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소책자의 영화, <더블 레이어드 타운> 고모리 하루카 감독
김예솔비 2025-05-09

<더블 레이어드 타운>

고모리 하루카의 영화에서 친근하게, 때로는 거의 주문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마을’(town)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피해 지역이었던 이와테현의 리쿠젠타카타시 주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후 고모리 하루카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그 마을에 머물며 주민들과 시간을 보냈다. 리쿠젠타카타시는 재난의 피해 지역일 뿐 아니라 누군가가 생애를 보낸 터전이고, 자꾸만 되돌아오게 되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집과 학교, 상점가처럼 으레 마을의 풍경을 구성하는 장면을 찾을 수는 없지만, 영화는 사라진 것 위에서 다시 일상을 일으켜 세우려는 주민들의 노력과 이에 손을 보태는 응답의 형식을 포착한다. 언제 다시 쓰나미가 몰려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이들은 마을로 돌아와 가게를 열고, 꽃을 심고, 일상의 동작을 회복하듯 천천히 거닐어본다. 상실의 무력감에 휩쓸려가지 않고 켜켜이 쌓이는 것들 속에서 ‘마을’의 형상이 출현한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무력감이나 사회적 애도를 동시대 일본적인 것의 정서로 표상하려는 시도가 극영화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고모리 하루카는 ‘마을’이라는 내적 세계의 단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덧대어보는 다큐멘터리적 태도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태도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도호쿠 3부작에서 재난 지역을 방문해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져온 지역 민담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다. 해당 연작에서는 ‘듣기’의 자세뿐 아니라 이동하는 절차 또한 주요하게 등장한다. <파도의 소리>에서는 이와테현과 후쿠시마현의 피해자들을 광범위하게 보여주고, <파도의 목소리>에서는 후쿠시마현의 신치마치와 미야기현의 게센누마시의 두 지역을 1년여간에 걸쳐 다룬다. 재난 이후의 다큐멘터리에서 이동은 지역 주민들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절차이자 재난의 참상을 공유하는 피해자들의 기억을 모으고 연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고모리 하루카의 영화에서 이동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거나, 강조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마을이라는 단위가 세계 전체의 단위처럼 제시된다. 그의 영화가 형상화하는 마을은 떠나고 돌아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재난으로 인해 순식간에 떨어져나온 곳에서 주민들은 귀환이라는 형식을 상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되돌아옴’이라는 형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이전과 이후의 시간은 명확히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초기작 <The Place Named>(2012)에는 손턴 와일더가 쓴 희곡 <아워 타운>의 3막을 연습하는 극단 배우들이 등장한다. 극 중에서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난 에밀리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잠시 빠져나와 자신의 열두 번째 생일로 되돌아가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낸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에밀리는 다시 죽은 자들의 세계로 돌아온다. 슬픔은 살아남은 이들의 몫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이쪽과 저쪽 세계의 사이는 재난과 죽음, 파괴라는 비가역성으로 인해 한없이 갈라져 있지만 바로 그러한 ‘되돌아갈 수 없음’이 두 세계를 더욱 가까이 접촉시킨다. 고모리 하루카의 영화에서 마을은 두 세계가, 중첩된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이며 배우와 주민들이 함께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파도의 아래, 땅의 위>

시스템의 변두리에서 자생하는 공동체를 다루며 <피스>와 <멘탈> <정신: 제로>를 만든 소다 가즈히로는 자신의 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관찰영화’라고 명명한다. 그는 극적인 내레이션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의 양식들을 걷어내고 특정한 선입견 없이 대상을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자세를 원칙으로 삼는다. 이때 ‘관찰’은 중립적인 제3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듣고 보기’라는 수단을 통해 현장에서 마주한 것을 전달하는 일을 의미한다. 한편 고모리 하루카의 영화는 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주민들의 내밀한 사정이나 심리를 직접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카메라의 윤리에 무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가 이미 안쪽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리쿠젠타카타시에서 마을을 재건하는 주민들의 활동을 따라가는 <파도의 아래, 땅의 위>는 3년8개월간 기록된 이야기다. 세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영화는 각각 마을에 지표를 세우는 여성과 마을의 소방대원이었던 남자, 꽃을 심는 주민과 봉사자들을 보여주며 내레이션을 들려준다. 이 영화에서 주민들은 미지의 타자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주민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작은 이야기’들을 주목하고 드러내는 것이 그의 영화적 실천인 셈이다.

이처럼 문자와 이야기가 주요하게 다뤄지는 고모리 하루카의 영화에서 함께 주목해야 할 동행자는 작가 세오 나쓰미다. 그는 <파도의 아래, 땅의 위>를 공동 연출했을 뿐 아니라 <더블 레이어드 타운>에서는 2031년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 SF소설을 집필했다. 두 사람은 리쿠젠타카타시에서 함께 머물다가, 2015년부터 센다이시에서 창작자 집단인 눅(NOOK)이라는 단체를 거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리쿠젠타카타시에서 머물며 만든 <파도의 아래, 땅의 위>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다면, <더블 레이어드 타운>은 재난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외부인과 지역 주민들이 만나게끔 하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토지고도화 사업이 진행 중인 마을을 방문한 워크숍 참가자들이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암송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들은 것을 기억하려 애쓰는 몸짓, 사라지는 말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붙잡으려는 연습과 오차 속에서 재난의 기억이 공동체의 언어로 재구술된다. 그리고 이는 마을의 미래를 상상하는 SF소설과 겹치며 중층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한편 고모리 하루카의 첫 단독 연출작인 <숨의 흔적>에서도 어김없이 책이 등장한다. 리쿠젠타카타시에서 모종을 판매하는 사토씨는 그날의 참상을 기록한 <마음속 희망의 씨앗>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쓰였는데, 책의 화자에 의하면 모국어로 말하기에는 너무 슬픈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외국어로 말한다 해도 고통이 줄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한다. 외국어는 서툴고 부정확하지만 기록한 자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실어나른다. 고모리 하루카의 영화에서는 말하기와 듣기, 그리고 새로 쓰기라는 수행을 통해 작은 이야기들이 공존 가능해진다.

<숨의 흔적>

2022년 니가타로 거처를 옮긴 고모리 하루카는 야스다 마을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과 더불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근작 <Springs, On the Shores of Aga>는 미나마타병 환자의 단체 대표로 활동해온 하타노 히데토를 조명한다. 매년 야스다 마을에서 열리는 환자들을 위한 추모행사인 ‘아가의 강가’는 하타노가 환자들의 증언을 모아 제작한 동명의 소책자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책자’라는 말이 그의 영화와 퍽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책자를 만들고 배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바로 그러한 범박함으로부터 듣고 말하는 공동체가 생겨난다. 자신의 독창성을 연마하는 대신 이미 거기 있는 작은 이야기들을 주목하는 다큐멘터리스트의 행보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