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영화에서도, 보고 싶다 - <씨네21> 기자들이 영상화를 꿈꾸는 한국 소설들
씨네21 취재팀 2024-10-31

조해진 <내일의 송이에게>(<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수록)

“학교는 달라도 어떻게든 연결하면 결국 연결되는 이들이 차가워진 몸으로, 때로는 툭 치면 깨어날 것 같은 온전한 모습으로, 또 어떤 때는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멍든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들이 있었다. 언제나 울 준비가 되어 있던 학교 아이들, 한명이 울기 시작하면 이내 여러 겹의 훌쩍임으로 출렁이던 교실.” 시간이 흘렀다. 송이는 그 배에 탄 친구를 잃었다. 슬픔에만 잠겨 있는 것은 아니다. 송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르게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송이에게 말을 걸어온다. 12년 만에 만나는 장훈이었다. 둘은 저소득층 아이들이 가는 사회복지관의 공부방에서 만났다. 한치 앞의 어둠을 간신히 헤쳐가며 살아가는 송이에게, 가족도 친구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송이에게, ‘내일’은 먼 나라의 말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에서 영향을 받은 이 소설이 영화가 된다면, 영화가 소설에 말을 걸고 그 소설이 또 다른 영화에 말을 거는 장면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에 나오는 “미친 여자가 아니에요, 슬픈 여자인 거예요”라는 대사를 연상시키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이어지는 결말을, 송이가 내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보고 싶다. /이다혜

한강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가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 하나는 알고 있다. 한강 작가는 전남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열다섯 소년 동호의 얼굴이 특정한 배우의 이목구비로 치환되는 일을 꺼렸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랫말처럼 읽히는 문체는 영화가 다가서면 우악스럽다고 뒷걸음질칠 것도 같다. 그래도 <소년이 온다>에는 미련이 남는다. 분명 작가 한강의 소생이되 큰 몫을 영혼들의 수런거림에 내어준 작품이라고 느껴서일까? 지금까지 1980년 광주를 다룬 영화들이 성의와 사명감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으로 경직돼 있었다는 아쉬움도 크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1980년 광주라는 ‘상처의 구조’ , 그 시간의 성질과 감각을 전하는 영화가 올 때도 됐다고 느낀다. 반드시 관습에 따르는 서사영화여야 할 필요도 없다. 소설 속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이탤릭체 문장들의 사무치는 울림은 사운드트랙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몽상을 접고, 유독 영화로 상상하게 되는 <소년이 온다>의 장면 하나를 고른다면, 생존한 시민군 화자가 회고하는 계엄군의 도청 진입 순간이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 /는 행갈이) 영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 어떤 행위가 아니라 어떤 행위의 부재라는 사건에 강하다. 인간다움을 부수고 짓밟으러 육박해오는 폭력 앞에서도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제지한 이상한 망설임 그리고 그 망설임들의 연결을 더듬는 영화가 보고 싶다. /김혜리

한강 <희랍어 시간>

어떤 소설은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머릿속에 세트가 지어지고 조명이 켜지며 등장인물이 나타나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희랍어 시간>이 그런 소설이었다. 정확히 짚자면 130쪽부터 135쪽까지, “뒤따라 올라가려고 남자가 걸음을 옮긴 순간 삐이삐이, 소리가 들린다”로 시작해서 “안경을 맞춰야 해요”로 마무리되는 ‘17 어둠’의 중반 이후 파트는 얼굴의 솜털과 손가락의 지문마저 보이는 듯한 세세한 묘사로 소설 속 바로 그 지점에 독자를 툭 떨어뜨린다. 위에서 언급한 “삐이삐이” 소리를 낸 정체는 새다. 새는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자가 일하는 건물의 계단에서 힘겹게 뛰어오르다가 그에게 발견된다. 남자는 그 새를 구하려다 안경이 떨어지고 마는 사고를 겪는다. 오후 8시15분경, 칠흑 속에서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더듬거리는 손과 그 손에서 흘러나오는 붉은색 피, 침묵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죽음 직전의 새가 퍼덕이는 소리 그리고 이 순간, 유일한 구원자일 말을 잃어가는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의 마음까지.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이 생생한 시간을 (어차피 상상이니) 예민한 시네아스트 고 테런스 데이비스 감독에게 맡겨보고 싶다. /이유채

김사과 <풀이 눕는다>

불온한 청춘의 영화가 있다. 부조리한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우울한 청춘의 비극을 그린 영화다. 이와이 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이 그 리스트에 있다.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를 거기에다 살포시 더하고 싶다. 이 소설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무명 소설가 ‘나’와 무명 화가 풀의 멜로드라마다. 서로를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는 둘은 무작정 동거를 시작한다. 가난과 우울, 불투명한 미래가 그들을 괴롭혀도 둘은 사랑의 힘으로 버티려 한다. 예정된 파국을 외면한 채로.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레토>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어울릴 듯하다. 제4의 벽을 오가는 실험적인 연출과 격정적 감정, 저항정신이 김사과의 사이키델릭한 문체와 부합한다. 영화로 보고 싶은 장면은 두 연인이 한여름에 중고 고무 대야에서 어린애처럼 물장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라이언 맥긴리 사진의 감성을 담은 <레토>의 바닷가 신처럼 찍히길 바란다. 욕조에 물비늘이 번쩍거리는 가운데 이들의 들뜬 표정과 나체가 롱테이크로 포착되어야 한다. 차세대 청춘 아이콘이 되고 싶은 감독에게 영화화를 권한다. /김경수 객원기자

