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경택 감독이 영화 배경지로 부산을 사랑하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부산은 서울만큼이나 멜팅포트다. 다양한 출신, 계층, 직군의 사람들이 한데 섞여 있다. 나만 해도 아버지는 평안남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전라남도 목포 출신이다. 다른 고향에서 온 두 사람이 부산에서 만나 나를 낳은 것이다. 지역 특유의 정서도 눈에 띈다. 피난지로서 한(恨)과 비애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산과 바다가 일군 아름다운 로케이션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영화 속에 다양한 일을 일으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부산은 나의 고향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주변인들에게 쉽게 협조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음) 어떤 공간을 빌려달라, 이 장면 좀 도와달라, 이런 부탁을 고향 친구들에게 쉽게 건넬 수 있다.
나고 자란 이야기의 생동성
- 부산에서의 삶이 창작물에 얼마만큼 반영된다고 생각하나.
이미 완성된 각본을 바탕으로 연출을 맡거나 원작을 각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야기를 만들 때 자연스레 내가 가진 추억 데이터를 쓰는 편이다. 이게 작품에 잘 녹아들어 관객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면 개인의 이야기일지라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다.
- 영화 <친구>도 곽경택 감독의 학창 시절에서 출발했다.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실제 친구들 캐릭터에서 따왔다고.
영화를 찍은 서른다섯 살, 철없던 시절에는 영화에 자전적 이야기가 얼마나 반영됐느냐는 질문에 “80%요”라고 당차게 답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60~70% 정도인 것 같다. 그래도 비율이 적지 않은 건 모두 내 기억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무리 중 상택(서태화)이 가장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중호(정운택)가 가장 잘했다. 다만 비슷한 캐릭터가 둘이나 있으면 안되니 까부는 성격을 중호에게 투여시켰다. 4명의 친구들을 구성할 때 캐릭터라이징을 정확하게 하고 싶었다. 물론 나도 착하다가도 까불고, 사고치다가도 조용해지지만 네 친구 각자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나길 바랐다. 시작부터 오직 4명이었다. 3명은 생각해본 적 없다. 결국 다른 길을 살아가게 된 두 그룹. 건달의 삶을 사는 두 친구와 화이트칼라가 되어 소시민적 삶을 사는 두 친구를 대비시키고자 했다.
- 다소 거칠고 투박한 남자 고등학생들의 우정이 부산의 이미지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나. “마, 친구 아이가!”라는 대표적인 대사도 있다.
흔히들 ‘부산 싸나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나이들은 강원도에도 있고 충청도에도 있다. 다만 경상도 말투가 뭐랄까, 툭툭 끊어뱉고 리드미컬한 지점에서 정겨움을 북돋는 듯하다. 이전에는 건달영화라고 하면 전라도 출신의 이미지를 많이 활용했다. 보편적으로 그랬다. <친구>를 통해 처음으로 경상도 건달이 등장한다. 당시 이런 설정이 흔치 않아서 많은 관객이 새롭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연기자들의 훌륭한 연기와 화면이 주는 신뢰가 잘 맞아떨어졌다. 당시 한국영화에서 시도해본 적 없는 실버 리텐션(필름 현상 과정에 은입자를 완전히 씻어내지 않고 남겨주는 것.-편집자) 기법을 황기석 촬영감독이 도입했던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됐다. 실버 리텐션을 활용하면 중간색이 옅어지고 거칠고 바랜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 현상소를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컨트롤을 잘해야 하는 만큼 섬세하고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오직 열정만으로 이뤄냈다. 이런 편집과 설정이 네 친구의 거친 이야기는 물론, 부산의 지역성과 조화를 이뤄냈다.
- <친구>가 기록한 한국영화 최초의 시도들이 있다. 지금은 보편화된 현장 편집 기술도 그중 하나다.
