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북미 극장가의 기둥은 단연 호러 무비였다. 호러 열풍의 기수는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씨너스: 죄인들>이었다. 지난 4월 북미에서 개봉한 <씨너스: 죄인들>은 9천만달러의 제작비로 3억6600만달러의 월드 와이드 매출(출처 박스오피스 모조)을 거둬들이며 대박을 터뜨렸다. 지난 15년 동안 북미에서 개봉한 실사 오리지널 영화 중 가장 높은 수익이다. 이어진 5월엔 호러 무비의 유명 프랜차이즈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이 개봉하여 제작비 5천만달러로 2억8800만달러의 월드 와이드 흥행에 성공했다. 두 작품의 인기로 호러 무비는 올해 북미 극장가를 책임진 장르로 평가받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올해 북미 박스오피스의 티켓 판매량 17%가 호러 무비였고, 이는 2024년의 11%, 10년 전의 4%를 크게 뛰어넘은 수치였다. 9월5일 개봉할 <컨저링: 마지막 의식>까지 합친다면 올해 북미 박스오피스의 결산 키워드 역시 호러 무비가 될 전망이다.
6월엔 또 하나의 유명 프랜차이즈 후속작 <28년 후>가 흥행 배턴을 이어받았다. <28일후...> <28주 후>의 속편으로 등장한 이 작품은 제작비 6천만달러로 1억5천만달러의 월드 와이드 성공을 이끌었다. 또 하나의 흥행작은 국내에서 10월15일 개봉예정인 <웨폰>이다. 8월8일 북미에서 개봉한 <웨폰>은 현재 월드 와이드 수익 2억달러를 돌파하고 지금도 북미 박스오피스 1~2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7월 북미에서 개봉하여 1800만달러의 제작비로 6400만달러의 월드 와이드 수익을 기록하며 순방 중인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2025)의 배우 체이스 수이 원더스는 “지금이 호러 무비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느껴진다” (<BBC>)라는 체감을 전하기도 했다.
블록버스터 호러 무비라는 경향
올해 북미 호러 무비의 경향은 호러의 요소에 블록버스터의 크기를 혼합한 대규모 제작+모객으로 모아졌다. 한동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비롯한 슈퍼히어로물과 과거 인기작의 리부트 시리즈가 채웠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자리를 호러 무비가 본격적으로 꿰차기 시작한 것이다. 스타 배우들의 몸값이나 저작권료를 책임질 필요 없이 비교적 싼값으로 만들 수 있는 블록버스터 호러 무비는 저비용, 고효율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씨너스: 죄인들>은 뱀파이어를 소재로 해 시원한 총기 액션과 루드비그 예란손의 음악을 곁들였고, <28년 후>는 전통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의 뼈대에 세계 단위의 군사를 개입시키는 등 서사의 규모를 키웠다. 요컨대 호러 무비가 특정한 마니아층을 겨냥하는 대신 대중을 이끄는 팝콘무비로도 기능했다는 것이다. 최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18~24살 관객의 3분의 2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로 호러 무비를 뽑으며 장르의 대중성이 증명되기도 했다. 북미의 호러 열풍이 자국의 극장가에도 이어진 영국의 <BBC>는 최근 서구 사회 전반에 혼란과 불확실성이 커졌고, 이에 “악을 이겨내고 잠시나마 관객들에게 현실을 잊게 해주는 블록버스터 호러가 득세”했다는 사회적 배경을 평하기도 했다.
호러 무비 강세에 대한 북미의 중론은 ‘한순간에 일어난 약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10년 동안 영화 제작사 A24의 <더 위치> <유전> <미드소마> <톡 투 미>, 제작사 블룸하우스의 <겟 아웃> <해피 데스데이> 시리즈 등 저예산 호러 무비가 평단과 대중의 마음을 이끈 바 있다. 이 파장이 자연스레 큰 시장으로 흡입됐단 뜻이다. 호러 무비의 흥행 가능성을 본 대규모 스튜디오들, 이를테면 워너브러더스(<씨너스: 죄인들> <웨폰>)나 컬럼비아 픽처스(<28년 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가 호러 무비에 적극적인 투자를 도모하면서 올해 유독 호러 무비의 강세가 대두된 것이다.
