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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현지 리포트

제82회 베니스영화제의 흥행을 이끈 주인공에 조지 클루니, 줄리아 로버츠 등 레드카펫을 밟은 할리우드 톱스타만 있는 건 아니다. 개막 3일째인 8월29일(현지 시간)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영화제 열기를 견인한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날 아침 8시30분에 상영하는 언론 시사를 보기 위해 메인 극장인 팔라초 델 시네마 건물의 ‘살라 그란데’ 앞에 선 줄은 7시30분부터 옆 광장까지 길게 이어졌다. 일반 상영에 비해 차분한 기자시사 현장에서 큰 웃음과 박수소리가 자주 나왔다. 상영이 끝나고 점심시간에 열린 기자회견장은 박찬욱 감독과 배우 이병헌의 팬미팅을 방불케 했다. 진행자는 “손을 너무 많이 들었는데,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게 원래 영화제에 흐르는 분위기인가 했더니 이 기사를 쓰는 9월3일 낮까지 이 정도의 열기는 재현되지 않았다. 2023년 <헤어질 결심>이 초청된 칸영화제도 이렇게 떠들썩했는지 현장에 갔던 기자에게 물었더니, 이만큼은 아니었다고 답했다. <올드보이>(2004)에서 <기생충>(2019)에 이르는 한국영화의 성취에 더해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성공, 최근 전세계를 강타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까지 이른바 K컬처의 전세계적 관심이 아드리아해를 가로질러 베니스 리도섬까지 당도한 듯했다.

<어쩔수가없다>

외신의 영화 평가도 호평 일색이었다. 미국 <버라이어티>는 “해고의 광기를 풍자한, 황홀할 만큼 재미있는 블랙코미디로 박찬욱 감독이 현존하는 가장 우아한 영화감독일 수 있다는 증거로 가득 찬 최신작”이라고 극찬했다. 영국 방송 <BBC> 역시 “황홀하게 재미있는 걸작, <기생충>만큼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준다”라는 평가와 함께 별점 5점 만점을 줬다. 이탈리아 매체 12군데가 평가하는 현지 데일리에서도 9월2일까지 공개된 전체 21편 중 14편 가운데 <어쩔수가없다>의 별점 평균이 3.7(5점 만점)로 가장 높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어쩔수가없다> 외에도 한국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를 리메이크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캐스린 비글로의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짐 자무시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러더> 등 거장들의 신작이 공개됐다. 이 가운데 <프랑켄슈타인>과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노아 바움백의 <제이 켈리> 등 3편이 넷플릭스 영화로 올해 베니스 경쟁부문에 출품됐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러더>

2018년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황금사자상을 탄 이후 넷플릭스와 베니스영화제의 협업은 오랫동안 침체를 겪던 영화제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논란 이후 OTT에 문을 닫은 칸과 달리 베니스는 적극적으로 넷플릭스를 끌어들이며 반전을 꾀했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칸에 빼앗겨온 거장들과 스타들을 레드카펫으로 모셔온다는 전략이었다. 영화제쪽에 따르면 2012년 3만5천장 정도 팔렸던 상영작 티켓이 지난해에는 9만장을 넘겼다니, 이 전략은 꽤나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더 테스터먼트 오브 앤 리>

