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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의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이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리어 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개의 거상이다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 승일, <별건곤> 1926년 1월호나운규의 <아리랑>은 일대 ‘사건’이었다. 단성사 앞에 장사진을 친 조선 인민들의 울분은 일제 기마병들의 말발굽 위세에도 꿈쩍 안 했다. 행렬은 더욱 늘어났고, 끊이질 않았으며, 그러는 동안 <아리랑>은 단성사가 아닌 전국 방방곡곡 수천개의 고개를 넘었다. 미치광이의 목을 빌려 <아리랑>을 불러젖혔던 나운규. 그는 지금껏 투사였다. 대한제국 대신 조선을, 한성 대신 게이조를 이식당한 이 땅의 비극 안에서, 그는 언제나 투사여야만 했다. 동시에, 잊고 있었다. 활동사진이 아니라, 본연의 영화가 생체적으로 지니고 있던 운동성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이가 바로 그였다는 사
탄생 100주년 맞은 <아리랑>의 나운규,서른여섯해 삶과 영화세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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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 열혈청년의 데뷔작반항적인 성격에다 일찌감치 연애질에 빠져 학교를 쫓겨나다시피 했던 어떤 소년이 고향인 함경도 회령을 떠나 만주로, 러시아로 흘러다니다가 다시 조선으로 슬며시 숨어든 때가 대략 이 무렵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일찍 깨우쳤던 청년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였다. 형 나시규의 이름으로 대리 등록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밤낮으로 노트 한권 들고 극장에 들어가 메모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독립운동 전력이 들통나 2년간 옥살이를 했고, 1924년에 조선 최초의 영화제작사가 부산에 생겼단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부산으로 달려갔다. 거물 나운규가 <운영전>이라는 영화에서 가마를 들쳐멘 단역의 모습으로 우리 영화에 등장하기까지의 사연이 대략 이러했다.1902년생, 그러니까 당시 스물네살이던 한 청년이 자신의 데뷔작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기 전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조선 극영화는 단 한편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말해야
탄생 100주년 맞은 <아리랑>의 나운규,서른여섯해 삶과 영화세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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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순종 아니 혼종!나운규는 <아리랑>이 “외국영화를 흉내낸” 것이라고 말했다. 1936년에 쓰여진 글이라서 자기 작품에 대해 성찰적인 거리를 유지하게 된 시점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글로부터 강하게 감지되는 맥락은 당시에 쏟아져들어온 새로운 종류의 서양영화들이 관객의 취향을 바꾸었고 이에 따라 나운규 또한 관객의 새로운 취향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구상하고 만들어나갔다는 점이다. <아리랑>이 매력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족의 현실을 고발하는, 비장하고 장엄한 리얼리즘 양식뿐만 아니라 “빠른 액션, 우스운 코미디, 쓰라린 감정을 고루 건드리는” 작품이라는 점, 즉 ‘대작 양화(洋畵)’에 상응하는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이다.<아리랑>에 대한 모든 평문들이 절대로 빠뜨리지 않는 이른바 ‘심리적 몽타주’에 관해서도 해석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아리랑>이 예술영화로 받아들여진 가장 큰
