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는 공개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전세계 41개국 톱10 1위로 올라섰다. 영화 속 주인공인 루미(아든 조)와 미라(메이 홍), 조이(유지영)는 인기 아이돌 ‘헌트릭스’의 멤버이자 인간의 영혼을 노리는 악귀를 처단하는 헌터들이다. 그에 맞서 빌런 귀마는 악귀들로 구성된 아이돌 ‘사자보이즈’를 결성해 인간세계로 보낸다. 악귀인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루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동료들에게 쉽게 터놓지 못하고, 귀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진우(안효섭)와 가까워진다. <틴 울프>, 넷플릭스 시리즈 <파트너 트랙>에 이어 루미의 목소리 연기를 한 아든 조는 <케데헌>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양인 배우에게 <케데헌>의 인기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에 관해 아든 조는 주저 없이 솔직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 전세계 수많은 시청자들이 <케데헌>에 열광하고 있다. 인기를 체감하나.
물론이다. 주변에서 많이들 좋아해주셔서 감사하다. <케데헌>은 음악과 패션, 뷰티 등 한국 문화의 거의 모든 걸 다루고 있는데 영화에서 이걸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루미를 연기할 때도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한국의 아이돌과 아이돌 팬들이 아쉬움을 느낄 것 같아 걱정이 컸다. 그럼에도 이 부담감을 잘 이겨내고 싶었다. 미국영화이기 때문에 대본 역시 영어로 쓰여 있지만 와중에도 인물들이 한국인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감독님, 작가님이 애를 많이 쓰셨다. 그래서 대사의 일부가 한국어로 쓰여 있는데, 내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해도 최대한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한국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 옳았다는 답을 들은 것 같아 뿌듯하다.
- <케데헌>에는 오디션을 통해 합류했다고.
처음엔 셀린 역을 준비했다. 배우로 일해온 지가 꽤 돼서 루미 역은 더 젊은 배우에게 가야 할 배역이라고 생각했다. 셀린에게 어울릴 만한 어른스러운 목소리 톤을 연습해갔는데 정작 내가 받은 피드백은 ‘루미 역에 더 잘 어울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피드백을 받으니 욕심이 났다. 미국에서 동양인 여성 캐릭터가 메인에 서는 작품을 할 기회가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추가 오디션을 보자는 콜백을 받았을 때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는데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줌 인터뷰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제대로 임해서 이 역할을 반드시 따내고 싶었다.
-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에 도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가장 도전이라 느낀 지점은.
배우들끼리 감정을 주고받으며 연기하는 게 일반적이라 혼자 스튜디오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는 환경에 쉽게 적응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외모나 표정, 동선을 고려할 필요 없이 목소리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사실에 상당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작업 과정도 재밌었다. 처음엔 스케치 단계의 이미지만 보고 장면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연기했는데 갈수록 애니메이션이 완성되어가는 걸 보니 신기하고 재밌더라. 다른 배우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플레이백 신의 목소리를 들을 땐 함께하는 듯한 생생함마저 느껴졌다. 루미는 젊은 여성 가수이고, 강인한 성격과 책임감을 지녔다. 그래서 목소리 톤이 너무 무거워도 너무 귀여워도 안됐다. 그 복잡한 요소들을 목소리에 담아내기 위해 세심하게 레이어를 쌓았다. 1년 넘는 시간을 루미로서 살아내고 나니 마지막엔 오히려 아쉽더라. 새로 녹음할 게 있으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웃음)
- 루미는 가수로서 남 앞에 설 일이 많다. 무대에 자주 오르지만 자신의 치부라 생각하는 악귀의 문양만큼은 철저히 감춘다. 배우로서 활동할 때도 자신을 어디까지 드러내는 게 맞을지에 관한 고민이 잇따랐을 텐데, 루미에게 공감되는 순간은 없었나.
