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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마지막 날 진짜 21세기를 앞두고 송구영신, 경건한 마음으로 제야의 종소리나 들을까 해서 조신하게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아직 10여분 남았기에 소파에 누웠다가 거실도 춥고 해서 침대 패드를 끌어다 덮었다. 거기까지 기억나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5시였다. 상상해보라. 나름대로 새해엔 각오도 새롭게 하고 거듭 참사람으로(?) 태어나고자 결의도 다져보려고 했는데 결의와 각오는커녕 잠이 덜 깬 후줄그레한 몰골과 어깨쪽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한바탕 재채기로 나의 21세기는 시작되었다.새해 벽두부터 희망찬 얘기는 고사하고 이렇게 궁상맞은 얘기로 시작해야 하는 내 마음도 아프기 그지없지만 남자가 혼자서 나이먹어가는 풍경이 그렇게 썩 아름답지 않다는 걸 밝혀둔다. 그 당시 심정이 어떠했냐면 고등학교 때 모처럼 맞는 일요일, 한번 마음잡고 놀아보려고 부푼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을 청했다가 거의 해가 저물 때쯤 일어났을 때의 그런 막막한 기분과 똑같았다. 게다가 집에 식
나이, 이제야 실감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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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니 다들 ‘신년계획’을 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담배를 끊겠다’, ‘운동을 하겠다’는 작심삼일형 계획부터 ‘올해에는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계획을 세우는 모습이다. 별다른 계획이 없는 나 같은 사람마저도 스포츠신문에 나온 ‘올해의 별자리 운세’를 열심히 읽어대고 있으니 때는 때인 모양이다.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는 자리나 시무식 같은 자리에 가도 ‘올해 계획이 뭐냐’는 질문을 서로 주고받는다. 신통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다들 건강에 신경써야겠다느니, 가족을 돌봐야겠다느니 등등 평소의 언행에 비춰보아 한입으로 두말 하는 것이 분명한 말들을 건넨다.그렇지만 계획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실천은커녕 1년 전에 계획을 세웠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고, 그걸 들춰내는 일이 쑥스러울 뿐이다. 1년이라는 시간은 후닥닥 지나가버렸어도 1년 전이라는 시점은 아스라한 옛날 같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에 집착하는
신년 무계획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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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스피러시Conspiracy Theory 1997년,감독 리처드 도너 출연 멜 깁슨, 줄리아 로버츠1월26일(금) 밤 10시55분1980년 12월8일, 어디로부턴가 “해치워, 해치우란 말이야!”라는 소리를 들은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존 레넌을 쏘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J.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후에 채프먼은 사람들로 하여금 샐린저의 책을 읽게 하려고 그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사람들에게 레넌의 피살은 조직적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식의, 상상력 풍부한 어떤 시나리오를 제공해주었다. 이에 따르면, 채프먼은 정보기관으로부터 암살요원으로 길러졌는데, 그때 샐린저의 책은 마인드 컨트롤을 위한 재료로 쓰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가설은 아직 그 신빙성이 증명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그 진위야 어쨌든 이 가설이 적어도 한편의 영화, 즉 리처드 도너의 <컨스피러시>에 기본적인 착상을 제공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
누군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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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메>가 드디어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물론 같은 소재의 영화 <싸이렌>에 비해 대여가 잘된다. 며칠 전 있었던 ‘불에 관한 영화 같은’ 그것도 ‘코미디영화’ 같은 에피소드 하나 이야기할까 한다.아르바이트 동식이가 근무하던 오전, 소방복을 입은 남자가 “소방서에서 나왔습니다” 하며 대여점 구석구석을 둘러보더니, 소방 점검서까지 작성을 하며, “소화기 구비가 안 되어 있군요. 소화기가 없으면, 바로 단속이 나와 벌금을 물게 되니, 이번 기회에 하나 구입하시죠, 제가 싸게 추천하겠습니다.” 동식이는 그에게 3만원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내가 근무하는 오후에 다시 와서는 소화기를 주고 3만원을 다시 받아갔다. 두번이나 돈을 받아간 사실을 알아챈 뒤 그제야 ‘이거 뭔가 이상하다’는 감을 잡고, 종로 소방서에 확인전화를 해보니, 오히려 “그 사람 잡으면, 우리한테 연락 좀 하라”는 것이었다.동식이나 나나 평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동네 구석
그 남자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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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할리우드에 마약을 둘러싼 두 가지 작은 소란이 일었다. 첫 번째 소동의 불씨는, 워너브러더스가 1억1천만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하는 가족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촬영현장에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주사기. 영국 런던 교외 와트포드의 리베스덴 스튜디오에서 발견된 이 주사기는 지난해 12월 말 두 남자가 11월 개봉 예정인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 공사중인 세트에서 마약을 한다는 익명의 제보가 경찰에 접수된 직후 발견됐다. 영국의 <선>에 따르면 마약 복용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기가 발견된 뒤 스튜디오 현장은 엄격한 보안 단속이 내려졌다고. 워너브러더스의 대변인은 이 일을 “매우 심각한 사건”이라고 논평했으나 “실제 마약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영화와의 직접적 연관도 밝혀진 바 없다”고 덧붙이며 이번 불상사가 영화 제작진과는 무관함을 강조했다.또다른 ‘마약 관련’(?) 스캔들 주인공은 거물 마약 딜러가 친딸이 마약에 중독된 사실을 알게 되는 줄거리를 지닌
마약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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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 감독의 부인인 도나타 벤더스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스크린 안팎의 풍경을 촬영한 사진 47점의 전시회가 영화의 한국 개봉과 씨네큐브 광화문 개관을 기념하는 취지로 1월17일부터 2월28일까지 씨네큐브 광화문의 메인 로비에서 열린다.
