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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김혜리 vermeer@hani.co.kr·취재협조 윤성봉, 한창호수백을 헤아리는 다리와 골목, 흡사 검은 관과 같은 곤돌라들이 떠다니는 수로의 거미줄에 감싸인 도시 베니스는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미궁이다. 비밀과 마법을 은닉한 베니스의 자태는 니콜라스 뢰그의 <돈 루크 나우>, 앤서니 밍겔라의 <리플리>, 이안 소프틀리의 <도브>처럼 황금 같은 지중해의 햇살 뒤에서 인간의 깊은 어둠을 보는 영화들을 유혹해왔다. 그러나 지난 9월8일 닻을 내린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부족한 것은 다름아닌 미스터리였다. 미라 네어 감독의 <몬순 웨딩>에 그랑프리를 선사해 놀라움과 탄식을 동시에 자아냈던 지난해 폐막식과 달리, 올해의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피터 멀랜 감독의 <막달렌 시스터즈>와 여우주연상, 개인 공헌상(촬영)을 차지한 <파 프롬 헤븐>은 영화제 초반부터 내내 일반 관객과 기자들의 지지도 상위권에 머무른 경쟁작이었
제 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결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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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 11명의 감독, 11배의 기쁨올해는 베니스영화제가 알베르토 바르베라 전임 위원장이 도입한 경쟁부문 이원화 체제를 운영한 두 번째 해. 대안영화 섹션으로 정체성을 명료하게 한다는 모리츠 데 하델른의 의도 아래 '현재의 영화'를 개명한 '업스트림' 섹션에서는 10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티안주앙주앙 감독의 <작은 마을의 봄>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스토리와 단아한 미장센을 앞세워 작품상에 해당하는 산 마르코 상을, 자살을 만류한 자원봉사자를 겨냥한 스토킹을 소재로 극단적인 관음주의 판타지를 펼친 쓰카모토 신야의 이 심사위원 대상을 받아 동북아시아 영화에 트로피를 보탰다. 수상권에는 들지 못했으나 전형적인 프랑스식 심리묘사를 교통체증의 밀봉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새롭게 그려 세련된 여성적 에로티시즘을 보여준 클레어 드니의 <금요일 저녁>, 북구의 신성 루카스 무디손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전작들의 기분좋은 휴머니즘을
제 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결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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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돌 맞는 영화제, 이제 어디로 갈까1932년 엑첼시오르 호텔 테라스에서 출범해 햇수로 70년, 횟수로 59회를 맞은 베니스영화제는 흔히 "주름살 제거수술이 필요한 연로한 숙녀"에 비유된다. 프랑코 베르나베 비엔나레 위원장에 의해 전격 초빙된 모리츠 데 하델른 신임 집행위원장이 강조하는 입장도 '대대적 수술'의 메스를 쥐지 못하는 한 소방수 노릇을 하기 위해 베니스에 머무를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스타와 마켓의 존재가 국제영화제의 영향력과 위상에서 가장 긴요하다고 믿는 데 하델른의 신념은 올해 베니스영화제에도 미약하게나마 반영됐다. 마켓의 전초 형태로 신설된 베니스 스크리닝에는 1693명의 영화산업 관계자가 등록했지만 이탈리아영화에 치우친 프로그램과 일반 관객이 오가는 시네마 가든에 설치된 부적절한 부스 위치로 인해 큰 성과는 보지 못했다. 모리츠 데 하델른은 "이탈리아에서는 어디서 방탄 조끼를 살 수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다"라는 농담으로 자신의 좁은 입지를 암시하면서 영화제의 체
제 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결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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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연기상, 비공식 상인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과 세계 가톨릭 언론 연맹상까지 품에 안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장르 연구와 숙련된 스타일을 재확인시키는 수작들 틈에 마음을 흔드는 에너지를 지닌 작품이 희귀했던 올해 베니스영화제 후반의 샘물이었다. 영화제 막바지인 9월6일, 팔라 갈릴레오 극장에서 베네치아59 경쟁작 중 끝에서 두 번째로 공개된 <오아시스>의 언론 시사회 첫 40분은 출감 뒤의 '두부 먹기' 관습 등 한국적 정황을 온전히 이해 못하는 외국 관객에게 부담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홍종두와 한공주의 만남 이후로는 자연스러운 몰입의 공기가 형성됐고, 종두가 어머니 생일잔치의 가족사진에 공주가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박수가 터지기도 했다. 기자 시사 뒤 엑첼시오르 호텔에서 열린 '한국영화의 밤'에 참석한 영화제 관계자와 현지 언론인들은, 이탈리아 일간지 <일 메사게로>의 파비오 페르제티 기
