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도 분위기가 아스라이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내겐 홍콩이 그렇다. 동서양이 교차하는 듯 보이고 인구가 밀집해서인지 묘한 활기가 도는 곳. 누구나 홍콩영화에 한번쯤 푹 빠져봤으니 공감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매년 3월이면 옛 홍콩영화의 활력을 이어받은 것처첨 많은 영화와 방송 관계자들이 모여 비즈니스를 벌이는 홍콩필름마켓(The Hong Kong International Film and TV Market), 일명 ‘필마트’(FILMART)가 열린다. 올해 제29회를 맞은 필마트에 참석하여 어떤 방식의 협업과 비즈니스가 펼쳐지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CJ ENM, NEW, 플러스엠 등 한국의 대형 투자배급사들은 부스를 꾸려 손님을 맞았고, KBS, MBC, JTBC 등 방송사들도 단골 참석자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상 테크놀로지 기업들도 만날 수 있었다. 아울러 ‘홍콩 뉴웨이브’라고 불릴 만큼 다양성이 커지고 있는 홍콩영화계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허안화 감독을 비롯한 홍콩 뉴웨이브의 첫 번째 물결이 ‘대만 뉴웨이브’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이 흐름이 향후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를 품게 될 것이다.
필마트가 열리는 기간에 어떤 영화들은 탄생을 준비한다. 아시아 각지에서 온 프로듀서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피칭해 제작비를 마련하는 홍콩-아시아필름 파이낸싱 포럼(The Hong Kong-Asia Film Financing Forum, HAF)을 통해서다. 한국영화 <도둑들>에서 금고털이 쥴리를 연기했던 말레이계 홍콩 배우 리신제가 프로듀서로 변신해 HAF에 참여했다. 프로듀서로서 그의 여정을 인터뷰로 담는다. 홍콩판 <82년생 김지영>이라 할 수 있는 <현대 모성에 관한 몽타주>의 올리버 시쿠엔 찬 감독과 담선언·로춘입 배우 인터뷰도 전한다. 한국영화보다 훨씬 건조하고 현실적인 이 영화는 지금의 ‘홍콩 뉴웨이브’에 속하는 작품으로, 기존 홍콩영화와 확연히 구별되는 정동을 품고 있어 소개하고 싶다. 예부터 홍콩영화가 새로워지면 아시아영화가 새로워졌다. 이는 동아시아영화에서 반복된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홍콩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닐까. ‘향기로운 항구’(香港) 홍콩, 아시아영화가 시작되는 곳으로.
아차, 선글라스 챙기는 걸 잊어버렸다. 홍콩의 햇살이 눈부실 텐데 어쩌나 싶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런 고민은 사라졌다. 홍콩의 하늘이 꽤 흐렸고 구름은 비까지 뿌렸기 때문이다. 출장 초반 사흘간은 분무기로 물 뿌리듯 가느다란 빗방울이 얼굴에 닿았다 그치길 반복했다. 챙겨온 반팔 티셔츠를 굳이 꺼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온도 낮았다. 홍콩에서 전세계에서 날아온 영화인들과 날씨에 관해 얘기할 기회가 많았는데 국적에 따라 다른 답이 들려왔다. 한국 사람들은 선선하다고 말했고, 홍콩인들은 춥게 느껴진다 했으며, 대만인들은 반팔도 끄떡없다고 했다. 3월 홍콩의 날씨를 받아들이는 감각은 다 다르지만 이들이 한꺼번에 이곳에 모인 이유가 있다. 바로 필마트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영화 테크놀로지가 필마트에 입성하다
3월17일부터 20일까지 나흘간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홍콩무역발전국(HKTDC)의 주최로 제29회 필마트가 열렸다. 땅을 매립한 완차이 해안가에 자리한 거대한 홍콩 컨벤션 센터는 홍콩이 1997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반환식이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다. 주룽반도에서 출발하는 페리를 타고 홍콩섬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장소가 이곳이며, 영화 팬들에겐 영화 <폴리스 스토리>에서 성룡이 뛰어다닌 로케이션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역사와 영화가 교차하는 장소에서 열리는 필마트에 34개 국가와 지역의 영상 업체들이 참여해 760여개 부스를 차리고 영화와 시리즈를 사고파는 비즈니스가 열렸다.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태국처럼 전통적으로 필마트를 지속적으로 찾은 나라들은 자국의 영화 제작사, 투자사, 방송사를 한자리에 모으기 위해 파빌리온을 차려 큰 블록을 형성했다. 베트남, 호주, 프랑스, 인도,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캄보디아처럼 올해 처음 파빌리온을 세운 나라들도 있다. 마치 영화의 세계지도와 같은 풍경이었다. 파빌리온과 파빌리온 사이로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체코 기업들이 처음으로 필마트에 입성했다. 올해 필마트를 찾은 산업 관계자들은 7600여명에 달한다.