미국에서 활동하던 때가 많이 떠올랐다. 미국에선 동양인 배우로서 맡을 수 있는 배역의 한계가 분명하다. 내가 아무리 입체적인 캐릭터를 맡고 싶어도 ‘그런 건 너희 나라 가서 하라’는 식의 회신이 돌아오곤 했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났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큰 작품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더라도 내게 가해지는 인종차별은 여전했다. 그로 인한 상처를 오랫동안 품어왔는데, 루미가 악귀 문양을 숨기는 걸 보면서 눈물이 났다. 루미가 셀린에게 “제 전부를 사랑할 순 없었나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마치 내가 느껴온 감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나와 같은 동양인 여성배우는 메인 롤을 맡을 수 없는 건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는 정말 없는 건지 긴 시간을 고민했고, 한국인이라는 나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케데헌>을 통해 마침내 나의 자리를 찾았다고 느낀다. 이 정도로 큰 규모의 에니메이션에서 한국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나 싶다. 전세계가 한국 문화를 인정해주는 게 무척 기분 좋았다.
- 예전 한 인터뷰에서 “연기할 때마다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녹여낸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루미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조이, 미라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더 일찍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 같나.
만약 나라면 바로 이야기했을 거다. 솔직하게 나를 오픈하는 스타일이고 감출수록 오해가 쌓인다고 여기는 편이다. 조이와 미라가 루미의 악귀 문양을 보고 칼을 겨눈 것도 배신감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 루미의 입장도 이해한다. 그 나이대의 나였다면 마찬가지로 털어놓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 감정적으로 가장 치닫는 장면 중 하나는 아까 언급했던, 루미가 셀린에게 찾아간 순간이다. 루미의 감정을 목소리로만 연기하는 과정은 어땠나.
사실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고 결과적으로 잘해냈다고 평가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훈련이 되어서인지 개인적으론 감정신을 연기하는 게 더 편하고 재밌었다. 오히려 시청자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칠 부분들이 어려웠다. (김밥을 손에 쥐는 제스처를 하며) “와구와구” 김밥을 먹을 때의 소리 같은 것들, 의외로 그 신에서 비트를 살리고 유머의 적정선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감독님이 바라는 바가 명확해서 그에 맞추려 했고 그건 실제 연기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었다. 녹음을 제일 많이 거듭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 진우에 대한 루미의 감정이 미묘하게 그려질 때가 많았다. 배우로서 그 감정선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했는지 공유해준다면.
남자든 여자든 어떻게 진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계속 그렇게 생각하며 연기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진우가 목욕탕에서 루미의 문양을 감춰준 때다. 아무도 모르게 나의 비밀을 지켜주는 사람이라니. 정말 한국 드라마에 나올 법한 장면이다. 나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웃음) 그 짧은 순간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진우가 너무 멋있었다.
- 매기 강 감독이 루미와 진우의 키스신을 삭제한 이유에 관해 “자제력이 더 섹시하니까”라고 답했다. 이 의견에 동의하나.
감독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아쉽고 답답하다! (웃음) 이런 아쉬움이 남기 때문에 팬들이 이 영화를 사랑하는 거겠지. 미국 드라마였으면 두 번째 만났을 때 벌써 사귀고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반면 한국 드라마에선 관계를 쌓아나가는 과정이 천천히 흥미롭게 전개되곤 한다. 그래서 스킨십을 하지 않아도 인물들의 삶에 깊게 들어간 느낌을 받는다. 생각해보면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키스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진우가 자신의 영혼을 루미에게 주고 간 게 더 대단하지 않나. 둘이 사귀고 사랑하는 사이라는 게 충분히 그려졌다면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영혼을 남기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을 텐데. 매기 강 감독님은 천재인 게 분명하다. (웃음)
- <케데헌2>가 제작된다면 어떤 서사를 보고 싶나.