정영수 <기적의 시대>(<내일의 연인들> 수록)

오랜 취향의 시초에 옛 여자 친구들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할 때마다 되새긴다. 어떤 기호(嗜好)는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걸. 정영수의 소설은 끝나고 나면 전과 다를 바 없이 답습했던 연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위성에 매번 다르게 남긴 크레이터를 매만진다. 그의 여러 연애소설 중 단편 <기적의 시대>는 아내 은주와 지난 연애사에 관해 거리낌 없는 수다를 떠는 ‘나’가, 친구인 성준 부부와 떠난 동반 여행에서 이전까지 한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고등학생 시절의 사랑 연희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역전적 시간 구도가 비추는 시간은 세기말. 끝내 미수에 그친 ‘나’와 연희의 섬싱은 <비포> 시리즈처럼 끝없는 대화로 채워져 있다. 20세기 소년 소녀의 향수로 가득한 소설 속 1990년대는 그 시절을 살아본 적 없는 관객들조차 반기는, 불굴의 노스탤지어다. 반면 현재 시점의 부부 동반 여행에서 끝없이 과거를 떠올리는 ‘나’와 그를 바라보는 은주, 과거에도 ‘나’와 한 차례 사각 관계를 형성한 바 있는 친구 성준과 그의 아내는 호텔이란 은밀한 공간에서 숨죽인 채 맞붙는 격렬한 정사각형을 만들기 더없이 좋다. 한국이라면 장승조와 손상연이, 미국이라면 제시 아이젠버그와 핀 울프하드가 ‘나’의 1인2역에 적역이다. /정재현

김중혁 <딜리터>

언젠가부터 만화나 웹툰이 영화의 원천 콘텐츠 1순위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이야기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 1권의 소설에 응축된 조밀한 서사적 매력을 완전히 외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김중혁 작가의 <딜리터>는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길고 깊이 있는 호흡으로 구현한 소설이다. <딜리터>의 세계는 여러 겹의 레이어로 이뤄져 있다. 존재를 다른 차원으로 보낼 수 있는 ‘딜리터’들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이들의 의뢰를 받아 의뢰인들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걸 돕는다. 이때 딜리터들이 대가로 받는 것은 의뢰인들의 이야기다. 딜리터들은 세상에서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로 소설을 쓴다. 포토숍의 레이어 작업과 다차원 공간이란 개념, 소설가의 업을 연결시킨 아이디어 자체가 소설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김중혁 작가를 닮았다. 때론 창작이란 고된 작업은 초능력이 필요로 할 만큼 고되고 무거운가 보다. 뭔가를 지우고, 이동시키고,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 ‘딜리팅’은 소설쓰기의 (거의) 직유적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문학 작가가 쓴 장르소설인 <딜리터>는 속도감은 물론 영화에 조예가 깊은 작가답게 이미지적인 상상력도 남다른데, 덕분에 <딜리터>가 영상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몇몇 장면은 거의 콘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한 사람이 가지는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야기의 스펙트럼은 무한하다. 동시에 유일무이하다. 우리가 이야기를 쓰고, 읽고, 나누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 다중우주가 판을 치고 오용되는 중인 영화계에서 이야기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는 <딜리터>의 상상력은 그래서 귀하다. /송경원

권여선 <전갱이의 맛>(<아직 멀었다는 말> 수록)

대화의 영화들에서 말들은 한동안 의미 없이 부유한다. 당장 눈앞을 사로잡는 이미지의 감흥은 유보한 채로 우리는 그저 말들을 표표히 따라가야 한다. 이때 영화가 요청하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가벼운 말들이 쌓이고 쌓여 문득 드러나는 어떤 본연을 위한 기다림. 권여선의 두 단편소설 <사랑을 믿다>와 <전갱이의 맛>을 나란히 붙여놓고 영화로 보고 싶은 건 그래서다. 소설에 박힌 말 하나하나의 효력을 영화가 따라잡지는 못할 테지만, 대신 스크린 안 생물들이 발굴해낼 찰나의 표정과 제스처가 있으니 흥미로운 변주곡을 상상해보게 된다. <사랑을 믿다>의 한쌍은 좁은 열차칸 같은 술집에서 안동소주와 기막힌 안주들을 먹으면서, <전갱이의 맛>의 한쌍은 지하 푸드코트에 숨겨진 비장의 메뉴인 ‘아지’(전갱이) 구이의 살을 바르면서 짐짓 퉁명스러우나 사이사이 심오한 말들을 주고받는다. 한쪽은 마음이 엇갈린 젊은 남녀이고 한쪽은 이혼 후 몇년 만에 재회한 중년들이다. 범상하다 못해 누추한 장소에서 나선형을 그리던 대화는 내면의 틈새로 파고들어가, 어느 점집을 잘못 찾아들어간 일화부터 지금 막 창밖을 지나가는 행인의 찬란한 일면을 알아보는 순간까지 아우른다. “그땐 몰랐지만 그게 진짜, 우리가 나눈 진짜 첫 대화였다는 걸 이제는 안다.”(<전갱이의 맛>) 슬프게도 권여선 소설의 주체는 회상하는 자들이다. 사실 대화는 과거에 진즉 잦아들었다. 주인공은 홀로 남아서 두 사람이 한때 공명했다는 진실을 더듬게 될 뿐이다. 뒤늦게 어떤 미망(迷妄)에서 깨어나 탄식하는 사람. 자신이 놓쳐버린 것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의 자태를 가차 없이 남겨두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스크린에서도 기꺼이 보고 싶다. /김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