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여름은 내가 가장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밑단이 신발을 덮는 커다란 힙합바지를 사야 했다. 그 바지는 가을 학예회 때 H.O.T.의 <열맞춰!> 무대에 오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 동성로에는 ‘소금창고’라는 대형 보세 옷가게가 있었는데, 입구부터 매장 안까지 4m 정도 되는 긴 진열대에 모두 그 바지가 걸려 있었다. 수개월간 모은 용돈을 들고 가 오래전부터 찍어둔 바지(다리 라인을 따라 얇은 흰 줄이 선명하게 박힌)의 값을 치를 때, 나는 그 분위기와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핑클과 S.E.S.의 무대를 하는 친구들은 주로 무용실을 빌리거나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연습했지만, H.O.T.나 젝스키스 무대를 선택한 아이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모두 소각장과 옥상으로 향했다. 나는 우리 학년에서 가장 춤을 잘추는 ‘춤신춤왕’의 ‘멤버 충원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새로 산 바지를 입고 노점에서 산 은색 링 ‘귀찌’를 끼고 옥상으로 향했다. 오디션에 참석한 아이들은 총 네명으로 모두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동그란 붐 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연습곡 <We are the future>에 맞춰 태어나 처음 몸을 흔드는 사람처럼 막춤을 췄다.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이 흐물대는 서로를 의식할 때마다 수치심이 온몸을 지배했다. 결국 넷 다 자신의 몸을 단 한순간도 통제하지 못한 채 음악이 끝났고 옥상에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기존 댄스동아리 멤버는 세명. 그중 한명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취권이야? 전부 왜 이렇게 비틀거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있던 ‘춤신춤왕’이 카리스마 있게 앞으로 나왔다. “그건 아냐.” 그래! 역시 고수는 남의 실력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아! 혼자 속으로 감탄하며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려던 찰나, 한 발짝 더 내디딘 ‘춤신춤왕’이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니들 춤은 H.O.T.에 대한 모욕이야.”
‘춤신춤왕’은 학교의 아이돌이었다. 나는 오르지 못한 가을 학예회의 3인조 <열맞춰!> 무대에서 그는 문희준과 장우혁 역할을 동시에 맡았다. ‘춤신춤왕’이 “모두 똑같은 크기의 젓가락 행진일 뿐이야!”를 외치자 강당이 흔들렸다. 몇몇은 오직 ‘춤신춤왕’만을 위한 플래카드를 손수 제작해 흔들기도 했고, 일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름을 연호하다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하마터면 저런 분의 무대를 망칠 뻔했어.’ 멋있었다. 오디션에서 탈락했다는 좌절과 원망이 안도감으로 빠르게 바뀔 만큼. 이듬해 ‘춤신춤왕’과 나는 같은 중학교로 진학했다. 진정한 스타는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춤신춤왕’은 모든 여학생의 주목을 받으며 입학했고, 이미 그 학교에서 ‘아이돌’ 지위를 갖고 있던 선배의 눈에 들어 그곳 댄스동아리에도 일찌감치 캐스팅됐다.
반마다 그를 동경하는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춤신춤왕’을 따라 ‘칼머리’를 하고 바지 교복을 입었다. ‘춤신춤왕이 속한 H.O.T. 코스팀의 공연을 보기 위해 주말에 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전시장에 가기도 했다. ‘춤신춤왕’의 인기가 커질수록 ‘칼머리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가십도 불어났다. ‘춤신춤왕이 같은 코스팀 토니랑 사귄대’, ‘춤신춤왕이 3학년 얼짱 선배랑 사귄대’ , ‘저녁 8시 2.28 공원 화장실에 가면 여자들끼리 키스를 한대’, ‘누가 거기서 ‘춤신춤왕’을 봤다던데?’ 속삭임은 일파만파. 그러나 소문 속에서 ‘춤신춤왕’의 입지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의 영향으로 일부 ‘칼머리들’은 ‘팬픽이반’이 되어 학교에서 작은 스캔들을 일으켰고, 또 다른 ‘칼머리들’은 ‘춤신춤왕’을 질투하며 위상을 빼앗기 위해 본인만의 기반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늘 새하얀 칼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해병대 출신 학생주임(학주) 선생님의 눈에 포착됐다. “이 머리 이거, 내가 뭔지 알아! 