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양가휘, 난디타 다스, 마르지예 메쉬키니, 코고나다, 율리아 에비나 바하라, 한효주(왼쪽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가 30주년을 맞이해 경쟁부문을 신설했다. 14편의 경쟁작을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겠으나 경쟁 심사위원 7인의 목록을 유심히 살피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심사위원단의 개인적 성향과 이력은 경쟁 영화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주요 단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사람이 보는 것, 수상작 역시 사람이 정한다. 우선 <추격자> <곡성> 등을 연출한 심사위원장 나홍진 감독, 홍콩 출신의 대배우 양가휘, 인도의 배우 겸 감독 난디타 다스, 이란의 대표적인 시네아스트 마르지예 메쉬키니 감독이 있다. 이어 한국계 미국인인 코고나다 감독,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아시아 영화를 넘어 세계 영화제 전반에 큰 영향력을 지닌 프로듀서 율리아 에비나 바하라, 한국의 대표적인 배우 한효주가 심사위원단을 꾸렸다.
9월18일 10시 20분부터 열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심사위원 기자회견'은 올해 심사위원단의 전반적인 포부를 알 수 있는 자리였다. 심사위원장 나홍진 감독은 “경쟁작에 대해 아주 한정된 정보만을 가지고 있고, 이제 처음으로 영화들을 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 같다.”라는 심사의 주안점을 남겼다.
다른 경쟁 영화제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후발주자인 부산영화제의 지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2023년 베를린국제영화제의 크리스틴 스튜어트 심사위원장이 “인권 등 사회적 주제에 대해 특히 집중하겠다”라는 심사의 포문을 밝히며 사회파 다큐멘터리 <파리 아다망에서 만난 사람들>에 황금곰상을 수여했다. 2024년 칸영화제의 그레타 거윅 심사위원장은 영화의 여성 서사를 주요하게 다뤄온 이였고, 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다룬 션 베이커의 <아노라>에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아시아 주요 영화제이기도 한 도쿄국제영화제와 비교할 수도 있겠다. 아시아 문화에 집중해 온 빔 벤더스 감독이 심사위원장이었던 2023년엔 티베트 문화의 고유성을 다룬 <스노우 레오파드>가, 2024년 양조위 배우가 심사위원장으로 나섰을 땐 섬세한 감정선과 배우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적이 온다>가 최고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장에게 심사의 전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상 예측의 주요 단서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올해 부산영화제의 심사 방법은 “기본적으론 만장일치를 지향하되, 그렇지 않다면 오랜 토론을 거치는 과정”이다. 심사위원장의 입김이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칸, 베니스, 베를린 등 세계 유수의 경쟁 영화제는 최대한 다양한 정체성·직군의 심사위원을 위촉한다. 올해 부산영화제의 전략도 유사해 보인다. 위에서 정리했듯 감독·배우·프로듀서를 아우르는 직군과 더불어, 한국, 홍콩, 인도, 이란, 인도네시아 그리고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지닌 할리우드 감독 코고나다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문화권의 심사위원을 모았다. 가장 궁금한 바는 심사위원장 나홍진 감독의 성향이다. <추격자> <곡성> 등 일견 과격한 장르 극영화를 주로 연출했으나 가장 좋아하는 영화 4편 중 하나로 애니메이션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뽑았을 만큼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 첫 부산 어워드 5개 부의 영예는 과연 누구에게 주어질까. 이 심사 결과는 부산영화제가 향후 경쟁영화제로서의 위상을 어떻게 확보하고, 어떤 차별화를 이뤄나갈지에 대한 뚜렷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심사위원장
나홍진 감독
박찬욱, 봉준호 감독을 이어 한국의 대표적인 차기 거장으로 언급되는 감독이다. 세 개의 장편 <추격자>(2007) <황해>(2010) <곡성>(2016)으로 개봉마다 큰 화제를 불렀으며, <곡성> 이후 햇수로 10년째 신작을 발표하지 않으며 과작 감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기자회견에선 경쟁작 14편의 경향에 대해 “창작자에게 초석이 되는 발판을 마련하자는 영화제의 의의가 보였고” , “영화의 본질에 충실하며 원론적인 태도를 갖춘 영화들이 선정된 것 같다”라는 해석을 남겼다. 이러한 영화제의 입장을 존중하여 유사한 시선에서 심사를 치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26년 개봉 예정인 신작 <호프>에 대해서도 잠깐의 언급이 있었다. “국제적 협력을 통한 영화 제작이 침체한 영화산업을 활성화하는 방안 중 하나이고, <호프>는 6년 전쯤부터 생각하여 준비했으나 결과는 나 역시 나중이 되어야 알 것”이라는 말이었다.