패트릭 라우 HKTDC 수석부사장은 홍콩이 여러 국가를 잇는 회랑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홍콩은 엔터테인먼트 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 영화와 영상 산업은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야 하고 다른 분야와 협업해야 한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선 파트너들의 노력이 투입된다. 필마트에서 홍콩과 협업하는 건 물론이고, 홍콩이란 플랫폼을 활용하면 전세계 더 많은 국가와 협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홍콩은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중심지이며 국제적인 교역지다.” 그의 설명처럼 필마트는 많은 제작자들이 기획 중인 작품을 함께 제작할 파트너를 찾는 ‘만남의 장소’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영화와 시리즈의 경계가 무너지고 제작 방식도 거의 비슷해졌다. 그러다 보니 IP 수요도 높아졌다. 필마트에서 만나는 아시아 콘텐츠들은 정서적으로 통하는 지점이 많아 IP 교환에 용이하다.” 최정환 커버넌트 픽처스 대표는 “필마트는 이제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마켓”이라고 말한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프로듀서 네트워킹 프로그램 ‘KOPICK’ 프로듀서로 선발된 최 대표는 <사냥꾼 이야기>(가제)를 들고 홍콩을 찾았다.
주식회사 무암의 나한석 프로듀서 역시 “필마트에 오면 홍콩뿐 아니라 대만 등 다른 국가랑 연결지어서 합작할 기회가 많다”라고 말했다. 오컬트 시리즈 <여우 누이>(가제)와 BL 스릴러 중단편영화 <지금 소유되었습니다>(가제)와 함께 홍콩을 찾은 그는 홍콩 기업과 합작을 논의하던 중 이번에 필마트에서 다시 한번 미팅 약속을 잡았다고 귀띔했다. 많은 마켓을 두루 경험하고 KO-PICK 프로듀서로 선발된 그는 “필마트는 규모에 있어 유럽 마켓과 차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중년 남성이 이탈리아에 김밥 가게를 차린다는 내용의 힐링영화 <오늘의 김밥>(가제)과 한국 내 태국 이주노동자를 다루는 스릴러영화 <이상한 결혼>(가제)를 가지고 필마트를 찾은 박준호 아드레날린 픽쳐스 대표도 비슷한 의견이다. “필마트에 대만 제작자와 배급사, 태국 제작자와 배급사들이 다 온다. 다들 오는 곳이기에 무조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한국 프로듀서들은 필마트에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공통적으로 태국과 협업하길 기대했다. 모두 태국을 이야기해 놀란 것도 잠시, 태국의 우볼라타나 라자칸야 공주까지 필마트를 찾아 자국 영화와 시리즈 비즈니스에 힘을 보태는 걸 보고 태국 콘텐츠의 저력을 새삼 느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영화 테크놀로지 기업들이 다수 부스를 차렸다. AI 허브란 이름 아래 여러 AI 업체가 한곳에 모였는데, 홍콩의 메이아 엔터테인먼트의 AI 계열사인 IST도 AI 허브에 자리를 잡고 오우삼 감독의 마지막 홍콩 누아르 <첩혈속집> 속 주윤발의 총기 액션을 실시간으로 애니메이션화해 선보였다. “<첩혈속집>은 메이아 엔터테인먼트사의 라이브러리에 있는 작품이다. AI를 이용하여 배우의 얼굴을 바꾸는 건 물론 내용까지도 바꿀 수 있다. 원본을 바탕으로 여러 버전의 <첩혈속집>을 만들 수 있고 이 작품들은 모두 블록체인으로 묶인다. 한 작품이 수익을 내면 수익을 나누는데 원작이 가장 많은 수익을 가져가는 구조다.” 스티브 로 IST 전무는 눈앞에서 상영되는 이미지를 설명하며 AI, 블록체인까지 동원했다. 그만큼 영화와 새로운 기술들이 강하게 결합하고 있었다. 이번 필마트의 또 다른 이례적인 풍경은 대학이 부스를 차린 점인데, 이 또한 테크놀로지와 연결됐다. 홍콩침례대학교는 버추얼 프로덕션과 AI가 산업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소개하면서 엠퍼러 픽처스, 미디어 아시아처럼 전통적인 홍콩영화 강자들과 나란히 입구 앞자리에 자리를 틀었다.