느그 선배들이 맨날 하던 거야!” 학주는 ‘왜’인지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 언제 어디서나 칼머리를 한 아이들을 보면 굵은 매로 등을 찌른 뒤 “머리 단정하게 안 잘라? 몇 학년 몇반이야!” 하고 윽박질렀다. ‘칼머리’ 스타일의 근원지였던 댄스동아리의 담당 교사도 학주로 교체됐다. 매일 학주에게 시달리다 결국 앞머리의 칼날을 강제로 잘린 댄스동아리 애들은 복도에서, 교실에서 울었다. 그 속엔 학교의 아이돌이었던 ‘춤신춤왕’도 속해 있었다. 모든 여학생의 표정도 그를 따라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커다란 설움을 구제할 방도가 없었다. ‘학생 인권 조례’ 같은 것이 거론된 적도, 거론될 일도 없는 지역의 학교에선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10대들에게 막대한 문화적 영향을 미치는 아이돌이라는 존재로서 H.O.T.는 서태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H.O.T.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10대 여학생들에게는 ‘종교’였다. ‘탈덕’과 ‘보이콧’을 쉴 새 없이 말하는 현재의 소비자 중심 팬덤 문화와 달리 당시 10대 여성들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은 ‘소비’가 아닌 절대적 ‘추앙’에 가까웠다. 컴백을 할 때마다 거창해지던 리더 문희준의 ‘비주얼록’ 스타일과 어딘가 고독해 보이는 과묵한 댄서 장우혁의 묵직한 존재감은 추앙의 타당성을 부여했다. 그 과정에서 작곡가 유영진의 역할 역시 막대했다.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 저항하는 노랫말, 기성세대를 응징하는 듯한 무겁고 웅장한 멜로디. ‘SMP’(SM Music Performance)로 알려진 그만의 작법은 그 시절 H.O.T.의 <전사의 후예> <열맞춰!> <아이야!>를 통해 확립을 마쳤고, 자신의 장기였던 R&B 발라드에 팬들을 위한 가사를 담아 만든 곡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맹세> <너와 나> 등은 H.O.T.의 이른 해체를 반대했던 ‘클럽 H.O.T.’만의 투쟁가로 사용되기도 했다. H.O.T.는 10대들에게 10대 소녀들에게 달콤한 환상을 심어주거나(1집 <캔디>),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기도 했지만(3집 <빛>) 그들 디스코그래피를 채우는 대부분은 억압으로부터의 저항이었다. 팬들이 그들을 추앙하는 방식 중 하나는 ‘모방’이었다. H.O.T. 팬들은 ‘코스튬플레이(팬코스)’, ‘모방그룹’, ‘팬픽이반’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당시의 SNS였던 ‘세이클럽’에서는 매일 밤 H.O.T. 멤버의 이름 앞에 ‘적혈’, ‘풍월’과 같은 동양 무협풍의 단어를 붙인 역할극이 벌어졌고, H.O.T.를 모방하는 ‘코스팸(family)’ 모집 명함과 전단지는 콘서트장에서부터 학교까지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들의 노래엔 지금의 K팝처럼 노골적인 ‘퀴어 코드’가 없었지만, 당시 10대 여성 청소년과 퀴어들은 세상과 반목하며 절규하는 그들의 모습에 자신들을 투영해 정체성을 만들고 확인하며, H.O.T.가 마련한 그 감정의 지대 안에서 자신들의 기댈 곳을 찾곤 했다.
이것은 과연 ‘흑역사’일까? 되짚는 것만으로 그때의 미숙한 마음과 불안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H.O.T.라는 표상 안에서 함께 공존했던 이들과 나눈 저항심과 우리가 속삭였던 비밀들에 더욱 애착이 간다. ‘아이돌’은 어른들이 아이들로 만든 아이들의 문화산업이다. 그 시절 H.O.T. 역시 다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분명 우리만의 이야기를 읽고 만들었다. 아이돌 산업에 대해 논할 때 심각한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그것을 향유하는 지금의 10대들 역시 그때의 나처럼 자신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H.O.T.의 뜻은 ‘High five of Teenager’(10대들의 하이파이브)다. 종종 비문이라 지적을 받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남긴 <열맞춰!>의 가사가 영원히 전해져 10대들의 가슴에 남기를 원한다. ‘절망과 한숨밖에 내 가슴속에 남는 건 없었지, 오직 이 땅에 내가 살아 남과 다른 날 찾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