탄생 100주년 맞은 <아리랑>의 나운규,서른여섯해 삶과 영화세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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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오몽녀>, 하나의 정점!나운규는 인간적으로도 곡절이 많은 사람이다. 바구니로 긁어 담을 만큼 돈을 벌 때조차 동료나 가족에 대해서 무책임한 행각을 일삼아 죽마고우인 윤봉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때로는 비굴한 모습을 암시하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나운규는 10여년에 걸친 영화활동에 획을 그을 만한 전혀 새로운 작품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1937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에 나운규는 심혈을 기울여 <황무지>를 준비했다. 1936년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부전고원을 무대로 촬영하기 위해 현지 헌팅을 비롯한 촬영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나운규의 건강 이 이미 로케이션 촬영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와 친구들이 <황무지> 촬영을 극력 만류했다. 이에 따라 나운규는 <황무지>를 중단하고 <오몽녀>를 각색하여 영화를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 있는 <황무지> 시나
탄생 100주년 맞은 <아리랑>의 나운규,서른여섯해 삶과 영화세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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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이 <풍년가>를 부르며 춤추는 장면인데 초라하게 찍긴 싫었어. 고집피웠지. 하루에 1원씩 준답시고 800명을 모았어. 근데 통솔이 돼야지. 오전에 집합해도 의상이 튀는 사람들 골라내려면 반나절이 후딱 가는데. 어찌해서 군중을 십여대(隊)로 나눈 다음 한숨 돌리는데 불현듯 기발한 착상이 떠오르는 거야. 춤추려면 머쓱할 것 아닌가. 그래서 술과 술국을 돌렸어. 그게 화근이 될 줄 알았나. 공술인데 한잔 걸치고 물러날 사람이 있었겠어. 누군 코골고 자고, 어디는 주먹다짐이 오가고 난장판이 됐지.”약조를 받아내기까진 그닥 어렵지 않았다. 선생도 적적했으리라. 생자(生者)와 면한 지도 벌써 육십년이 훌쩍 지나지 않았나. 뵈올 수 있냐는 간청을 올렸을 때 선생이 종로통 옆골목에서 선술 팔던 ‘납작집’에서 보자고 흔쾌히 기별을 준 것만 봐도 그랬다. 더구나 그곳이 어떤 곳인가. 음주를 즐겨하지 않는 그이지만, 활동사진 박는답시고 어울려 나섰던 친우들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 아닌
나운규 감독 가상인터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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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800여명의 엑스트라를 모았던 것도 스펙터클을 제공하겠다는 판단이었나요.= 그렇지. 농민들이 <풍년가>를 부르며 춤추는 장면인데 초라하게 찍긴 싫었어. 고집피웠지. 하루에 1원씩 준답시고 800명을 모았어. 근데 통솔이 돼야지. 오전에 집합해도 의상이 튀는 사람들 골라내려면 반나절이 후딱 가는데. 어찌해서 군중을 십여대(隊)로 나눈 다음 한숨 돌리는데 불현듯 기발한 착상이 떠오르는 거야. 춤추려면 머쓱할 것 아닌가. 그래서 술과 술국을 돌렸어. 그게 화근이 될 줄 알았나. 공술인데 한잔 걸치고 물러날 사람이 있었겠어. 누군 코골고 자고, 어디는 주먹다짐이 오가고 난장판이 됐지. 그때 이명우군이 국솥에다 모래를 뿌리기까지 했는데도 그치질 않더구만. 해는 벌써 기우는데 난 나대로 목이 쉬고 가슴이 미어지고. 느지막이 자동차 타고 왔던 전주(錢主)는 그 광경을 보고 발을 구르지. 찍지 못하면 하루 1천원을 고스란히 날려야 하니까. 그러던 참에 참다못한 단성사 사람들이 중
나운규 감독 가상인터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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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는 없으셨는지요. 특히 배우로서 선생의 용모가 적격은 아니었다는 평가는 꽤 많은데요.= 동무 하나가 그러드만. 거울을 연인 삼았냐고. 밥먹을 때도 거울과 마주앉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맨 먼저 방 안을 두리번거린 뒤 거울을 정면하여 앉는 버릇이 있었다네. 내가 내 얼굴 모르겠나.(웃음) 괴벽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겠지. 각선은 꾸부정하고, 키는 5척이 안 될 만큼 작고, 목소리 또한 깔깔했고, 거기다 호흡은 씩씩거리기 일쑤였고. 심술궂고 변덕스럽고 표독스런 인물의 형상이니. 스마트한 선남형이나 노블한 신사형하곤 거리가 멀었지. <해의 비곡>이 제작될 당시 배우를 지망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경손 감독이 앞으로 악역할 사람이 없으면 정말 곤란할 것이라고 일본인 제작자를 설득해서 겨우 통과시켰다고 하더만. 내 영화에선 평범한 사람보단 미치광이가 주인공으로 나오잖아. 그거, 내가 주연하려고 그런 거야.(웃음)<벙어리 삼룡>에선 커다란 화염이 등장해야