거듭 경신하는 박스오피스와 ‘홍콩 뉴 웨이브’
영화의 기술 변화상까지 아우르는 필마트는 ‘AI란 기회를 준비하다’라는 주제로 콘퍼런스를 열기도 했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데이비드 카펜터 감독은 “AI가 워크플로를 완전히 바꿨다”면서 “프리프로덕션에서는 AI를 100% 이용한다. 포스트프로덕션에서는 영어를 스페인어로 바꾸거나 숏의 해상도를 높이는 등 목적에 맞게 쓴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AI가 과연 획기적으로 영화와 시리즈 제작비를 낮출 수 있을까. 데이비드 카펜터 감독은 AI가 “마법램프 속 지니 같다”며 제작비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입장이다. 다만 “창작자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번 되풀이해 작업하더라도 AI가 정확히 표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덧붙였다.
팬데믹이 끝난 2023년, 홍콩영화 <독설변호사>가 역대 홍콩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홍콩영화만의 힘을 증명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록이 깨졌다. 전통적인 극장 성수기도 아닌 11월에 개봉한 안젤름 찬 감독의 <라스트 댄스>가 2024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물론 역대 홍콩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이 작품은 딸이 상주가 될 수 없는 홍콩 전통으로 인해 장례식장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새로운 유형의 드라마 장르 영화로, 젊은 관객은 물론 극장을 잘 찾지 않는 시니어 관객까지 사로잡아 흥행에 성공했다.
이처럼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는 동안 홍콩식 액션, 코미디, 로맨스 영화의 인기는 저물고 있다. <독설변호사>를 연출하고 새로운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을 막 마치고 필마트를 찾은 오위륜 감독은 “지난해에 6편의 액션영화가 개봉했지만 홍금보, 고천락 주연의 <구룡성채: 무법지대>만 성공했다”고 말했다. <독설변호사>로 연출자로 데뷔하기 전 액션영화 시나리오를 써온 그는 “홍콩 박스오피스에서 액션, 코미디, 로맨스 장르는 통하지 않는다. 홍콩의 많은 작가와 감독들이 어떤 새로운 스토리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지 고민하지만 알 수 없다”라며 홍콩의 변화상을 들려줬다.
변화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전환기에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곤 한다. 올리버 시쿠엔 찬 감독은 “상업영화에는 가장 힘든 시기이지만 동시에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뉴 웨이브’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주제의 영화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도 새로운 흐름의 결과인데 “모성이나 젠더 이슈는 이전 홍콩 영화산업에서는 영화의 소재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현대 모성에 관한 몽타주>의 주연배우 담선언 역시 “홍콩영화의 제작 편수는 확실히 줄었고 누구도 현재 영화산업의 트렌드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서도 “어떤 영화가 흥행할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면서 다양한 주제의 영화를 시도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면을 짚어주었다. 오위륜 감독은 지난해 국내 개봉한 청소년의 우울에 관한 영화 <연소일기>를 포함해 요양원에서 일어난 학대 사건을 다룬 <인 브로드 데이라이트>를 새로운 유형의 홍콩영화들이라고 소개했다.
홍콩영화가 변하면 아시아영화가 변한다. 이번 필마트에서 목도한 변화가 향후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개한 작품들을 한국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홍콩의 새로운 영화들이 관객을 놀라게 하고 생각에 잠기게 하고 또 눈물짓게 할 수 있기를.
*이어지는 글에서 리신제 프로듀서와 영화 <현대 모성에 관한 몽타주>팀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