공포의 근원은 저마다 다르다
북미 극장가를 뱀파이어, 좀비, 유령 등이 지배한 한해였으나 조금 달리 볼 부분도 있다. 북미의 호러 무비 열풍이 전세계에 공통으로 적용됐다고 보기엔 어렵단 지점이다. 이를테면 <씨너스: 죄인들>은 월드 와이드 수익의 76%인 2억7900만달러를 내수시장에서만 뽑아냈다. 한국에서는 관객 7만8천명, 64만달러라는 저조한 흥행 추이를 남겼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도 한국에선 8만 관객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28년 후> 역시 북미에서 47%(7천만달러)의 수익을 챙겼으나 작품의 배경지이자 대니 보일 감독, 앨릭스 갈런드 각본가의 고향인 영국에서 2100만달러를 벌었을 뿐 그 밖의 지역인 아시아, 남미 등에선 유의한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요컨대 호러 무비는 해당 지역 관객의 성향, 지역의 정치·문화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 장르임이 다시금 입증된 것이다. <씨너스: 죄인들>은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블랙 호러 장르로, 미국 고유의 음악인 블루스와 흑인 문화, 레이시즘(인종차별주의)과 KKK단 등을 소재로 택해 인종 이슈에 관련한 트럼프 시대 미국의 사회적 불안을 은유한 작품이었다. 북미 관객들에겐 강렬하게 닿았을 만한 메시지였겠으나 한국 대중을 사로잡기는 힘들었던 셈이다. 앞선 <BBC>의 설명처럼 호러 무비는 당대 대중의 억압된 감정을 특정 대상에 비유해 ‘공포’로 치환하는 전략을 펼쳐왔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전후 독일, 제1차 세계대전 후 어지러웠던 독일 사회의 분위기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노스페라투>(1922) 등 표현주의 사조로 나타났다. 각종 괴물의 등장과 강렬한 흑백의 대조로 그려낸 호러 무비의 대표적 시발점 중 하나였다. <씨너스: 죄인들> <28년 후> 역시 현대의 북미와 유럽이 공유하는 트럼프 리스크,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 이민자 정책을 향한 각론 등 여러 정치적 혼란을 장르물의 색채와 블록버스터의 규모로 품어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보디 호러 유행
그러니 반대로 최근 한국에서 유행한 일련의 호러 무비를 살피면 한국 사회가 지닌 불안과 공포를 인식할 수도 있다. 지난 6월25일 개봉해 170만 관객이란 장기 흥행을 이끈 한국의 공포영화 <노이즈>는 ‘층간소음’을 주요 소재로 택했다. 2012년 개봉한 <이웃사람>부터 시작해 공동체, 이웃에 대한 은밀한 공포를 확장한 사례다. 지난 7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84제곱미터> 역시 층간소음을 주된 주제로 청년실업, 부동산 문제, 주식·코인 투자의 부작용 등 근래 한국에서 담론화되어온 사회문제를 구체화했다.
또 하나 한국에서 유효한 호러 장르는 ‘보디 호러’다. 지난해 56만 관객을 돌파하며 아트하우스영화의 유행을 주도했던 <서브스턴스>부터 최근 개봉하여 2만 관객을 넘긴 <어글리 시스터>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역으로 공포의 소재로 택하면서 젊은 관객층의 호응을 이끌고 있다. 9월3일 개봉하는 또 하나의 보디 호러 <투게더>의 수입권을 두고 국내의 여러 수입·배급사가 경쟁했다는 후문도 국내 보디 호러의 유행 현상을 증명한다. 즉 호러 무비는 언제나 흥행에 유효한 보편적 장르인 한편, 소비하는 지역의 풍토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특수 장르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이 특히 올해 호러 무비의 트렌드를 통해 도출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공포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호러 무비의 성패를 좌우하는 최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