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는 당신, 질주하라 - < F1 더 무비>가 지켜낸 할리우드의 마지막 낭만
김소미 2025-06-27

적어도 이 영화에 기대한 것들에 대해서만큼은 완벽히 채워준다. <F1 더 무비>는 그런 영화다. 스타 파워, 레이싱 세계의 미래적 감각과 그에 반하는 관성, 중력, 몸! 승부사의 회한에 걸맞은 인생의 잠언이 적절히 곁들여져 있고, 그보다 달콤한 로맨스까지 적절히 ‘기능’한다. 모두 조셉 코신스키, 제리 브룩하이머,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한때 F1의 스타였다가 프리랜서 드라이버가 된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는 24시간 데이토나 경주팀에서 야간 교대를 맡고 있다. 그의 역할은 시종 절망적으로 뒤처지는 팀의 자리를 1위까지 순식간에 이끄는 일이다. 곡예에 가까운 추월의 기술로 치고 나가는 소니 헤이스의 첫 레이스는 물론 끝내주는 오프닝 시퀀스라 할 만하다. 다만 캐릭터가 남기는 여운은 레이스 위보다는 경주 직전 혹은 직후에 기인한다. 트레일러에서 쪽잠을 자던 남자가 부스스 일어나 식빵 한 조각을 씹어먹고는 자동차 부품의 일부처럼 운전석에 몸을 구겨넣기까지의 짧은 행로. 그사이 우리는 남자를 찾아온 낯선 꿈 하나를 되짚는다. 레이서는 한없이 잔잔한 바다를 꿈꿨었다.

왕년의 F1 루키로 소니 헤이스와 콤비를 이뤘던 루벤 세르반테스(하비에르 바르뎀)는 선수 생활에서 일찌감치 은퇴하고 레이싱팀 APXGP의 소유주로 거듭났다. 형편없는 성적에 3억달러가 훌쩍 넘는 빚을 지고 기업 이사진은 매각을 타진 중인 상황. 루벤은 유일한 구원 투수로 소니를 떠올린다. 전성기를 향해가던 때 끔찍한 사고를 겪었던 소니를- 1990년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포뮬러원 챔피언에 도전했던 실제 레이서 마틴 도널리의 사고 장면이 담긴 다큐멘터리 푸티지가 삽입된다- 10위권에도 한번 오르지 못한 약체 중 약체 팀의 에이스로 낙점한 것이다. 언더도그 신화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소니 헤이스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30년 만에, 자신이 여전히 최고라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한편 언더도그 서사만큼 부각되는 건 라이벌 구도다. 30년 만에 F1에 돌아온 남자를 맞이하는 이는 APXGP가 키운 스타 드라이버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 서로를 능가하려고 으르렁거리던 두 남자는 청년의 무모함과 베테랑의 절제력 사이에서 결국 특별한 조화를 찾아내고 말 테다.

피트 스톱의 시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의 스핀오프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준비 중인 신작 <클리프 부스의 모험>이 <F1 더 무비>에도 넌지시 그림자를 드리운 것만 같다. 두 주인공은 브래드 피트의 태생적 매력에 힘입은 교집합을 누린다. 로큰롤 정신을 타고났다는 것. 삶을 갱스터처럼 대한다는 것. 권위에는 경멸로 일갈한다는 것. 무엇보다 자신의 분야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도 강력해서 스스로를 파멸로 내모는 유혹에 취약하다는 점이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대변한다. 그 가운데 <F1 더 무비>의 소니 헤이스가 지닌 뜻밖의 발화점은, 조종석 내부에 장착된 4대의 초소형 소니 6K 액션캠에 담긴 얼굴이 속도의 포화 속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뒤틀릴 때 빛을 낸다. 카메라가 공간을 극복하고 중력을 이길 때 레이싱카를 상당 구간 직접 운전한 브래드 피트의 얼굴은 헬멧 속에서 처절하게 주름진다.