영화보다 먼저 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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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스포팅>으로 상종가를 치던 시절, 대니 보일은 켄 로치의 시대는 갔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대처 시절, 영국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해온 그 감독에겐 자기들을 설득하거나, 사로잡을 어휘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대니 보일에게서 형식주의자, 스타일만 번쩍거리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한 나라안에서도 지역차이를 고스란히 빈부격차로 떠안은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의 끝모를 방황과 추락을 재현하는 그 영화에 매력을 느낀 축에 들었다. 어디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따위의 낙서, 뜻없는 질주에서도 쾌락을 낚지 못한 채 황량한 하늘을 이고 이곳은 스코틀랜드(어쩔 수 없는, 저주받은 땅)라던 이들의 자조에 가끔씩 감전되곤 했다. 켄 로치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저 사람이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할리우드로 이적한 뒤, 완전히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처를 배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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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해동안 씨네21이 발로 뛰어 다닌 비디오숍이 꽤 된다. 골목의 비디오숍이 사라져 다리품을 곱절로 팔아도 입맛에 맞는 비디오를 만나기 힘들 때, `씨네21 선정 우수비디오숍'이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수비디오숍 콘테스트에 참여할 기회를 놓친 `우리 동네 비디오숍'도 적지는 않을 터. 숍 실사과정에서 익힌 좋은 비디오숍을 찾는 몇가지 요령을 소개한다.
하나. 보유편수, 진열장을 세어보라.
대개의 비디오숍은 2중장을 쓴다. 안쪽 붙박이는 24편씩 9층, 바깥쪽 슬라이딩 장은 18개씩 8층이다. 편의상 안쪽 붙박이장 하나에 220편, 바깥쪽 슬라이딩 장 하나에 150편으로 보고 진열장 수를 세면 벽면에 진열된 편수를 감잡을 수 있다. 숍 중앙에도 진열장이 있다. 대개 앞뒷면에 24개씩 5층이므로 240편이 된다. 이런 진열장이 몇개인지 세어본 뒤 합산한다. 지역차가 있으나 총 1만장 정도면 상위권에 든다.
둘. 다양성, 특선 코너를 보라.
특선을 정의하기는 어렵
200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5] -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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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자전, 대를 잇는 비디오 사랑
우수 비디오숍 ...경기도 성남시 으뜸과 버금 분당점, 조현철씨
으뜸과 버금 분당점의 주인 조현철(37)씨는 요즘 절로 웃음이 난다. 몸이 안 좋아 병원 신세를 지느라 가게를 자주 비우지만 걱정이 없다. 자신보다 더 똑 소리나게 매장을 관리하는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매장을 책임지고 있는 여직원 변지선(30)씨가 그 주인공. 회계학을 전공하고 회계법인에서 얼마간 근무한 탓인지 사소한 부분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녀가 온 뒤로 매장이 더 깔끔해지고 정리정돈이 잘되었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차분한 성격의 그녀는 손님들에게도 인기가 좋은데, 해박한 영화지식으로 손님의 까다로운 입맛 시중을 능숙하게 든다. 사실 그녀도 일년 전에는 고객으로 분당점을 찾았다. 유난히 드라마와 미스터리를 즐겨 찾던 그녀였다. 지금도 편식습관을 못 버리고 있지만 손님들에게는 골고루 권해주려 애쓴다고.
조현철씨는 원래 경영학도로 외국인 상
200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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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와 낸시>? 당연히 있죠!
우수 비디오숍 -춘천시 후평동 영스타 비디오, 이정란씨
영스타의 ‘하루’. 오전 9:00 문 열기 30분 전이다. 지난밤에 본 테이프 제자리에 꽂아놓고 매장청소 시작. 어젯밤부터 쌓인 눈 때문에 문이 잘 열리지 않던데, 내친 김에 매장 앞도 비질 한번.
오전 11:00 밤새워 쓴 거라며 서진원님께서 <존 말코비치 되기>에 대한 감상평을 제출해주셨다. 현재 한림대 사학과 영화동아리 ‘무비 매니아’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시각이 꽤 날카롭다. 평이랑 시놉이랑 카메오 이야기까지 형식도 good!
