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났다. 극장 밖을 나섰으나 여전히 깜깜하다. 마지막 회차였으니 당연하겠지만 문득 밤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바야흐로 어두운 시간이 이어지는 중이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희미한 희망의 빛을 찾아 다시 깜깜한 극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나 역시 그런 부류 중 하나다. 초조한 마음으로 몇편의 영화를 연이어 봤고, 희미하게나마 깜박이는 불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혹자는 성냥팔이 소녀가 잠시 추위를 잊으려 켠 작은 성냥불이 한줌의 환상에 불과하다며 가여워하겠지만 나는 지금도 현실도피와는 다른, 어떤 결연한 선택이라 믿는다. 세상을 뒤집지 못하는 자에게도 꿈은 허락되는 법이고 소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다. 이 감각이 휘발되기 전에 몇 글자 남기고 싶어 서둘러 메모장, 아니 성냥불을 켠다.
첫 번째 성냥불, <아침바다 갈매기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을 수상하자마자 빠르게 개봉하여 더 반갑다. 어두운 이야기다. 활기를 잃은 어촌은 이미 생명력을 다했고 거대한 무덤 같은 곳에서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탈출한다. 밤바다의 어둠을 살라 먹는 새벽녘 선착장의 어스름 불빛을 닮은 이 영화는 무겁고 답답했지만 다 보고 나니 기이하게 따스하다. 어떻게든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기에 그런 걸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잖아요.” 이 한마디가 이상하게 그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된다. 끈덕지고 질긴 삶의 누추함을 마주하며 설사 나아지지 않을지라도 끝내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한다.
두 번째 성냥불, <글래디에이터 Ⅱ>. 극장이 현대판 콜로세움이란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영화였다. 충분히 재밌었지만 굳이 왜 속편을 만들었는지 묻고 싶어졌다. 24년 만에 돌아온 이유가 단지 성공 확률이 높은 속편이기 때문이라면 조금 서글프다. 무려 24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달라지고 나아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특히 그놈의 공화정 지상주의가 내내 거슬렸다. 솔직히 황제를 꿈꾼 마크리누스(덴절 워싱턴)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훨씬 입체적이고 매력적이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곧 미국 대통령에 취임할 트럼프의 내각 발표를 보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오직 충성심만 보신다는 트럼프 당선자께서 꾸리신 명단은 ‘수어사이드 스쿼드’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초현실적이다. 옆 나라 사정이라고 즐겜 모드로 관람하기엔 또 마냥 남 일이 아니다. 카리스마 황제의 독재보다 지지부진해 보일지라도 공화주의의 불씨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영화 바깥에서 발견한다.
마지막 성냥불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다. 41년 만에 국내 개봉하는 1983년도 영화는 걸작이 아니라서 더 사랑스럽다.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를, 그 시절 그 상황이기에 허락됐던 조악한 연기와 기이한 연출로 감상한다. 왠지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워지는 길티 플레저의 오묘함. 오시마 나기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항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연출자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하게 믿는 것 같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고 남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다름’을 포용하는 건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고, 관용은 인류가 발견한 최대의 미덕이다. 춥고 어두운 밤, 스크린에 켜진 작은 불빛들에 의지해 희망의 건너편을 응시한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