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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사랑하는 이들, 하나가 될 텐가? - <투게더>와 보디 호러
이우빈 2025-09-05

<티탄>(2021)이 쏘아 올린 공일까. 보디 호러는 지난 몇년 동안 호러 무비의 주축을 담당하는 장르로 꿈틀대고 있다. <티탄>의 명성을 이어받은 작품은 물론 <서브스턴스>(2024)일 것이다. 두 작품에 부여된 수많은 수상 실적과 화제성을 차치하고서라도, 두편의 영화가 보디 호러 장르에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나 <철남>의 쓰카모토 신야가 활약했던 20세기의 보디 호러를 확장하여 각종 젠더 담론과 여타 장르와의 접합을 이끈 것이다. <티탄>을 연출한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말처럼 <티탄>은 코미디와 보디 호러, 스릴러, 가족 드라마를 섞어낸 이종교배 장르물이다. <서브스턴스> 역시 보디 호러의 중핵에 여성이 느끼는 대상화와 자기혐오의 공포를 둔 작품이었다. 이렇게 보디 호러는 자신의 외연을 온갖 영화에 포함하며 장르의 세포를 주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아킴 트리에르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주인공 율리에는 자신과 연인 사이의 틈, 혹은 실현하고자 하는 자아와 현재 자신의 괴리를 꿈속의 보디 호러적 이미지로 마주한다. 크리스토페르 보르글리의 <해시태그 시그네> 역시 데시가하라 히로시의 <타인의 얼굴>(1966)을 오마주해 현대 SNS의 관심 과잉 시대를 사는 한 여성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곤 한다.

이쯤에서 미디어 연구자 마셜 매클루언의 말을 변주해 지금 보디 호러의 경향을 설명해도 좋겠다. ‘신체는 미디어다. 그리고 미디어는 메시지다.’ 요컨대 지금 인간의 신체는 단순히 절단되고, 찢기고, 변형되고, 사라지는 대상이 아니라 연출자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보디 호러는 슬래셔와 하드고어가 취하는 일종의 방법론적 수단에서 벗어났다. 또한 <엘리펀트 맨>이나 팀 버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괴물들의 특정적 이미지에서도 탈출했다. 대신 수많은 메시지가 흐르는 매개의 공간, 메시지의 자체적인 혈류가 된 셈이다.

보디 호러+로맨스

<투게더>

9월3일 개봉하는 영화 <투게더>도 보디 호러와 로맨스를 접합한 작품이다. 주인공 커플 팀(데이브 프랭코)과 밀리(앨리슨 브리)는 10년여간 이어온 연애의 권태기를 맞이한 상태다. 밀리의 친구들은 록스타를 꿈꾸며 허송세월하는 30대 중반의 팀을 무력한 남자라고 비판한다. 결국 둘은 교사인 밀리의 이직에 따라 한적한 교외의 마을로 이사 간다. 결혼을 눈앞에 둔 커플에겐 꽤 큰 발걸음이다. 이대로 같이 살든지, 아니면 지금 끝내든지. 가혹한 두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둘은 잠시간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한다. 이 와중에 휴일을 맞아 집 근처의 숲을 산책하던 둘은 호우를 피하던 중 지하에 침식된 어느 예배당에 추락한다. 그 안에 있는 작은 호숫가의 물을 떠마신 순간 둘은 본격적인 보디 호러의 세계에 진입한다. 둘의 신체가 말 그대로 ‘접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석처럼 서로의 신체에 끌리는 두 사람은 피부가 맞닿을 때마다 서로의 몸이 끈끈하게 붙어 합쳐지는 현상을 맞이한다. 근처에 사는 동물, 두 사람이 이사 오기 전에 실종된 한 커플이 이미 경험했던 바다.

<투게더>는 이러한 설정에 플라톤의 <향연> 속 아리스토파네스가 열변했던 고대 그리스의 설화를 덧붙인다. 밀리의 교사 동료이자 옆집 이웃인 제이미가 설명하는 것처럼 본디 인간은 머리가 둘, 팔이 넷, 다리가 넷 달린 생물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완전함을 질투한 제우스가 벼락을 쳐 인간이 둘로 나뉘어졌고 지금의 형태가 됐다는 이야기다. 제이미는 완연하게 하나가 된 몸이야말로 궁극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니겠냐며 두 사람이 외딴곳에 이사 와 살게 된 일이 분명히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 조언한다. 이 조언이 실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투게더>란 보디 호러의 골자다.