현장 편집 또한 황기석 촬영감독이 처음 제안했다. 그래서 촬영장에 영상 편집이 가능한 컴퓨터를 갖다두었다. 그간 한국 영화산업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가편집을 해보고 부족한 컷이 없는지 미리 체크하면서 나아갔다. 그때 친한 기술자가 어느 날 내게 묻더라. “나는 엔딩크레딧에 안 넣어줄 거야?” 그래서 “당연히 넣어줘야지!”라고 답하고선 뭐라 적을까 고민했다. 그때 나온 말이 ‘현장 편집’이었다. <친구>이후부터 현장 편집이 굉장히 흔해졌다. 2000년대 초반은 영화 투자사들이 대기업 산하의 투자 전문 회사로 옮겨가는 시대였다. 따라서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아예 가편집본을 음악까지 깔아서 주니까 엄청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받았다. 나는 나의 작품 성향과 다르게 얼리어답터다. 새로운 게 있으면 무조건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싫다. ‘할 수 있는데 왜 안 해봐? 조금만 신경 쓰면 바꿀 수 있잖아!’ 하면서 도모했다. 이 현장 편집 기술이 지금의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 현장 편집으로 꼼꼼히 보완한 덕일까. 청소년관람불가 작품임에도 누적관객수 818만명을 기록했다. 당시 기록적인 수치였다.
그때 정말 구름 위에 떠 있었다. (웃음) 정신을 못 차렸다. <친구>전까지 두 작품을 만들었는데 모두 잘 안됐다. 생애 매진이라는 단어를 내 작품에서 본 적이 없다. <친구>개봉날 관객 반응을 구경하러 서울극장에 갔는데, 같은 날 앤서니 홉킨스 주연의 <한니발>도 개봉했다. 멀리서 티켓 박스를 보니 매진 행렬이길래 ‘<한니발>진짜 인기 많구나…’ 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친구>2시 있어요, 2시!” 하는 거다. 내게 영화 암표를 팔려고 한 것이다. (웃음) 알고 보니 내 영화가 매진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더라. 나도 이제 상업영화 감독으로 살 수 있겠구나, 나도 앞으로 계속 작품할 수 있겠구나 하면서.
- 돌이켜보면 <친구>작업 과정은 어떤 시간이었나. 고난이었을까, 행복이었을까.
행복이었다. 이제 이 영화 망하면 감독 수명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이니까 진짜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내 마음대로 하자고 결심했다. 후회는 없다.
- 조폭이라는 키워드를 우정의 색깔로 형상화했다. 당시 보기 어려웠던 접근 방식이라 더 색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오랜 친구 관계에 대한 낭만이 존재하던 2000년대라 더 강하게 환호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에 공감하고 N번 관람하는 풍경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왜일까. <친구>가 대중의 어떤 마음을 건드렸을까. 아마도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은 과거 우정의 시절을,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추억의 일기장을 되새기고 있단 걸 느꼈다. 원래 고등학생 준석(유오성), 동수(장동건), 상택, 중호는 아역을 따로 뽑으려 했다. 당시 그런 방식이 흔했다. 그때 마침 교복이 제작사에 도착해서 제작사 대표님이 장난 삼아 입어봤는데 일순간 고등학생이 되더라.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더라. 그때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배우들에게 입히자. 배우들이 고등학생을 연기하도록 하자. 그래서 네명의 배우들이 각자의 인물을 청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쭉 이어갔다.
