다. 잠도 깊게 잘 수 없을뿐더러 얄밉게 깨버린다. 이러한 섬에서 탈출은 애초에 불가능한 선택지인 것이다. <바얌섬>은 섬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덧없이 사라질 사람들을 불러와 이야기를 만드는 환상적인 신기루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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