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제작되는 독립영화는 몇편에 이를까. 2024년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산업결산 자료에 따르면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작품공모 출품 편수로 가늠한 한국 독립영화 제작 편수는 총 1704편이다. 이중 1505편이 단편영화이며 이 또한 전년 대비 23.2%(283편) 증가한 수치다(2020년에는 1290편, 2021년에는 1432편, 2022년에는 1423편, 2023년에는 1222편이 만들어졌다). 2025년은 어떨까. 4월30일 개최를 앞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에 의하면 올해 전주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는 1510편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2020~25년 사이에만 매년 1200~1500편가량의 단편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진 셈이다. 한편 이들과 관객을 잇는 플랫폼인 단편영화제들은 여러 위기를 겪었다. 20년의 역사를 자랑해온 미쟝센단편영화제가 2022년 문을 닫았고 이후 코로나19 팬데믹 등의 상황과 맞물려 단편영화제들이 사라졌다. 영화를 선보일 창구와 더불어 제작 지원까지 서서히 줄어든 지난 2~3년간 단편영화 창작자들과 관련 업계 종사자들은 어떤 변화를 체감했나. 다각도로 밀려드는 위기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또 바꾸어나갔나. 단편영화 감독 및 유통 배급 담당자들을 중심으로 단편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질문을 건넸다.
단편영화 감독에게 영화제란 어떤 존재인가. 원론적 질문에 대다수가 계속 영화를 만들어나갈 동력이 되어준다고 답했다. “작은 영화제 일지라도 초청되거나 수상했을 때 스스로에 관해 품었던 의구심을 내려놓고 다음 영화를 찍을 힘을 얻”(노도현 감독)거나 객석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내가 왜 이런 의문을 품고 영화를 찍었는가에 관해 해소할 수 있”(김효준 감독)게 해준다. 그 밖에 개별 작업을 이어가던 감독들이 영화제에서 만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다양한 주제의 상영작을 보며 공부하고 창작의 영역을 넓힐 기회”(박찬우 감독)로 작용했다. 특히 애니메이션의 경우 “영화계에 비해 창작자간 네트워크가 잘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교류할 자리가 마련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서새롬 감독은 전한다. 단편영화는 큰 스크린으로 상영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집에서 혼자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이 감독들에게 완전히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영화제라는 구심점의 역할
단편영화제 수의 감소는 단순한 단편영화의 상영 기회가 줄어드는 결과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주제나 형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 상영의 기회가 많다면 SF, 액션, 호러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볼 테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하니 새롭게 도전하기보다 영화제에 선정될 가능성이 높거나 관객 반응이 좋을 만한 주제와 형식을 택하는 등 제작의 보수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영화제에선 대체로 메시지가 명확한 작품을 선호함에 따라 실험적인 작품이 적어졌고 환경영화제, 노인영화제 등 특정 주제가 강조된 영화제에 선정되기 위해 관련 서사를 안정된 방향으로 전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박예지 인디스토리 국내단편 배급담당) 그로 인해 상업영화계는 장르물이 훨씬 많이 제작되는 추세임에도 단편영화는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미쟝센단편영화제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장르 단편영화를 자주 상영하지만 일반적인 단편영화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드라마’로 통칭되는 장르의 단편들이 주로 만들어지고 있어 다양성에 관한 고민이 많다. 재밌게 관람할 수 있는 장르 단편이 많이 나와야 시장이 활성화될 텐데 데 오히려 역으로 가고 있어서다.”(백다빈 필름다빈 대표)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는 단편영화 출품의 기준이 30분, 전주영화제는 40분인데 <퀸의 뜨개질>은 러닝타임이 36분이라 부산영화제에는 출품할 수가 없었다”던 조한나 감독의 경우처럼 영화제마다 단편영화의 기준이 달라 작품의 상영시간도 그에 맞춰 제작되는 경우도 더러 발견됐다. “단편영화에 관한 지원이 줄거나 단편영화제가 더이상 열리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온 2~3년 전부터 감독들이 미팅 때 영화제작 이후에 관한 불안감을 자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것이 영화의 주제와 형식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홍성윤 센트럴파크 단편영화 배급사 대표)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시각이 돋보이는 단편영화들이 나오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는 건 위험신호라고 단편영화 배급사들은 목소리를 모았다. 한편 숏폼 콘텐츠를 중점적으로 초청하고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영화제들도 다수 생겨났다. “그렇지만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지는 추세다. 살아남은 축제들 중엔 후원 업체들의 입맛에 따라 숏폼의 보충 콘텐츠로서 단편영화를 끌어들이는 사례도 있었다.”(홍석호 퍼니콘 단편영화 배급사 이사) 미디어 업계의 변화에 따라 단편영화와 숏폼 콘텐츠를 엮어 언급하는 경우가 늘고 있고 감독들은 이미 동료들이 단편영화 제작을 멈추고 숏폼 콘텐츠 업계에서 활동한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계속 단편영화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단편영화를 무엇이라 정의내리고 있는가.
