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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담요 아래의 여자, 역사를 쓰다’, <플라워 킬링 문> 배우 릴리 글래드스턴
김소미 2024-03-08

18살의 릴리 글래드스턴이 고등학교 드라마반에서 ‘오스카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배우’로 뽑힌 약 20년 전의 사진이 뒤늦게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교 동창들이 펼친 추억의 앨범은 3월10일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 예언적 위상을 실현할지도 모르는 기대감으로 빛난다. 블랙피트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라난 릴리 글래드스턴이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는 최초로(그러니까 너무나 뒤늦게도)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백인들의 탐욕적 공작에 가족을 잃고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오세이지족 여성으로 분한 릴리 글래드스턴은, 골든글로브와 미국배우조합상을 거머쥐면서 아메리카 원주민 재현의 대표성을 논할 때면 언제나 첫줄에 거론될 표본으로 이미 자리 잡았다. <플라워 킬링 문>의 캐스팅 제안을 받기 직전까지 새 진로를 모색할 정도로 낙담했던 1986년생 몬태나주 출신의 배우는 요즘 할리우드의 역사를 새로 쓰느라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홍보 일정 중 잠깐 뉴욕에 들른 릴리 글래드스턴과 화상으로 만났다. 몬태나대학교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연구를 공부하기도 한 그는 영화의 개봉 당시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만, 그리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보라”고 당부했었다. 다시금 그 이유를 물었다. “<플라워 킬링 문>은 1920년대에 자주 실종되고 살해된 원주민 여성들을 다루는 영화다. 세대의 슬픔을 조용히 묻어두기만 하면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건설적인 시도다. 하지만 원주민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다. 나는 노년의 오세이지족 여성이 영화를 보다가 탈수증상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몹시 가슴이 아팠다. 시사회를 좀더 일찍부터 가질 수 있었더라면, 원주민들과 미리 영화에 관해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희망은 그랬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릴리 글래드스턴은 그가 종종 수줍은 미소를 지을 때조차 위엄을 드러낸다. 담요가 그를 ”언제나 굳건한 조각상처럼 서 있게” 만들어줬다. 원작자 데이비드 그랜이 소설에서부터 묘사한 대로 “다른 자매들이 현대성을 받아들였다면 몰리는 그보다 전통적인 복장을 고수하고 가족 중심적인 인물”이기에 글래드스턴은 “옷이 몸에 주는 영향을 더욱 민감하게 관찰하고 받아들였다”. 망토처럼 두른 담요, 폭이 넓고 긴 치마, 가슴과 목의 장신구를 처음 제대로 갖춰 입은 날에 그는 꼿꼿하게 서서 의상감독 재클린 웨스트에게 이렇게 외쳤다. “어째서 오세이지족이 마리아 톨치프를 배출했는지 이제야 몸소 알겠네요!” 실존 인물인 톨치프는 극 중 몰리의 고향인 페어팩스 출신의 오세이지족으로, 미국 최초의 메이저 프리마 발레리나다. 비록 스코세이지의 카메라가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촉각을 연기의 주효한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이 배우는 몰리가 선택하는 신발의 종류로부터 인물과 장소가 맺는 감정적 관계를 구축해나가기도 했다. “몰리 세대의 원주민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발바닥에 닿는 모카신의 감촉을 그리워한다. 모카신 위에서는 아래쪽 바닥이 얼마나 딱딱하든 부드럽든 간에 자신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한층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다.” 백인 후견인의 사무소로 외출할 때나 어네스트의 인도를 받아 병원을 드나들 때, 몰리는 딱딱하고 높은 굽을 지닌 웨스턴 부츠를 신는다.

촬영장의 몰리는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취약한 존재일 때도 있었다. “몰리가 의심과 걱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몇 가지 촬영했다. 우리는 현장에서 몰리의 여러 가지 버전을 시도했지만 핵심은 어떤 해석이든 지나치게 표현하지 않는 거였다.” 글래드스턴은 당뇨병을 앓는 당대의 오세이지족 여성들이 “비소, 모르핀, 인슐린 칵테일에 장기간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한 세기 이후에나 제대로 밝혀진 사실”을 염두에 뒀다. “몰리가 어네스트를 얼마나 믿거나 믿지 않는지 관객에게 너무 많이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 부작용을 겪으면서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만큼은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다. 나쁜 사랑, 건강하지 않은 부부관계에 중독된 증상도 마찬가지니까.” <플라워 킬링 문>을 몰리의 이야기로 좁힌다면, 이것은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 석유, 백인 남편, 모르핀, 베이컨으로 표상되는 미국의 갖가지 독성에 휘말렸다 풀려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배우와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은 영화 말미의 접견 장면에 담긴 진의였다. 아내는 자신에게 진정제를 투여한 남편에게 참회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대답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뉘우쳤다면 무언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은 많은 관객들이 받아들인 뉘앙스와는 조금 달랐다. 그건 애초에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화해시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품고 있지 않은 질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몰리의 질문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기로 선택한 어네스트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그저 마지막 기회다.” 배우는 이 단호한 해석 뒤편에 종전과는 조금 다른 미묘한 어조로 덧붙였다. “영화 마지막장에서 몰리에게 너무 많은 위협과 긴장이 한꺼번에 발생하기 때문에 더이상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을 보호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몰리는… 리타의 집이 폭파된 시점까지도 어네스트를 사랑했다. 자신의 남편이 그 폭탄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켈리 라이카트의 <어떤 여자들>을 대표작으로 독립영화의 신성처럼 여겨졌던 릴리 글래드스턴은 이제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의 주연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궤도에 진입했다. 시상식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머무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길어졌지만 그의 특출난 존재감, 담대한 눈빛, 공동체의식은 여전히 몬태나의 들판으로부터 수혈된다. “나는 내가 속한 가족과 장소를 늘 기억하려는 사람이다. 그곳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한 다음 이 세상에 헌신하는 유목민이 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이 스크린 속 배우를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각자의 인간성이라고 믿는다. 내 인간성은 분명히 나의 뿌리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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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Apple 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