<오아시스> 현지 반응과 외지에 실린 비평모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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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7일 <라 레푸블리카> 클라우디아 모르골리오네환상이 제거된 강렬한 사실주의이창동의 <오아시스>는 이번 영화제에서 스캔들을 일으킬 작품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영화관계자를 위한 첫 시사 뒤 일부는 실망했고 일부는 감동했다. 실망한 이유는 영화 속에 두번 등장하는 에로틱한 장면이 포르노 장르의 그것과 달라서다. 감동한 이유는 그 장면에 등장한 여성이 장애자였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강간의 희생자가 된 이 여성이 이야기가 진행되며 완벽한 관계를 이끄는 주인공이 된다. 그러니까 관객에게 쇼크를 준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의 성적 삶을 억제없이 강렬한 사실주의로 그렸다는 것이다(실제로 많은 관객이 큰 박수로 환호했다). 영화사에서 이런 유형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을 발견하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 육체적 정열까지 묘사한 경우를 찾기란 아주 어렵다. 예컨대 <나의 왼발>의 주인공도 <오아시스>의 주인공과 비슷한 병을 앓지만 두 영화
<오아시스> 현지 반응과 외지에 실린 비평모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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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실은 게이야." 이 고백은 <제리 스프링거 쇼>의 헤드라인이 아니다. <세이프> <벨벳 골드마인>으로 뉴 퀴어 시네마의 꽃을 피운 토드 헤인즈의 신작 <파 프롬 헤븐>이 재현한 티끌 한점 없이 청결한 1950년대 코네티컷 상류층의 세계, 40, 5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한 멜로드라마의 무대에 첫 번째 균열이 날카롭게 그어지는 소리다.울긋불긋한 가을나무 밑으로 파란 자동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면 허리를 졸라맨 완벽한 차림의 단정한 주부가 내린다. 캐시 휘태커(줄리언 무어)는 코네티컷 하트포드 일대에서 칭송받는 모범 주부. 그녀와 성공한 남편(데니스 퀘이드), 사랑스런 두 아이의 가족사진은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지방 신문기자가 취재를 올 지경이다. 정원사와 대화하는 캐시를 본 기자는 놓칠세라 펜을 달린다. "휘태커 부인은 (심지어)'니그로'에게도 친절하다." 그러나 캐시의 퍼펙트 월드는, 남편의 야근이 실은 다른 남자와의 데이트였다는
이 영화가 궁금하다1 -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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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놀이가 기타노 다케시에게 새로운 취미는 아니다. <소나티네>와 <기쿠지로의 여름>의 물가에서 우리는, 부하들을 종이 스모 선수, 복어, 외계인 인형으로 둔갑시켜 즐겁게 노는 그의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다. 스스로 최초의 본격 애정영화로 예고한 <인형들>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처럼 인형극 무대와 객석에서 서막을 올리는 <인형들>(ド-ルズ)은 언제나 죽음으로 종결되는 비극적 연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일본 전통인형극 분라쿠를,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을 빌려 필름에 옮긴 영화다.'일본인의 사랑'이라는 부제를 달아도 좋을 <인형들>을 구성하는 세 가지 러브스토리는 인공적 비장미로 빚어진 절애, 절대사랑의 사연들이다. 마츠모토는 부모님의 강권으로 언약식까지 치른 오랜 애인 사와코를 등지고 사장 딸과 결혼하기로 한다. 그러나 결혼식 직전 사와코의 자살 기도 소식을 접한 마츠모토는, 목숨