루미 부모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사실 녹음할 때 “귀마가 루미의 아빠인가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루미에게 귀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힌트인 줄 알았다. 바로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지만. (웃음) 헌트릭스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는지 그 배경도 디테일하게 다뤄졌으면 좋겠고, 솔직히 말하면 루미가 어떻게든 진우를 되살려낼 수 있으면 좋겠다. 진짜 재밌을 것 같지 않나. 사자보이즈가 너무 좋아서 이대로 보내기가 아깝다.
- SNS에 ‘어릴 적 K팝을 꿈꾸던 아이가 전세계 1위 애니메이션의 배우가 됐다’며 감격해하는 피드를 올렸다. 어릴 때 가수를 꿈꾼 적이 있나. 학부 시절 심리학을 전공했는데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이유도 말해준다면.
부모님이 “넌 말하기 전에 노래를 먼저 했다”고 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사랑했다. 그동안 가수로 데뷔할 기회가 없진 않았지만 엔터 업계가 워낙 힘들다보니 부모님이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심리학을 전공한 건 사람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자주 겪으면서 타인의 시선과 생각이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배우가 되기로 결정한 건 더 다양한 동양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의 미디어에선 동양인 여성 캐릭터가 섹시함만 강조되거나 조연으로 등장할 때가 많았다. 나는 섹시한 타입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그럼 나는 어디에 설 수 있을까. 나같은 배우도 여러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목표로 2007년부터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이 녹록진 않았다. 연기를 하다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음악으로 도망치곤 했다.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 2013~14년에 내 차와 첼로를 팔아 《My True Happy》라는 앨범을 만든 적이 있다. 당시 내가 가진 가장 비싼 것들을 내놓은 셈이다. 배우 커리어를 완전히 그만두고 가수로서 활동하려고 했는데 그때 <틴 울프> 오디션 제안이 들어왔다. 작은 조연으로 시작해 주인공이 됐고, 작품이 큰 인기를 얻으며 여러 후속 시즌이 제작됐다. 인생이 참 신기하다. 연기가 힘들어서 음악에 전념하고 있을 때 다시 배우로 살아갈 기회가 찾아오다니. 지금도 우울하거나 잠시 쉴 틈이 생기면 여전히 곡을 쓴다. 음악이 다시 나를 살게 해준다. 몇주 후에 새 영화 촬영에 들어가는데 그전에 그동안 쓴 곡 작업을 마무리하려 한다. 다음주엔 말레이시아에 가서 2개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계획이다.
- 차기작은 어떤 영화인가.
두편이 예정되어 있다. 첫 번째 영화는 <Cheap AF>라는 로맨틱코미디다. 약혼한 친구 두명이 적은 예산으로 결혼 준비를 하는 리얼리티 경쟁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다른 하나는 홍원기 감독의 <Perfect Girl>이다. K팝 문화를 배경으로 여성들의 심리 싸움을 묘사한 스릴러다. <스크림>과 <블랙 스완>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할 정도로 <Perfect Girl>의 각본이 미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파트너 트랙> 시즌2 제작이 취소됐을 때, ‘배우로의 내 삶은 여기까지인가보다’ 싶었다. 곧 40대에 접어드는 내게 과연 새로운 기회가 올까 싶었다. 그런데 <케데헌>을 만나고 루미를 연기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루미가 위기를 잘 이겨내고 자신감 있게 무대에 오르는 톱스타여서 그랬던 걸까! (웃음) 이 힘으로 다음 작품도 잘해내고 싶다.
아든 조가 사랑하는 <케데헌>의 O.S.T
<Soda Pop> 녹음 스튜디오에서 사자보이즈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봤을 때 다같이 빵 터졌다! (웃음) 모두가 사자보이즈를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정말 귀여운 노래다.
<Free> 루미와 진우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 담긴 노래다. 비밀을 지닌 채 외로워하던 루미가 진우와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노래하고 날아오르는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What It Sounds like> 루미가 조이, 미라와 모여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루미가 자신의 치부를 공개했을 때 오히려 동료들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힘이 났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지 않나. 영화를 보고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