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일대종사>(2013)가 거대 도시 홍콩의 시작과 홍콩의 시각에서 바라본 중국 근대사를 펼쳐낸 작품이었다면 <번화>는 왕가위 감독이 중국 경제의 1번지인 현대 상하이의 시작에 현미경을 들이댄 작품이다. <해피 투게더>(1997)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7)처럼 해외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던 작품을 제외하면 전작 대부분 홍콩을 이야기의 무대로 삼았던 사실을 떠올려보면 왕가위 감독이 대륙 한복판에 깊숙이 들어가 무려 30부작짜리 시리즈를 만든 건 낯설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더군다나 상하이는 왕가위 감독이 어린 시절을 잠깐 보낸 곳이지 않나(왕가위 감독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5살 때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건너갔다.-편집자). 촬영 전, 그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만든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많은 팬들이 어떤 이야기일지 무척 궁금해했던 것도 그래서다.
진위청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번화>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이 꽃을 피우는 1990년대 상하이가 배경이다. 덩샤오핑은 1978년부터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고, 상하이는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선봉장 역할을 했던 도시다. 1990년 12월 중국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문을 연 곳도 상하이다. 가난한 청년 아바오(후거)는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돈을 벌기 위해 어르신(유번창)을 찾아간다. 멘토 어르신의 조언을 받은 아바오는 무역업과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차근차근 성장한다. 선전에서 온 젊은 여성 사업가 리리(신즈레이)는 고급 식당 즈전위안을 열어 상하이 야간문화의 중심지인 황허루를 뒤흔든다. 마침 판 사장이 자신의 고급 셔츠 브랜드인 삼양을 상하이에 론칭하기 위해 아바오를 만나러 상하이에 온다.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불안했던 사람들의 심리를 다루었던 전작처럼 <번화> 또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맞닥뜨린 사람들과 그들의 선택을 그려낸다. 총 30부작 중에서 7월16일 현재 16화까지 국내 공개되면서 반환점을 막 돈 이 드라마는 1990년대와 1970년대 두 시대를 교차하며 아바오가 공장노동자에서 백만장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그를 둘러싼 세 여성과의 관계를 펼쳐낸다. 원작이 그랬듯 드라마 <번화> 또한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일상과 시시각각으로 풍경이 변화하는 황허루의 구석구석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특히 왕가위 감독의 오랜 팬이라면 이야기 곳곳에 그의 인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댜오이난 감독의 영화 <백일염화>, 드라마 <랑야방> 등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후거가 연기한 아바오는 많은 중국인이 그리워하는 그때 그 시절 상하이의 화려했던 얼굴과 다름없다. 거세게 몰아치는 변화의 한가운데서 그는 쉽게 흔들리지 않고, 심지가 단단하며, 신의와 의리를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다(심지어 키도 크고 얼굴까지 잘생겼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92살 배우 유번창이 연기한 어르신은 개혁시대 최전선에서 아바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다. 링쯔(마이리), 미스 왕(탕옌), 리리(신즈레이) 등 아바오를 둘러싼 세 여성은 아바오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서사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황허루를 한가운데 두고 총성 없는 금융 전투를 벌이는 이들의 고군분투는 현대 상하이의 출발점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번화>는 우정, 약속, 용서 같은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쩌면 그것이 <번화>를 관전하는 주요 포인트이자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국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그때 그 시절 상하이를 그리워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