‘숏폼 콘텐츠와 단편영화를 반드시 나눠야 하냐’라는 의문도 제기됐지만 대다수 감독들이 두 매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단편영화는 기본적으로 극장 상영을 전제로 하는데 숏폼 콘텐츠는 SNS, 유튜브 등 수익형 플랫폼 업로드를 기반”(전도희 감독)으로 하기 때문에 “수익과 조회수, 흥미를 끌겠다는 목적성이 뚜렷하다. 반면 영화는 이러한 성과를 100% 노리거나 보장하며 찍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목적성의 차이가 크다.”(박찬우) 또한 꾸준히 단편을 제작해온 감독들 중 단편을 단순히 장편영화 제작을 위한 도움닫기로 여기는 시선에 반감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장편영화가 주요하게 소비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단편을 그만하고 장편 작업을 시작하라는 말이나 단편이 장편을 향한 포트폴리오나 준비 단계로 여겨지는 인식엔 동의할 수 없다. 내게 영화 만들기는 의문을 해소하는 과정인데 어떤 궁금증은 짧게 해소될 수 있고, 어떤 궁금증은 길게 풀어내야 할 만큼 복잡하다. 결국 영화의 길이는 그 의문의 답을 찾기까지 걸리는 이야기의 분량에 따라 달렸을 뿐이다.”(김효준) 영화제를 비롯한 상영 플랫폼과 관객의 선호도에 따라 상영시간, 주제, 형식을 맞춘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단편영화 감독들은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 실험적으로 해나갈 수 있”(박찬우)고, 다루고 싶은 주제가 단편영화라는 매체의 포맷에 맞기 때문에 이를 선택한다고 말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단편영화의 가능성을 낮게 판단할 수 없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온전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 방안 필요
장편영화 제작을 지속하기 위해 감독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많이 언급된 것 중 하나는 역시 재정적 지원이었다. 가령 <퀸의 뜨개질>은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지지를 받았지만 조한나 감독이 받은 상금을 전부 합쳐도 제작 기간 2년 동안의 생계유지비에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다큐멘터리는 사비로 만들지 않는 이상 제작 지원은 필수적인데, 극영화에 비해 제작 지원을 받을 기회가 적다. 그러다보니 제작 기간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제에서의 주목과 성공이 감독으로서 나의 삶을 전혀 보장해주지 못했다.”(조한나) 홍성윤 센트럴파크 대표는 지원 제도의 다각화의 필요성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영화제 수상 등 지원 작품의 성과에만 초점을 맞춰선 안된다. 몇 퍼센트 이상은 인건비로 쓸 수 없다는 기준 때문에 감독들은 제작 지원비를 받고서도 다시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해외의 제작 지원 제도들처럼 감독들이 온전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지역영화 제작의 어려움도 제기됐다. 대구에서 영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박찬우 감독에 따르면 “대구의 경우 대구독립영화협회를 비롯해 대구 기반의 소수 영화인들이 함께 작업하는 인력풀의 전부다.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료 의식은 깊어지지만 한편으론 스태프가 동일해 기술이나 작품의 다양성 보장이 어렵고, 구비된 장비와 물자도 넉넉하지 않다.” 전북지역 기반의 단편영화 감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인 ‘전주랩: 단편’을 진행하는 박태준 전주프로젝트 총괄 프로듀서 또한 “지역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을 포함해 단편영화 감독들을 지원하고 발굴할 자리를 더 많이 마련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온라인 상영, 배급이라도 좋으니 작품을 상영할 플랫폼이 더 늘어나면 좋겠다”(노경무 감독)는 창작자들의 니즈에 따라 단편영화 배급사 차원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권소연 포스트핀 배급팀장은 “전주영화제 등 일부 영화제에서 단편영화 상영 편수를 늘리고 있고 여러 극장에서 단편 기획전을 꾸리는 경우가 많아 단편영화 상영 수가 절대적으로 줄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전처럼 기획전을 꾸릴 만한 추천 리스트만 전한 채 연락을 기다리는 시대는 끝났다”고 지적했다. 더 많은 관객들이 단편영화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유튜브 리뷰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마케팅 홍보를 강화하는 한편 한국단편영화상이라는 시상식도 따로 개최했다. 해당 시상식은 단편영화 배급사인 포스트핀, 센트럴파크, 필름다빈, 인디스토리, 퍼니콘, 씨앗이 주관하는 행사로 당해에 주목해야 할 작품들을 소개하고 수상하는 축제다. 그 밖에 퍼니콘은 공공기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단편영화 OTT 플랫폼인 ‘숏버스’를 론칭했다. “지난해부터 도서관과 문화센터, 미디어센터 등에서 단편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단순히 OTT 플랫폼을 통해 작품들을 상영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감독이나 배우를 초청해 관객들과 함께 영화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2020년 개소한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는 단편영화들의 온라인 상영과 비즈매칭, 배급 아카데미 지원 사업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지연 인디그라운드 센터장은 “앞서 언급한 사업들이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순환되고 있기 때문에 온라인 상영을 한 감독도 유통 배급에 대한 지식을 얻어갈 수 있고 이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고 전한다. 특히 1020 젊은 관객들의 이용도가 120~130% 늘고 있어 고무적이다. 한편 이지연 센터장은 “단편영화제들이 사라지고 작품들이 상영될 창구가 줄면서 지난 몇년간 그 대안으로 온라인 상영을 확대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수치상 단순히 영화제와 온라인 상영 기회만 늘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언급했다. “특히 온라인 상영 관련 사업은 생겼다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인디그라운드와 같은 공적 플랫폼과 결합한 온오프라인 방식을 고려해 단편영화의 확장성, 유통 배급 활성화를 도모하는 방안을 강구해볼 수 있다.” 박예지 인디스토리 배급 담당은 매체 차원에서도 단편영화를 더 많이, 자주 다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옥섭 감독의 장편이 화제가 됐을 때 그의 전작 단편들 또한 함께 언급됐던 때가 기억난다. 특정 감독의 대표작을 이야기할 때 해당 리스트에 단편영화도 같이 올리거나 단편영화 작업을 지속하는 감독들에도 주목해주길 바란다.” 현실과 타협하는 대신 다른 창구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창작자와 배급사, 그리고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씨네21>을 비롯한 언론매체 또한 매년 수천개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단편영화에 더 넓고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