나운규 감독 가상인터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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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영화제라는 이름은 아직도 생소하다. 지난해 12월 초 광주국제영상축제라는 이름으로 처음 열렸을 때 사전홍보도 잘 안 됐고, 행사운영에도 많은 차질이 있었다. 상영작 60편 남짓의 소규모 행사에 전체 관객 수도 8천명 남짓했다. 그러나 영화제를 찾았던 이들에게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작고 알찬 영화제’의 기억을 또렷이 남겼다. 거기엔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던 영화들, 새로운 감독과 경향을 알게 해주는 영화들이 가득했다.올해는 기간을 조금 앞당겨 10월25일부터 11월1일까지, 명칭을 광주국제영화제(조직위원장 양형일 조선대 총장)로 바꿔 2회 행사를 연다. ‘영상축제’에서 ‘영화제’로 이름을 바꾼 데에는 나름의 자신감이 반영돼 있다. 예산이 3억원에서 6억원으로 늘었고, 프로그래머 시스템을 도입해 서울시네마테크 대표이기도 한 임재철 프로그래머가 전체 상영작 60여편을 일관된 기획 취지 아래 선정했다.올해 프로그램도 ‘작고 알찬 영화제’의 명맥을 잇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보
제2회 광주국제영화제,10월 25일-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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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La Cienaga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 ┃ 출연 메르세데스 모란, 그라시엘라 보르헤스 ┃ 2001년 ┃ 아르헨티나 ┃ 103분찌는 듯한 여름을 맞아 도시에 사는 탈리네 식구들은 교외에 있는 탈리의 사촌 메차의 집으로 놀러온다. 각각 네명의 자녀를 둔 이 두 가족은 여느 가정 못지않게 속사정이 번잡하다. 메차의 집안은 몰락해 풀장의 물이 썩어가지만, 메차는 부르주아 조상의 습성이 남아 하녀에 대한 불만을 남발한다. 딸은 하녀와 사랑하는 사이이고, 남편의 정부는 아들과도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암시된다. 탈리의 가정은 그보다는 덜하지만 두서없기는 마찬가지다. 두 가족 구성원 각자가 겪는 며칠 동안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이렇다할 인과관계가 없다. 불균질하면서도 사실적인 디테일들을 엮어 그곳 중산층 가정의 내면을 서늘하게 중계하는 어법이 독특하다. 단편과 TV시리즈를 만들었던 루크레시아 마르텔(36)의 장편 데뷔작으로 98년 선댄스영화제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돼 일본과 프랑스
영시네마:주목할 만한 신예감독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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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 촬영 중> Silence… We’re rolling감독 유세프 샤인 ┃ 출연 라티파, 아메드 베디르 ┃ 2001년 ┃ 이집트 ┃ 102분중년의 여배우 말락은 제작자, 감독을 쥐락펴락하는 최고의 스타다. 그러나 가정은 말썽으로 가득하다. 남편이 떠나버린 뒤 말락은 젊고 잘생긴 청년 나메이에게 반해 그를 자신의 상대역으로 뽑는다. 감독은 연기도, 노래도 잘 안 되는 나메이를 꺼리지만 불가항력이다. 나메이는 한술 더 떠 영화에서 자신의 역할이 빛나도록, 연출과 시나리오까지 간섭하고 영화촬영은 엉망진창이 돼간다. 말락의 딸까지 끼어들어, 나메이를 둘러싼 삼각관계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의 대소동을 통해 나메이의 정체가 탄로난다. 할리우드 스크루볼 코미디를 연상케하는 연출에, 연극적 구성을 섞어 교훈적인 결말을 끌어내는 모습이 다분히 예스러우면서도 정겹다. 영화와 영화연출에 대한 풍자도 유쾌하다. 올해 76살인 유세프 샤인은 40여편을 연출해온 이집트의 간판 감독으로 97년 칸
월드 시네마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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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는 저급하거나 지루하고 식상하다는 편견은 이미 오래 전에 깨졌다. 한 명의 거장이나 모든 규칙을 뛰어넘는 위대한 걸작 하나로 무너진 것이 아니다. 71년 시작된 닛카쓰 로망 포르노는 ‘에로’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성을 중심에 놓고 인간과 사회, 역사와 우주까지 신랄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로망 포르노는 수많은 거장과 걸작을 탄생시켰다. 구마시로 다쓰미, 다나카 노보루 등 성애영화의 거장들이 탄생했고 모리타 요시미쓰, 나카하라 준, 히가시 요이치 등 80년대 일본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끈 젊은 감독들은 로망 포르노로 영화를 시작했다.TV의 등장으로 휘청하던 일본의 메이저 스튜디오 닛카쓰는 70년대 들어 도산 직전의 상황에 몰렸다. 닛카쓰는 전속이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을 거의 포기하고, 영화 제작도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 닛카쓰는 돌파구를 ‘에로’영화에서 찾았다. 60년대에 성행했던 싸구려 핑크영화보다는 3, 4배의 제작비를 들이고, 닛카쓰의 우수한 스탭과 촬영기