특히 <로마>(2018), <노매드랜드>(2020), <가여운 것들>(2023), <브루탈리스트>(2024) 등 베니스에서 월드프리미어를 했던 영화들이 미국 아카데미의 주요 수상작이 되면서 최근 베니스는 아카데미 레이스의 스타트라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대 영화제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베니스영화제가 아카데미의 권위에 끌려간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아카데미가 <기생충> 등 비영어권 영화에 대한 문턱을 낮추면서 최근에는 베니스와 토론토국제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이어지는 레이스는 전세계 영화인들이 선호하거나 선망하는 코스가 되어가고 있다. 칸영화제가 2023년부터 영화제에 왔던 주요 출품작 가운데 오스카 후보에 오른 작품들을 공식 누리집에 성과로 공개하는 걸 보면 세상 콧대 높던 최고 권위의 영화제 역시 베니스영화제가 바꾼 최근의 흐름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올해의 넷플릭스 출품작들은 큰 화제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기예르로 델 토로가 메리 셸리의 원작을 해석한 <프랑켄슈타인>은 델 토로 특유의 환상적인 비주얼 연출이 호평받았지만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주제의식은 새롭지도 비범하지도 않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캐스린 비글로의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힘의 균형을 통한 세계평화라는 명분으로 벌이는 핵 군비 경쟁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영화다. 어디선가 쏘아올려진 핵탄두미사일이 미국 시카고를 겨냥해 날아오자 백악관과 펜타곤 등은 미사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찾아 헤매며 우왕좌왕하다가 무기력하게 파국을 맞는다는 스토리다. 주제의식에 견줘 전개 방식의 허술함이 점수를 깎아먹었다. 넷플릭스와 베니스가 사랑해온 감독 노아 바움백의 <제이 켈리>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중년의 스타배우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가족, 우정 등 화려한 명망 뒤로 놓치고 살았던 가치를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주인공 조지 클루니가 제목이자 캐릭터인 제이 켈리와 겹쳐 보이며 주제의식 역시 식상해 별다른 화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힌드 라잡의 목소리>의 반향

<힌드 라잡의 목소리>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

<어쩔수가없다>에 이은 영화제의 두 번째 화제작은 3일에 베일을 벗은 튀니지 여성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힌드 라잡의 목소리>였다. 2024년 1월 가자 지구를 탈출하기 위해 삼촌 부부, 사촌 4명과 함께 차에 탔던 6살 꼬마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당시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다른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맞고 피투성이 시체들 사이에서 혼자 남은 힌드 라잡이 휴대폰으로 적신월사(이슬람권 적십자 조직)에 구조 요청을 했으나 결국 사망에 이른 사건으로, 당시 녹음된 구조 요청의 목소리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비극을 전세계가 다시 한번 확인한 사건이다.

4일 아침 상영된 첫 공개 현장에서는 흐느끼거나 코를 푸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당시 녹음된 힌드의 목소리가 그대로 공개되면서 목소리를 둘러싼 적신월사 활동가 넷의 아이를 구조하기 위한 처절한 분투, 가느다란 희망과 참혹한 절망이 교차하던 당시 상황이 재현된다. 좁은 사무실에서 휴대전화 속 힌드의 목소리와 직원들의 통화와 대화로만 진행되는 90분이지만 드라마보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현실의 힘이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2023년 칸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올파의 딸들>의 아카데미 캠페인을 위해 2024년 초 미국에 머물렀던 하니야 감독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도달한 힌드의 목소리를 듣고 “땅이 발 밑에서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10년간 준비하던 영화의 프리프로덕션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지만, 그는 모든 걸 뒤로 미루고 이 작품의 기획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과 1년여 만에 작품을 완성해 베니스에 도착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규탄한 목소리가 리도섬에도 울려 퍼졌다.