- 음악 선정도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 <연극이 끝난 후>부터 까지. 곽경택 감독이 저돌적임이 액션에 드러난다면 곽경택의 감성은 음악에 있는 듯하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장면을 쓰다가 머릿속에 불이 탁 켜지는 노래들이 있다. 이것들이 그렇다. 특히 최만식 작곡가가 많은 역할을 해주었다. 하루는 아직 유명한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좋은 노래를 발견했다면서 CD 몇장을 주었다. 그중 하나가 뤽 베위르의 였다. 듣자마자 향수가 느껴지는 분위기라 영화 맨 초반에 소독차 나오는 장면에 넣었다. 동수가 죽는 장면에서는 같은 작곡가의 를 넣었다.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 25년 전의 영화 대사가 여전히 밈처럼 쓰이고 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니가 가라 하와이”, “마이 묵었다 아이가” 등. 한편에서 나온 대사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는 누군가가 이 말이 나왔던 실제 사건에 대해 알려줬다. 자상을 입고 과다 출혈로 죽은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이 말을 했다고 하더라. 일상에서 말맛이 사는 표현이나 대사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꼭 적어둔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는 실제로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이 많이 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따라할 때마다 속으로 ‘어디에든 이런 선생님이 꼭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근데 그런 생각도 든다. 왜 이 말이 계속 쓰일까. 아마도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녀들의 입지가 달라지는 상황이 지금도 이어지기 때문 아닐까. 오히려 이전보다 심해진 느낌이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이건 어릴 적 친구들이 쓰던 말. (웃음) 근데 이런 맛깔스러운 대사는 배우들이 그만큼 잘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니었으면 임팩트가 생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 이번에 부산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작품 <태풍>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태풍>은 과거보다 국가적 관계와 분단 이념을 중심으로 스케일이 더 커졌다.
아버지가 평안남도 분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북한 관련 이야기, 이웃 주민과 탈북민 이야기를 들으면서 관심이 컸다. 그리고 악몽을 꿀 때마다 탈북민이 내게 찾아와 몸을 숨겨 달라고 하는, 그래서 저분을 숨겨줄까 아니면 신고를 해서 착한어린이상을 받을까 고민하는 장면이 자주 펼쳐졌다. 아마도 아버지가 전해주신 이야기로 꿈을 꾸었던 듯하다. 어느 날 남한과 북한이 권투 시합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북한 놈 쥑이라! 북한 놈 쥑이라!” 하면서 우리 편을 응원했다. 그때 아버지께서 “너는 왜 자꾸 죽이라 하니? 그게 네 사촌 형이면 어쩌려고” 하시더라. 그때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인식은 하고 있지만 너무 쉽게 네 편 내 편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던 거다. 그 장면으로 상상한 게 <태풍>이다. 탈북을 꿈꾸는 가족이 있는데 한국 정부가 이들을 받아주지 않아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모두 죽음을 맞이하면 얼마나 한이 서릴까. 그게 바로 씬(장동건)이라는 캐릭터다.
- 씬은 자라서 해적이 된다. 한 서린 꼬마가 해적이 된다는 설정은 당시에도 지금에도 독특하게 보여진다.
복수를 꿈꾸는 자는 반드시 자기 세력이 있어야 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 대장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 집단을 찾다가 해적이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또 부산 바다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태국을 연결하기 좋았다. 그렇게 해외 로케이션을 넓혀갔다.
결코 멈추지 않는 시간에 관하여
- 자전적인 <친구>와 달리 <태풍>의 세계관은 꼭 부산이 배경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부산을 선택했다.
당시 요트경기장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 부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러시아, 태국을 건너 한국에서 이야기를 펼쳐도 전반적인 그림의 톤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 해양 도시와 <태풍>의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졌다.
- <친구>때만 해도 부산 내 촬영 지원 사업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태풍>을 제작할 무렵 부산영상위원회의 협조를 받기 시작했다.
<태풍>이 제작되던 시기부터 부산 내 영화 활동을 독려하는 다양한 지역위원회가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부산영상위원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해운대, 다대포해수욕장, 부산시 열린행사장(현 도모헌), 부산시청, 수영만요트경기장, 유엔기념공원, 절영해안산책로, 청사포, 초량 차이나타운, 충렬사 등 다양한 곳을 로케이션 촬영하면서 도로 통제, 로케이션 발굴 등 협조를 얻었다. 부산을 고향으로 두고 있어도 장면에 필요한 구체적인 장소를 바로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데 부산영상위원회가 있어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 정서적이고 친근한 <친구>속 부산과 달리 <태풍>은 더 거대하고 도시적이고 새것의 느낌이 강하다. 씬의 눈에 비친 부산 풍경을 강조한 것일까.