닛카쓰 로망 포르노-70·80년대 일본 고품격 에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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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의 시적 리얼리즘 영화부터 클로드 샤브롤의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범죄를 소재로 한 프랑스영화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갱스터-필름누아르로 이어지는 직접적 혈연전통을 보여주는 미국과 달리, 프랑스의 범죄영화들은 서로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다. 시적 리얼리즘 경향의 영화들이 사회 문제를 정서적인 어조로 지적하고 있다면, 전후의 영화들은 미국 대중문화와 이중주로 새로운 영화적 형식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누벨바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그 흐름은 클로드 샤브롤의 스릴러영화 형식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범죄영화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배우들, 장 가뱅과 알랭 들롱의 대중적 이미지를 이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망향> Pepe le moko감독 줄리앙 뒤비비에 ┃ 출연 장 가뱅, 밀레이유 발렝 ┃ 프랑스 ┃ 1937년 ┃ 93분<무도회의 수첩> <나의 청춘 마리안느> 등으로 시적 리얼리즘을 주도했던 줄리앙 뒤비비에의 이색
프랑스 범죄영화 특별전- 시적 리얼리즘부터 클로드 샤브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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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의 최근 작업에 대한 글들을 모아놓은 <시네마 얼론>이란 책에서 이 책의 편집자인 마이클 템플과 제임스 S. 윌리엄스는 고다르의 프로젝트는 항상 신선한 주제와 형식을 찾고 있다며 그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고다르는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영화계의 가장 총명한 기대주들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까지도 열정적으로 영화작업을 하고 있는 그를 보건대 분명 이건 틀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는 누벨바그, 아니면 여기서 조금 더 시기를 확장해봤자 60년대에 속하는 과거의 인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국내의 경우에 이건 고다르의 최근 영화와 사고들이 거의 소개도 되지도 않은 채(물론 60년대 영화의 경우에도 별 차이는 없지만) 영화사 책 속에만 담겨 있는 화석화한 어떤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마스터 디렉터’ 섹션은, 현재까지 40여년을 오로지 영화에만 몰두해온 이 ‘현재의 대가’가 80년대 이후에 내놓은 중요작 4편을 모았다
마스터 디렉터 부문- 장 뤽 고다르 근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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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서글픈 사랑 이야기 <로드무비>는 작품적 성취에 관한 논의를 별도로 하더라도, 그 용기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한 영화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질시가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동성애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동성간 성행위를 적나라한 영상으로 담아냈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만만치 않은 의미를 획득한다.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숫자에 비해 사회적 논의가 턱없이 빈약한 한국사회에서 이 영화는 동성애에 관한 활발하고 진지한 대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동성애 담론에 상당한 영향을 발휘했고, 전주영화제와 퀴어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뛰었던, 그리고 현재도 뛰고 있는 영화평론가 서동진씨가 <로드무비>의 김인식 감독을 만났다.편집자서동진감독님, 오랜만이네요.김인식그렇군요. 3년 정도 됐나요.(그때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던 김인식 감독은 서동진을 찾아가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서동진사실 이
<로드무비>를 보는 김인식,서동진의 두 시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