돌아온 탕아의 슬픈 서사를 처리할 때에도 각본은 쾌속으로 일갈한다. 타블로이드지 기자의 무례한 질문 하나가 소니 헤이스의 이력을 단박에 축약하는 식이다. “결혼 한번은 무효 처리. 나머지 두번은 이혼당했고, 이후 도박에 빠져 개인회생까지 신청하고 뉴욕에선 택시 기사로 일했다고요. 혹시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나요?” 이 대목에서 브래드 피트는 별달리 부연할 마음도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주인공의 레이싱 스타일이 꽤나 가학적이라는 설정도 유효하다. 그는 일부러 한발 늦게 출발하거나 뒤늦게 도착함으로써 결정적인 타이밍을 얻어내는 승부사다. 전술과 반칙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소니 헤이스식 ‘플랜C’는 우선 자신에게 패배와 지연을 안기면서 견뎌내도록 한다는 점에서 서사를 돋운다. 소니 헤이스의 도박사 기질이 때로 의도를 넘어서는 중대한 실수까지 불러일으키도록 내버려두는 영화는 주인공보다 한수 위에 있기도 하다.

루키와 베테랑이 공조해 만드는 미국식 승리, 일찌감치 전설이 될 수 있었지만 트라우마로 경력을 중단했던 남자의 회복 이야기. 그러니까 모든 것이 전통적이다. <F1 더 무비>는 태생 자체가 이 지루한 공식을 섹시하게 변용하려는 작업에 가깝다. 그 일환으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주인공만큼이나 하이테크 팀워크에도 초점을 맞춘다. <이니셰린의 밴시>(2023)의 배우 케리 콘돈이 연기한 APXGP의 기술 감독의 케이트가 중심에 있다. 육신을 걸고 달리는 레이싱계의 카우보이와 과학 천재의 로맨스다. 지금껏 F1을 그린 영화를 통틀어 여성이 이 직책으로 등장한 것은 최초이며, 이혼 후 커리어의 도약을 꿈꾸는 아이리시 여성 기술감독의 존재는 (비록 약간의 속임수일지라도) <F1 더 무비>를 확실히 산뜻하게 만든다. 루벤과 협업하지만 기업 드라마다운 어두운 반전도 가져오는 존재인 이사 피터(토비아스 멘지스), 수석 팀매니저 카스파르(킴 보드니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트 스톱의 시간에 타이어를 교체하러 달려드는 젊은 직원들의 생기도 제 몫을 해낸다. 이 언더도그팀의 처량함은 페라리, BMW, 포르셰에 한참 못 미치는 기술력으로 고전하는 순간뿐 아니라 오합지졸의 팀워크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분초를 다투며 차량을 재정비해 다시 레이스로 내보내는 과업을 초조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F1 더 무비>의 또 다른 주인공인 셈이다. 실수투성이인 신참의 성장 서사를 흡수하면서 브래드 피트 영화의 중후함은 한층 탄력을 얻는다.

정밀함 대신 압도적인 분위기로

조셉 코신스키의 관심사는 드라이버 세계의 정밀함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테크 향수주의자인 그는 몰입적인 레이싱에 주력한다. 관객은 우선 빠르게 실려가면서 뉘앙스와 분위기를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포뮬라 원 시즌 중 각국에서 펼쳐지는 8개 대회를 성실히 순회하는 동안 각각의 경주 장면은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분절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소니 헤이스와 그 경쟁자들이 펼치는 기술은 몽타주가 아니라 해설자들의 열띤 보이스오버에 빚진다. 틈새를 메우는 건 역시 고조감에 기여하는 한스 짐머의 음악이다. 종합해보면 <F1 더 무비>는 제임스 맨골드의 영화(<포드 V 페라리>)는 물론 저평가된 마이클 만의 걸작(<페라리>)을 본 적 없고, 포뮬라원에 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이들도 기어코 관중석에 앉히고자 하는 영화이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