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동조자>를 쓴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는 1975년 전쟁 난민으로 미국에 오게 됐다. 미국 대중문화에 열광하고 자신이 미국인이라고 정체화했던 그는 11살 때 <지옥의 묵시록>을 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군에 이입했던 그는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비무장 베트남인이 미군에 학살당하는 장면에서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소설과 영화의 화자로서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나라다. 때문에 베트남전은 공산주의국가 북베트남이 승리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의 시점에서 서술된, 이를테면 <풀 메탈 자켓> <플래툰> <디어 헌터>의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다.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동조자>는 베트남과 프랑스 혼혈이자 이중간첩인 캡틴의 양가적인 시점에서 베트남전을 서술한다. 주인공의 분열적인 자기 회고가 그간 일방적으로 쏠렸던 시점의 편향을 되돌아보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동조자>가 한국인 박찬욱 감독의 연출로 미국 <HBO>에서 드라마화되는 것이 의미심장한 건 그래서다. 더불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미나리> <성난 사람들> <패스트 라이브즈> 등을 제작한 A24가 참여해 아시안계 미국인의 정체성이 전면에 드러난 근래 작품 계보를 새롭게 이어간다. 베트남과 한국, 미국, 캐나다, 브라질, 영국의 창작자가 모인 프로덕션은 원작이 지향했던 국제성의 조건을 충족함과 동시에 주인공 캡틴(호아 쉬안더)의 내면을 닮은 불균질과 충돌을 에피소드마다 내보인다. 요컨대 <동조자>는 절반 이상이 베트남어 대사로 진행되지만 미국의 록과 솔, 코카콜라의 인용을 누구보다 즐기는 시리즈다.
혼란과 긴장을 야기하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밀정.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모든 일의 양면을 보는 저주를 받았죠.”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인공, 캡틴(이름이 불리지 않는다)은 베트남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자,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미국 대중문화를 탐닉한 공산주의자다. 베트남 재교육 캠프에 수감돼 공산당으로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그의 기억은 1975년 겨울, 사이공 함락 4개월 전이다. 캡틴은 CIA 요원 클로드(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남베트남 장군(토안 르)을 위한 비밀경찰로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클로드에게 미국의 대중문화를, 장군에게 남베트남의 방식을 배웠다고 고백하는 캡틴은 사실 북베트남 공산당에서 파견한 스파이다. 미국에서 남베트남인과 미국인들의 행적을 감시하며 공산당에 필요한 정보를 비밀리에 보고하며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다양한 인간상을 만난다. 캡틴이 새로 일을 시작한 대학교에서 만난 동양학 교수(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우생학 지지와 아시아인 페티시즘을 숨기지 않고, 그와 뜨거운 관계가 되는 일본계 미국인 비서 모리(샌드라 오)는 미국인으로 정체화됐던 자신의 자아를 되돌아본다. <동조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그가 베트남전을 다룬 할리우드영화 <더 햄릿>의 자문으로 촬영현장에 함께하는 대목이다. 전쟁의 공포나 허무주의를 묘사하는 데만 매몰돼 정작 베트남인 배우들에게는 아예 대사가 주어지지 않는 편협한 연출을 지적하지만 그의 의견은 좀처럼 수렴되지 않는다.
원작을 충실하게 시리즈화한 <동조자>의 내러티브는 때때로 괴팍하고 이상하다. 캡틴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과 그의 100% 신뢰할 수 없는 기억, 뚜렷한 기준 없이 배회하는 타임라인은 적당한 혼란과 긴장을 야기한다. 심지어 자신의 자백 중 일부는 직접 보지 않은 일이라고 사후 고백하기도 하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호하게 처리하는 대목도 있다. 그리고 그를 심문하는 이들은 자술서가 ‘클리프행어’를 심는다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연출적으로는 쾌락과 죽음, 미국과 베트남의 이미지를 겹치는 매치컷이 캡틴의 무질서한 고백을 경유해 교차하는 타임라인을 흥미롭게 배치한다.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베트남전을 포함한 역사를 재현했던 방식을 반추하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명료하고 확정적일 수 없다. 오히려 모순과 혼란을 끌어안는 쪽이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베트남전 이후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 스릴러, 자기모순을 숨기지 않는 피카레스크, 변칙적으로 심어진 블랙코미디는 박찬욱 감독이 수십년 동안 해왔고 가장 잘 다루는 혼종의 장르다. 양쪽에 걸쳐 있는 정체성과 혼란, 충돌과 같은 테마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혼혈아 소피(이영애), 스파이의 정체성 혼란을 다룬 <리틀 드러머 걸>, 중국인이지만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에게서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동조자>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은, 단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다. 그는 오렌지 카운티 하원의원, CIA 요원, 할리우드 영화감독 등 미국 기득권층 일부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을 연기한다. <닥터스트레인지 러브>의 흥미로운 인용인 ‘로다주’의 ‘연기 차력 쇼’는 미국의 정치부터 학계까지 미국 식민주의와 권력이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며 하나로 겹쳐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가능한 한 많은 출연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그의 스타 파워를 최대치로 활용할 수 있는 장치면서 그동안 할리우드가 아시안 캐릭터를 협소하게 그려온 관습(예컨대 일본과 한국, 중국을 모두 하나의 국가처럼 뭉뚱그린다거나 아시안 캐릭터 한명이 모두를 대표할 수 있다고 손쉽게 오해한다거나 하는 일들)을 날카롭게 전복한다.
비주류의 기억을 한복판에 두고
<동조자> 1회에 나오는 “모든 전쟁은 두번 벌어진다. 첫 번째는 전장에서, 두 번째는 기억 속에서”라는 문구는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의 또 다른 저서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베트남 그리고 전쟁의 기억>(Nothing Ever Dies: Vietnam and the Memory of War)에서 발췌한 것이다. 다시 말해 베트남전은 공산당이 승리했지만 전세계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미국에 주도권을 빼앗긴 역사다. 그리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진보와 보수의 이념 충돌 속에서, 베트남전쟁의 유령들이 기억되는 형태가 만든 이데올로기 및 계급구조 속에서 베트남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동조자>를 위시한 제3세계 혹은 비주류의 스토리텔러와 예술가들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다. 물론 <동조자>의 텍스트가 (최근 인종차별 논란으로 구설에 오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제작자로 합류한 <HBO>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각자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분명 이 시리즈는 TV에서 거의 조명하지 않았던 베트남전에 관한 관점과 스파이의 초상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