이 영화가 궁금하다2 - 기타노 다케시의 <인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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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연극의 위대한 유산 덕에 부유해졌다는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니다. 신기한 발명품이자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최초의 영화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승된 극의 원리를 도입하며 재빨리 연극의 관객을 가로채기 시작했다. 멜리어스의 특수효과, 그리피스의 클로즈업와 미장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가 영화를 연극과 다른 어떤 세계로 이끌었지만 연극과 영화는 어차피 같은 피와 유전자를 타고난 운명이다. 그것은 연기, 세트, 조명, 미술, 음악, 안무 등 영화와 연극의 구성요소 대부분이 동일하다는 것 이상이다. 연극과 영화는 그들의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셰익스피어 등 연극의 역사를 만들어온 이들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영화는 스튜디오 시스템을 발명하기 전까지 연극에서 자양분을 빨아들였고 거대한 산업이 된 이후에도 연극이 품고 있는 자원에 언제나 눈독을 들여왔다.최근의 모범사례는 영국의 영화감독들에게서 발견된다. <아메리칸 뷰티>와 &l
이윤택,박광정,이수인,영화감독 데뷔하는 연극 연출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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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택(50)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곤, "아니, 그가 연극을 버리고 영화계로?"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하며 오두방정을 떨지는 않을 것 같다. 연극 연출뿐 아니라, 기자,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에다가 희곡, 시나리오, TV드라마의 각본까지 써온 경력이 있는 그이기에, 벤처 캐피털리스트나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면 몰라도 영화감독이라면 오히려 그다운 행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 기형도 시인에 의해 '문화게릴라'라 명명되기까지 했던 이윤택이 아니던가.그런데 <잘 가세요>라고? 그의 영화 데뷔작 <잘 가세요>(제작 마오필름)는 <시민K> <바보각시>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 <문제적 인간- 연산> 등 자작 희곡으로 우리 연극계에서는 드물게 흥행보증수표로 군림해온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대박'을 터뜨렸던 <오구- 죽음의 형식>의 영화버전이다. 공연 마지막에 배우들이 함
<잘 가세요> 촬영 중인 이윤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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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출가 이 윤 택아무리 '멀티플레이어'라고 하지만, 이윤택의 전공 분야는 뭐니뭐니해도 연극이다. 그동안 그가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평단뿐 아니라 관객의 커다란 호응을 받아왔다. <길떠나는 가족> <느낌, 극락같은> 등의 작품은 서울연극제의 대상, 작품상 등을 휩쓸었고, 올해의 연극상 같은 상도 여러 차례 그의 몫이었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틈새에서 자신만의 기기묘묘한 전략을 구사해온 이윤택의 연극은 지적 형식적 탐색 그 자체였지만 대중성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는 이야기들을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그는 집착에 가까운 긴장을 뿜는 완벽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포스트모던 리얼리스트, 또는 반성적 모더니스트라 칭하는 그는 90년대 이후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으로 군림하고 있다. 또 그는 현재 경남 밀양에 조성한 연극촌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를 열어나가며, 한국 연극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잘 가세요> 촬영 중인 이윤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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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인간의 삶을 10년 단위로 쪼개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지만, 최소한 박광정(40)의 경우 '10년 주기설'을 주장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최소한 스무살 이후로는 10년마다 삶의 껍데기를 벗는 '변태'과정을 겪었고, 또 겪는 중이기 때문. 그가 대학에 들어가 연극이라는 '업'을 처음 접한 게 20살 때요, 연극 연출가로, 그리고 영화배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30살 때였다. 또 다른 10년을 시작하는 지금, 그는 영화연출이라는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슬슬 채비를 갖추고 있다.영화배우로, 또 TV탤런트로 얼굴을 알려온 그지만, 실제론 대학로에 무게 중심을 둔 연출가이자 배우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일 터. 박광정에 따르면, 그가 연극을 접하게 된 것은 운명도, 필연도 아닌 일종의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스무살 되던 1981년 성균관대 공대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그의 꿈은 라디오 DJ였다. 만약 그때 교내 방송국원 선발 면접시험에서 선배인 시험관이 "