한 서린 씬이 활동하는 해외 지역들이 다소 어둡게 비쳐진다면 강세종(이정재)이 활약하는 부산은 훨씬 밝고 정직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부산 고유의 특색을 많이 강조하고 싶었다. 부산역에 내리면 근방에 러시아거리가 나오는데, 러시아를 오가는 씬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이곳에서 비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친구>가 난투극 중심이라면 <태풍>은 총격 신과 카체이싱 등 스케일 있는 액션을 다룬다. 부담감이 컸을 텐데.
배우들에게 내내 강조했던 건 오히려 침착해지라는 것이었다. 긴박한 속도는 내가 연출과 편집으로 표현해볼 테니 이정재씨와 장동건씨에게는 오히려 절도 있는 액션을 부탁했다. 여유롭게 흘러갈 때 액션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무엇보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이 과정을 너무 잘 찍어줬다.
- <태풍>에서는 어떤 기술적 시도가 더해졌나.
당시 한국에는 수조 세트가 따로 없었다. 구조물을 올려서 배처럼 울렁거리게 하는 장치 자체가 없었다. 이런 세트가 필요한 경우 해외 촬영장을 찾는 일이 흔했다. 물론 CG로 배경 처리를 할 수 있지만 눈앞에서 물이 튀는 장면이 있어야만 현실성을 높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결정을 해야 했다. 처음엔 미국의 수조 세트를 알아봤다가 견적이 너무 높아 유럽의 몰타 세트로 향하려던 찰나에 한국에서 직접제작하면 대여하는 것보다 대략 10억원가량이 더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하자고 했다. 예산이 갑자기 대폭 늘어났지만 이걸 해야만 한국 영화산업에 자산이 남을 거라 믿었다. <태풍>은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태국에서 촬영을 마친 바로 다음날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오기도 하고. 어떻게든 고흥의 한 항공우주연구소를 세트로 빌려 수조 세트장을 만들었는데, 스태프 중 한명이 실수로 불을 냈다.
- 수조 세트장에 화재가 났다는 것인가.
그렇다. 소식을 듣자마자 차를 타고 달려갔는데 완전히 지붕이 날아갔더라. 세트장이 온통 새까맣게 타버린 가운데 불을 낸 스태프는 얼이 나가 있었다. 모두가 안전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찬찬히 둘러봤다. 화재보험을 들어놨지만 이것도 완공이 된 다음부터 적용인 터라 짓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적용이 안된다고 했다. 겨우겨우 처리해서 원상 복구까지 견적이 20억원이 나왔고 몇년에 걸쳐 이 빚을 다 갚았다. 그렇게 복구 작업이 끝난 뒤에 연구소에 다시 찾아갔다. 수조 세트를 한번만 더 만들면 안되겠느냐고 말하니 날 미친놈처럼 바라보더라. (웃음) 아마도 그런 뻔뻔한 모습에 오히려 오케이를 해주신 듯하다. <태풍>은 그야말로 고통으로 가득했던 작품이다.
- 그럼에도 영화 작업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연극단원이 단역으로 등장한 적 있다. 그가 그러더라. 영화에서 러시아 이미지는 늘 갱, 마피아로 등장한다고. 하지만 러시아에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무척 많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중에 꼭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실제로 러시아에는 ‘어머니들에게 남은 눈물이 없다’는 옛말이 있다. 전쟁에 아버지를 보내고, 남편을 보내고, 아들을 보낸 역사 때문이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의 국가적 이해관계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태풍>에 담긴 비애는 이런 부분과 많이 맞물린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반도의 역사와 정서, 슬픔을 담을 수 있었던 그 자체가 내게 큰 의미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