심사위원
배우 양가휘
1982년 영화계에 들어선 뒤 <신용문객잔> <동사서독> <흑사회> 등 홍콩 영화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던 아시아의 대표적 배우다. 양가휘 배우의 심사 기준은 무척 뚜렷했다. 바로 ‘극장만의 체험을 강력하게 안기는 영화, 현지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영화’에 주목하겠단 것이다. 영화인의 책임 중 하나로서 “세계 곳곳에 자기가 활동하는 지역의 다양한 문화, 영화 장르를 수출하는 일”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타이베이의 도심 속 일상을 다룬 <왼손잡이 소녀>나 중국의 작은 마을 루오무의 풍경을 다룬 <루오무의 황혼>, 범죄 스릴러 장르 속에서 일본 청년들의 문화를 다룬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배우 겸 감독 난디타 다스
난디타 다스 감독 겸 배우는 10개 언어를 아우르는 다양한 영화를 제작·연출했고,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며 영화를 사회적 정의의 매개로 삼는다는 비전을 지닌 이다. 기자회견에서도 “지금 세계는 여러 사회적 위기와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며 “영화의 기술적 측면, 이야기뿐 아니라 영화 뒷면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더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세계를 포괄하려 하는지”에 심사의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란의 하산 나제르 감독이 히잡 착용의 의무, 상시적 매체 검열이 이뤄지는 이란 사회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허락되지 않은>, 미성년 여성의 임신을 서사화한 유재인 감독의 <지우러 가는 길>이 그의 가치에 속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마르지예 메쉬키니 감독
이란을 대표하는 시네아스트다.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와 구조를 통해 이란에 사는 다른 세대의 세 여성을 다뤘던 데뷔작 <내가 여자가 된 날>(2000)은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의 뉴 커런츠상을 받기도 했다. 기자회견에선 “우선 영화란 우리를 즐겁게 해야 하고, 마법 같은 요소가 있어야 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요소를 찾으며 심사에 참여”하겠다는 기준을 표방했다. 그의 말에 부합하는 듯한 작품으로는 한 소녀의 감정을 꿈 같은 이미지와 시적 정서로 풀어낸 이저벨 칼란다 감독의 <또 다른 탄생> 등이 있다.
코고나다 감독
<콜럼버스>(2017) <애프터 양>(2022)에 이어 애플 TV+ 시리즈 <파친코>를 연출하며 2020년 전후 가장 중요한 시네아스트로 부상한 감독이다. 차기작 <빅 볼드 뷰티풀>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고, 10월 국내 개봉을 앞두고도 있다.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에 사는 사람이지만, 항상 아시아 영화만의 독특한 감성을 원하며 기대하고 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일본 특유의 잔잔한 감성을 시각화한 <고양이를 놓아줘>와 일본 청춘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 온 젊은 거장 미야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 등을 아시아 영화만의 고유한 감성을 지닌 작품으로 볼 수 있겠다.
프로듀서 율리아 에비나 바하라
2023년 칸영화제의 화제작이었던 <호랑이 소녀>, 올해 칸영화제에 진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르누아르> 등 200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의 국제 공동제작 모델을 이끌며 다양한 성과를 이룩한 인도네시아 출신의 제작자다. 상업영화보단 영화제에서 경쟁력을 얻을 만한 예술영화의 비전과 신진 감독들의 비상한 아이디어를 실현해 주는 제작자로 정평이 나 있다. 다국적 합작 영화인 <스파이 스타>, 서구권 감독 션 베이커가 제작·각본·편집에 참여하기도 한 <왼손잡이 소녀>가 그의 전문 분야일 것이다.
배우 한효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감시자들>(2013), <뷰티 인사이드> (2015), <무빙> 등의 시리즈물을 통해 20여 년 동안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 섬세한 감정선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의 대표 배우 중 한 명이다. “최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작품들을 살필 예정”이며 “어쩌다 보니 막내 심사위원이 된 만큼 최대한 젊은 시선으로 영화를 마주하겠다.”라는 심사 기준을 밝혔다. 그렇다면 아주 독특한 영상 언어의 조합에 도전한 한창록 감독의 <충충충>, 또는 수려한 드라마타이즈 안에서 배우들의 세밀한 감정이 드러날 임선애 감독의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을 주시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