<진술> 크랭크인 준비 중인 박광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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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연출가 박 광 정나이 30살 때인 92년, 대학원생이던 그는 자신의 첫 연출작 <마술가게>를 상연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저 별이 위험하다> <비언소> <모스키토> <매직타임> <날 보러 와요> 등을 연출하면서 그는 농짙은 풍자가 담긴 코미디의 달인으로 손꼽혀왔다. 그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날선 웃음으로 조롱했고, 사회의 환부를 송곳으로 찍어냈다. 이러한 연출가로서의 이미지는, 영화 출연작이나 드라마에서 보여준 코믹한 연기와 겹쳐지면서 '박광정=코미디'라는 당연한 듯 보이는 등식을 만들어냈다.하지만 박광정 자신은 "나는 진지한 쪽"이라고 설명한다. 그동안의 연극을 보며 관객이 웃긴 했지만, "이야기 자체는 하드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거운 내용이라도 밝게 만들어 제대로 전달하려 했다는 점이 그런 인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난해 연출한 강신일의 모노드라마 <진술>은 박광정의 다
<진술> 크랭크인 준비 중인 박광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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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삶을 '의지'와 '우연' 가운데 한 변수로만 말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지를 독립변수로 놓았을 때 설명하기 쉬운 이가 있고, 반대로 우연을 앞세울 때 더 잘 묘사되는 이가 있다. 이수인(41)은 후자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선택했다"는 능동태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수동형의 서술이 더 어울린다. 삶의 선택사항들을 적극적으로 넓혀가는 스타일이라기보다, 그게 저절로 줄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인상도 느긋하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람이 세계관이나 작품관까지 느긋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논리 연산이다. 이씨의 리얼리즘관은 지금 우리 문화에서 구체적이고 날이 서 있다.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모순과 역동 그 자체가 삶인데 그걸 잡아내는 게 리얼리즘이지, 없는 얘길 그럴듯하게 만드는 게 리얼리즘이 아니다."영화감독 이 수 인연극만 10여편 연출해온 이씨는 지난 3월부터 영화감독 데뷔작업에 나
<고독이 몸부림칠 때>(가제)의 이수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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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다라고 객체화하는 게 아니라, 일단 나하고 같다고 보는 거다. 나도 나이들었지만 옛날에 비해 변한 게 없는데, 내가 60살 되면 철들까. 나이들어도 유아이고, 아이들은 좀더 기다려야 하는 어른인 거고. 그런 점에서 다 똑같은 것 아닌가. TV드라마 보면 노인을 대상화하거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로 접근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것보다 '나이든 청년'들, 하지만 몸이 못 따라갈 때가 있을 거고, 그들의 유쾌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주인공들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쓰고 나서, 그뒤에 내가 겪어보지 못한 육체적, 정신적 디테일들을 보충하려 한다. 아이러니를 어느 정도 넣을 수 있을지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전혀 색다른 재미, 그게 내 목표다. 그 때문에 영화 전체에서 아이러니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곧 시나리오 수정작업을 마치고, 이르면 9월 말 촬영에 들어갈 이번 영화에서 가장 신중을 기하는 건 촬영감독을 누구로 하느냐이다. 이씨가 카메라의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
<고독이 몸부림칠 때>(가제)의 이수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