오후 1:00 사우동 사시는 김정욱님 요즘 청소년영화제 때문에 많이 말랐다. 근데 빌려갔던 <충열도>를 내놓으며 하는 말이 “테이프가 이상해요. 중간부 화질이….” 아니,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충열도> 서치하며 꺼이꺼이 운다.
오후 3:00 신규 고객님 등장. “여기 <시드와 낸시> 있나요?” 무
200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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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참새 모으는 비디오 방앗간
우수비디오숍 - 영화마을 화정점 대표 김진규씨
보통 잘되는 숍은 이렇게들 이야기한다. (손님이 차고 넘치는데) 딱히 비결이랄 게 없다고…. 영화마을 화정점의 강점은 한눈에 보인다. 편안한 휴식공간을 둔 넓고 깨끗하고 잘 정리된 매장이 그것이다. 김진규씨는 하드웨어에 많은 투자를 한다. 재작년에 AV 시스템을 설치하면서 돌비서라운드의 빵빵한 사운드 시스템을 갖추었다. “철지난 비디오라도 이렇게 재생하면 본래의 웅장한 스케일이 살아나니까 구프로와 특선도 많이들 보시더라”고 그는 말한다. 지난해 6월에는 DVD도 들여놓았을 만큼 그는 하드웨어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강점은 하드웨어에 그치지 않는다. 화정점을 자주 드나드는 학생들은 그를 ‘방앗간 아저씨’라고 부른다. 학생들이 스스로를 방앗간 참새로 여길 만큼 자주 찾는다는 말이다. 그래도 아저씨라니, 올해 32살의 미혼남인데 좀 심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취미로 RC 자동차(Radio Control 흔히
200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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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없는 것이 없다
우수 비디오숍 퇴계원점, 오승현씨
영화마을 퇴계원점으로 향하면서 지금 출발합니다, 전화를 했다. 오승현씨는 영화사에서 돌아오는 중이라고 ‘동업자’인 부인 백송이씨가 알려줬다. 말로만 듣던 영화인의 부업인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던 오승현씨는 짐작대로 현역 영화프로듀서였다. 경력을 훑다보니 지금 같은 단편영화 붐이 일기 전, <이상한 영화> 1, 2라는 제목으로 국내외 단편영화모음 비디오 제작사에서 홍보를 담당한 전력도 돌출했다. 10평 남짓, 좁은 숍의 분위기가 독특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비디오테이프들은 배우별로 정리돼 있었다. 니콜라스 케이지, 줄리아 로버츠, 맷 데이먼, 골디 혼, 수잔 서랜던, 닉 놀테, 이수현, 인달화, 양가휘, 장만옥, 원표, 양조위, 양자경, 공리, 주성치…. 같은 이름이 맞은편 진열장에도 반복되는 게 이상하고 재미있었다. 빨/노/초 관람등급별로 진열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한 배우를 한칸에 모으지 못한 것
200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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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작은 론 하워드 감독의 <그린치>. 무려 2억5천만달러를 벌어들여 <미션 임파서블2>와 <글래디에이터>를 가볍게 제쳤다. 아직도 성적이 괜찮으니 총수익은 더 늘어날 거다. 하지만 국내 성적은 정말 초라하다. 12월16일 개봉했는데 10만명도 못 넘고 막을 내리는 분위기다. 원작이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한 가지 이유다. 또는 짐 캐리 때문이기도 하다. 짐 캐리의 <미, 마이셀프 앤 아이린>은 국내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짐 캐리는 <에이스 벤츄라> <마스크> 그리고 코미디 연기에서 벗어난 <트루만 쇼> 정도를 제외하고는 환영받은 영화가 거의 없다. 짐 캐리의 도를 넘어선 익살이나 기괴한 모션은 국내에서 싸늘하게 외면당한다.<그린치>가 국내에서 푸대접받은 진짜 이유도 바로 그 ‘기괴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핏 보기에도 <그린치>는 괴상해보인다. 크리스마
미는 선이고, 추는 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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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임화수는 당대에 큰 ‘주먹’이었다. 종로4가쯤에 자리잡고 있던 평화극장의 주인이었는데 그 당시 자유당 시절에는 모든 극장 주변에서 폭력배들이 자리다툼과 세력확장을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임화수는 폭력조직을 넓힐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당시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에게 잘 보여서 이기붕도 이들 폭력조직을 정권유지에 도움이 될까 하고 암묵적으로 비호하면서 급기야는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접근시켰다. 임화수는 이 대통령을 “아버지, 아버지” 하며 충성을 맹서했고 이 대통령도 귀엽게 봐주었다.이때부터 임화수는 날개를 얻어 영화계에 힘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우선 ‘반공예술단’을 조직하고 모든 영화배우와 연극배우 그리고 현역영화인들을 강제로 입단시키고 스스로 단장이 되어 정부행사에 참여시켰고 불참자는 폭력으로 위협했다. 한 예로 ‘반공예술단’의 큰행사가 열리면 전국에서 촬영중인 영화를 모두 중단하고 서울로 집결시키는데 한번은 코미디언 김희갑(합죽이)이 불참했다.
작은 영화인은 충무로를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