<힌드 라잡의 목소리>가 이번 영화제에서 차지하는 상징은 경쟁부문의 21개 작품 중 하나가 아니다. 지난 5월 칸영화제를 달구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규탄한 목소리가 리도섬에도 울려 퍼졌다. 영화제가 가장 붐볐던 지난 8월30일 리도섬 선착장 앞 산타마리아 엘리사베타 광장은 ‘학살을 멈춰라’, ‘팔레스타인 민족의 비인간화와 말살은 이제 그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쇼아(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다’ 등이 적힌 펼침막과 손팻말을 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레드카펫이 깔린 팔라초 델 시네마 인근까지 거리 행진을 하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영화제의 선명한 입장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개막 직전에는 켄 로치, 셀린 시아마, 알바 로르바케르와 알리체 로르바케르 자매 등 베니스 수상 이력이 있는 중요 영화인들이 대거 동참한 ‘베니스포팔레스타인’(Venice4Palestine)의 공개서한이 주최쪽에 전달됐다. 이들은 서한에서 “전세계의 이목이 영화제에 집중된 지금 슬프고 공허한 허영의 장이 되지 말고 이스라엘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저항의 장이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이 주제는 이번 영화제에 다양한 층위의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배우 브래드 피트·호아킨 피닉스·루니 마라,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알폰소 쿠아론 등 할리우드 거물들은 <힌드 라잡의 목소리>의 제작 크레딧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 한편 이번 영화제에도 여러 편을 가져온, 런던에 본거지를 둔 예술영화 배급사 무비는 이스라엘의 테러 행위와 관련됐다는 의혹을 받은 벤처캐피털 기업 시콰이어로부터 1억달러를 투자받아 관련 작품 감독들을 당혹게 했다. 무비의 배급작 중 하나인 <파더 마더 시스터 브러더>의 짐 자무시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무비와의 협업이 시콰이어쪽 투자보다 훨씬 일찍 이뤄졌음을 강조하면서 “유감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기업의 돈은 거의 모두 더럽다. 지저분한 자본을 피하는 방법은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힌드 라잡의 목소리>처럼 첨예한 정치적 주제가 아니라도 현실은 이번 영화제의 굵직한 줄기다. 핵 군비 경쟁을 비판하는 비글로의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정리해고의 비정한 현실을 풍자적으로 담은 <어쩔수가없다>, 플랫폼 노동으로 힘겹게 사는 예술가의 현실을 그린 프랑스 감독 발레리 돈 젤리의 <앳 워크> 등이 그렇다.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근의 영화제는) 우리가 현실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로 돌아가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전쟁, 기후변화, 사회적 긴장, 차별, 포퓰리즘, 권위주의 등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주요 이슈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현지 데일리에 쓰기도 했다.

논란 속 <애프터 더 헌트>

이번 영화제에서 논쟁을 촉발한 작품으로 루카 구아다니노의 <애프터 더 헌트>를 빼놓을 수 없다.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이 영화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유능하고 야심 있는 예일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가 자신과 가까운 동료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발을 접한다. 여느 ‘미투’ 관련 영화와 달리 <애프터 더 헌트>는 복잡한 양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을 선명하게 긋지 않는다. 자칫 일종의 백래시로 읽힐 수도 있는 탓에 공개된 뒤 별점 테러에 가까운 낮은 평점을 받았다. 영화 크레딧의 서체와 스타일이 성폭력 논란으로 영화계에서 퇴출된 우디 앨런의 작품을 연상시킨 것도 작품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증폭시켰다.

기사를 쓰고 있는 4일 오후 영화제는 경쟁부문에 초청된 21편 가운데 16편을 공개했다. 배우 서기의 첫 장편 연출작 <소녀>와 양조위가 주연한 헝가리 여성감독 일디코 엔예디의 <사일런트 프렌드>, 중국 감독 차이샹준의 <일괘중천> 등 5편의 작품이 공개를 앞두고 있다. 영화제는 반환점을 돌아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매일 아침 8시30분부터 시작되는 대부분의 상영작은 상영시간마다 1400석, 1700석에 달하는 대극장들까지 만석에 가까운 호응을 얻고 있다. 업계 관계자가 아닌 일반 관객들의 관람이 사실상 막혀 있는 칸영화제와 달리 베니스영화제는 일반 관객들을 위한 표도 상당 부분 열려 있다.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은 “영화제 관객들이 집에서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극장에서 보는 게 훨씬 더 풍부한 경험이란 걸 깨닫고 이 과정이 관객을 전통적 영화 관람 방식으로 돌려놓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82회 베니스영화제는 6일 저녁 올해 황금사자상의 주인을 호명하며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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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베니스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