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박 로드리고 세희의 초소형 여행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

압둘 와합을 만나면서였다. 시리아를 그리워하게 된 것은. 이슬람 세계를 공부하는 작은 월례모임 자리에 초청된 그는 비교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십수년 전 서울에 온 시리아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었다. 그가 고국을 떠난 지 얼마 안돼 시리아에서는 ‘아랍의 봄’에 따른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고, 항쟁은 외세가 개입하면서 내전으로 번졌다. 와합의 이야기를 듣던 날, 내가 여행했을 당시의 평화로운 시리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손꼽는 나라.

오래전 나는 한국을 떠났었다. 촬영 스태프의 피폐한 삶에 지쳐서였다. 그 시절의 촬영 현장이란 고단한 것은 물론이고, 박봉에다 고용불안이 심했고, 열정을 담보로 온갖 착취가 횡행하는 곳이었으니까. 어영부영 나이는 먹어가는데 성취한 것은 없고 미래는 한없이 불안했다. 영화에 청춘을 바쳤는데, 영화는 나를 버리는 것만 같았다. 상심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먼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마치 은둔 수사처럼. 그래서 선택한 곳이 아라비아반도였고, 반도의 관문이 시리아였다.

시리아는 한국과 같은 시대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전역이 낙후되어 있었다. 지은 지 10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건물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사람들은 아랍의 전통 복장을 하고 있거나 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있어도 남루했다. 그러나 퇴락한 풍경과 달리 사람들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거리에서 길을 물으면 하나같이 몇 블록을 함께 걸어서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는 악수 한번 딱 나누고는 생색내는 일도 없이 돌아갔다. 멀어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미안한 마음에 꾀를 내어 상점 주인에게 길을 물었다. 가게를 지켜야 하니 데려다주지 못하겠지. 그러나 웬걸, 그들은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데려다주었다. 멀다 싶으면 택시를 잡아 목적지에 내려주고는 타고 온 택시 그대로 돌아갔다. 노점에서 빵이나 과일을 사려고 하면 그냥 먹으라는 듯이 손에 쥐어줬고 계산을 치르려고 해도 한사코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내 하던 일에 열중했으니까. 가만히 길을 걷는데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멀리서 나를 부르곤 했는데, 가보면 그저 홍차 한잔 마시고 쿠키 한 조각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시리아는 온통 이방인에 대한 환대로 넘쳐났다. 하루는 영어를 쓰는 청년을 만나게 되어 물어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왜 이토록 친절하냐고. 청년은 내가 시리아에 왔으니 ‘손님’이라고 했다. 그리고 집을 떠나 먼 곳에서 불편을 겪는 ‘약자’이기 때문에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어려서부터 그런 가르침을 받아왔다고. 시리아 사람들은 늘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곤궁할지는 몰라도 삶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가까운 사람들과 홍차를 마시고 물담배를 피우며 망중한을 즐겼고, 하루에 다섯번 알라에게 기도 드리는 것 또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경쟁 사회에 찌든 나의 사유 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고한 영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인간의 원형이 그러하리라.

나는 시리아 사람들을 흉내내듯 자본주의와 거리를 두고, 아무하고도 경쟁하지 않으며 나만의 여행을 가난하게 이어갔다. 시리아에서 시작해 요르단, 예멘, 이란 등 중동 전역을 여행하고 중앙아시아에서 남아시아까지 모든 아시아를 두루두루 섭렵했던 긴 여행. 돌아오지 않으리란 비장한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문득, 이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복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상처난 마음에는 뭔지 모를 용기가 가득 차 있었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돌아와서는 지난한 줄 뻔히 알면서도 영화판으로 돌아갔고, 여행으로 얻은 용기를 반추하며 긴 시간을 다시 견뎠다. 그사이 영화계는 필름에서 디지털로 제작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고, 드높아진 K콘텐츠의 위상과 함께 유례없는 호시절을 누리기도 했다. 지금은 거품이 빠지는 조정기를 거치는 중이지만. 업계의 성장과 함께 나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뚫고 마침내 촬영감독이 되었다. 여행이 나를 회복시키고 용기를 채워주지 않았다면 치열한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진작에 나가떨어졌을 테지.

와합을 만났던 날, 집으로 돌아와 시리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들추어보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여행자를 환대해주던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은 여태 무사할까? 시리아가 그리웠다. OTT를 뒤져 다큐멘터리영화 <시리아의 비가: 들리지 않는 노래> <화이트 헬멧: 시리아 민방위대>를 연달아 보았다. 영화 속에서 시리아는 희망 없이 말라비틀어져가고 있었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어 멈춤과 재생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시리아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들이 먼저 여행자인 나를 ‘손님’으로 격상시켜주었고 ‘약자’인 나를 보살피며 환대해주었으니까. 지금은 시리아 사람들이 약자가 되었으니 내가 갚을 차례였다.

오랜 준비 끝에 다시 시리아에 다녀올 수 있었다. 지난해의 일이었다. 와합의 주선으로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구호단체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행정 절차를 거쳐 겨우 방문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체류 기간은 단 하루. 터무니없이 짧았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나중에 정세가 나아지면 더 긴 시간을 마련해 다시 가야지. 오래도록 시리아의 재건을 목격하고 증언해야지. 가서 보니 여러 무장단체간의 격전이 남긴 흔적은 참혹했다. 죄 없는 시리아 국민들은 파괴하는 이들보다 더욱더 열심히 재건하고 있었다. 절망 속에서 애써 희망을 길어올리며 국경에 면한 작은 마을을 거닐 때였다. 이방인을 본 누군가가 집을 대신하는 천막으로 들어가더니 차 주전자를 가지고 나와 나를 붙들었다. 홍차 한잔 마시고 가라고. 이 난리통에도 멀리서 온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을 잊지 않는 시리아의 한 시민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