사랑하는 이와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 이는 이상적인 사랑의 형식일까 혹은 타인에게 나의 몸을 빼앗긴다는 공포의 요인일까. 이 사이에서 팀과 밀리는 고민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과 <향연>의 흐름을 재고했을 때 인간의 사랑이란 결국 자기의 결핍을 타인으로 채워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만약 두 사람이 타인 아닌 하나의 몸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결핍의 충족을 의미할까 혹은 또 다른 결핍의 발로가 될까. <투게더>는 몸의 융합이란 보디 호러적 수단을 매개로 하여 사랑에 대한 본질적 고민을 이끌고 간다.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짓기에 앞서 <투게더>는 인간의 본능적인 거부 반응을 표시한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점유하고 싶어 하며 자기 신체 역시 그 공간의 일부이다. 보디 호러는 이러한 사적 공간을 침범하고 괴롭히는 각종 방식의 집합소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팀과 밀리는 서로의 몸이 달라붙는 이 현상을 우선 부정하고, 치료와 복원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두 사람은 톱으로 서로의 몸을 다시 떼어놓기도 하며 근육이완제를 한껏 먹어 일종의 약물 치료를 시도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고민을 가중하는 지점은 섹스라는 문제다. 섹스리스 커플로 살던 둘에게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일은 사랑의 불씨가 다시 켜졌음을 증명하는 신호와도 같다. 밤마다 관계에 실패하던 둘은 초현실적인 접합 사건을 겪으며 서로를 심리적으로 원하게 되고, 이는 이윽고 둘의 섹스로 귀결된다. 그렇게 몸의 접합, 융합의 문제는 돌고 돌아 순환한다. 두 사람이 섹스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피부를 맞댄다는 일이며, 그것은 곧 둘의 신체가 합쳐지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몸의) 사랑을 택하려면 하나가 되어야 하고, (정신의) 사랑을 취하려면 둘로 찢어져 움직여야 한다는 난점 속에서 팀과 밀리는 계속하여 갈등한다. 사랑에 있어 몸과 정신의 구분이라는 이원적 사고를 택할 것인지, 몸의 충동과 성욕에 충실하며 몸이야말로 사랑의 근원이라는 태도를 취할 것인지의 갈림길이다.

이항대립을 거부하는 보디 호러

<서브스턴스>

<투게더>가 근래의 다른 보디 호러에 비해 지니는 차별점은 신체라는 매개를 친우의 대상이나 적대의 상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점이다. 보디 호러의 상대가 사랑하는 연인이란 설정이 보디 호러의 이항대립 구조를 어느 정도 상쇄한다. 이를테면 <서브스턴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의 신체는 여성을 향한 사회의 억압이 작동하는 이항대립의 한편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이항대립은 엘리자베스의 몸으로부터 ‘더 나은 자신’인 수(마거릿 퀄리)가 태어나면서도 유지된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하나이면서도 서로를 미워하고 부정하는 순환논리 속에 갇히고 만다. 이러한 순환논리를 깨부수려 나타난 마지막의 어떠한 생명체 역시, 기본적으론 엘리자베스가 자기 신체를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근래 개봉한 또 하나의 보디 호러인 <어글리 시스터>는 어떨까. 신데렐라 이야기를 변주한 이 영화는 소녀 엘비라(레아 미렌)가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19세기식의 가혹한 성형수술과 괴이한 다이어트를 택하는 서사로 그려진다. 이 과정에서 엘비라의 신체는 조형물처럼 재가공되고 변형된다. 유리구두에 자기 발을 넣기 위해 발을 잘랐다는 신데렐라의 원형 서사처럼 끔찍한 보디 호러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도 인물의 신체란 외적 성공이라는 특정한 성취를 위해 소비될 수밖에 없는 대항적 인자로 작동한다.

반면에 <투게더>의 팀과 밀리의 신체는 이항대립 구조를 생성하는 말들로 활용되지 않는다. 신체 융합의 모티프를 채택하거나, 채택하지 않는 선택지의 플레이어로 움직이는 쪽에 가깝다. <서브스턴스>의 서브스턴스 이용자가 약물 투여를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코랄리 파르자의 연출 방식과는 다소 궤를 달리한다. 물론 여기엔 또 다른 변수가 있다. 두 사람의 융합을 바라는 음험한 존재들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투게더>는 보디 호러와 함께 포크 호러의 성질을 활용한다. 두 사람이 추락했던 예배당은 인간 신체의 융합이 곧 궁극적 사랑과 진배없다는 극단적 인본주의자, 유물론자들의 무대였던 것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누설할 순 없으나, 팀과 밀리의 선택을 급박하게 강요하는 제반 상황이 호러 장르의 규칙 내에서 성실하게 펼쳐진다는 뜻이다. 이 로맨스 보디 호러의 끝에서 팀과 밀리가 어떠한 결말을 택할 것인지, 그 결말의 의미가 무엇일지는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더한 보디 호러를 느끼고 싶다면

<미래의 범죄들> <더 슈라우즈> 등으로 수십년째 보디 호러의 최고 권위자 자리를 지키는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얼마 전 타계한 컬트의 제왕 데이비드 린치, <로보캅> 등으로 일찍이 기계 신체의 불안을 그린 폴 버호벤, B급 보디 호러의 최강자인 스튜어트 고든-브라이언 유즈나 사단의 <좀비오>(Re-Animator),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단골손님인 하드 고어 슬래셔 무비 <테리파이어> 시리즈 혹은 일본식 컬트 호러를 정립한 쓰카모토 신야나 <오디션> <이치, 더 킬러>의 미이케 다카시 등 보디 호러의 매혹을 느낄 수 있는 작품과 감독은 아주 많다. 다만 ‘신체적 폭력’의 정수를 가장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론 쓰카모토 신야의 <동경의 주먹>(1995)을 추천하고 싶다. 쓰카모토 감독이 주연을 맡기도 한 이 작품은, 무기력했던 한 청년이 복싱을 배우게 되면서 폭력의 야성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다. 그 속에는 4DX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잔인한 타격감과 인간의 맹렬한 폭력성이 결국 어디에서 발원하는지에 대한 자기혐오까지 묵직하게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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