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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빠른 사극도 있다니
“시대극이라 하면 이런저런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왕의 남자>의 소재는 기존의 시대극의 틀을 깬다. 공길이 대표하는 코드도 그렇고, 왕이라는 캐릭터도 그렇고 굉장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를 다루되 젊은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돋보였다.”(김미희 싸이더스FNH 공동대표)
충무로 대다수 관계자가 <왕의 남자>의 최종 스코어를 300만 정도로 예측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사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90년대 이후 과거 충무로와 단절을 선언하며 등장한 새로운 프로듀서와 감독들은 사극을 회피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혈의 누> 같은 성공작도 있었지만, ‘관객은 사극이 진부하다고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TV에서는 <다모> <대장금> <해신> <불멸의 이순신> 같은 드라마가 사극에 대한 통념을 혁파해왔고, <왕의 남자&
<왕의 남자> 성공요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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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영화’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언제나 결과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따르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도 ‘하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한 정해진 수순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마련이다. 개봉 20일째인 1월17일 전국 관객 500만명(이하 배급사 집계)을 돌파한 <왕의 남자>의 흥행 원인을 따져묻는 온갖 매스컴의 기사 또한 이런 ‘결과론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글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 영화의 성공 이면을 들춰보려는 것은 남의 잔칫상에 수저를 올려놓거나 누군가를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이 영화의 성공이 이전의 어떤 흥행영화와도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가 써나가고 있는 흥행 신화의 뒤편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보자.
<왕의 남자>가 보여주는 흥행의 가속도는 아찔할 정도다. 개봉 20일 만에 전국 500만명을 극장
<왕의 남자> 성공요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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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로 접한 에릭 바나는 스크린에서보다 훨씬 상냥하고 밝아 보였다. <헐크> <트로이>에 이어 <뮌헨>에서도 고뇌에 가득 찬 인물을 연기했던 그는 뜻밖에도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멀리서 온 기자들에게 먼저 친절한 인사를 건넸다. <뮌헨>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암살단의 우두머리 아브너로 출연한 에릭 바나와의 인터뷰를 정리한다.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 캐릭터에 공감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다. 신경쓰였던 것은 내가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세계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중동의 역사와 문화, 정치, 팔레스타인 현실 등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는데, 내가 맡은 역할을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아브너라는 캐릭터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브너는 무엇보다 변화하는 캐릭터다. 처음에는 순진한 민족주의자에서 의심과 불안, 편집증이 깊어지고 자신이 하는 일의 진정
<뮌헨> LA 시사기 [3] - 에릭 바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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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은 사랑의 한 종류다
만약 이 영화의 감독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면,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보여줬던 그가 아니었다면, <뮌헨>은 화제의 중심에 놓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주제를 건드릴 때부터 친구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도대체 왜 이 영화를 만든 걸까. 스필버그가 <E.T.> 때부터 함께 작업해온 프로듀서 캐슬린 케네디로부터 이 영화의 연출을 제안받은 것은 1998년이었다. 케네디는 유니버설의 프로듀서 배리 멘델로부터 “스필버그에게 캐나다 저널리스트 조지 요나스가 쓴 <복수>의 영화화를 제안해주지 않겠냐”는 부탁을 받았던 것. 스필버그의 첫 반응은 회피였다. 이 이야기는 그에겐 너무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케네디의 거듭된 설득에 프로젝트의 제작을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2001년 9·11사태가 일어나자 “국가적 재앙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한 스필버그는 이 프로젝트를 포
<뮌헨> LA 시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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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5일은 테러리즘의 검은 깃발이 현대사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날이었다. 그날 새벽, 스스로를 ‘검은 9월단’이라 부른 8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뮌헨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로 침입했다. 이들은 코치 2명을 사살했고 9명의 선수를 인질로 붙든 채 이스라엘과 독일의 감옥에 갇힌 200여명의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 뒤로 21시간 동안 세계는 TV를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고, 결국 9명의 인질 모두와 5명의 테러리스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것은 진정 현대적 의미의 테러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것은 테러리즘을 응징한다는 논리를 가진 또 다른 폭력인 ‘맞테러’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 뒤 수년 동안, 이 사건에 개입된 것으로 추정된 세계 곳곳의 팔레스타인 인사들은 이스라엘 모사드의 개입 속에서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은 이 민감한 세계 정치역학의 한가운데로 용기있게 뛰어드
<뮌헨> LA 시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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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투어 전 과정의 영화화 결정
꽤 “무모한 도전” 같던 유럽 투어 계획은 뜻밖에 윤도현밴드 음악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도화선이 됐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쁜 교육> 등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 수입사로 알찬 이력을 쌓아온 스폰지의 조은운 대표는 평소 친분이 있던 ‘뜨거운 감자’의 김C를 통해 윤도현밴드의 유럽 투어 소식을 듣고 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하게 됐다고. 델리 스파이스의 데뷔 음반 녹음 과정을 담은 비디오 다큐멘터리 <팝!>, 한국 포크록의 선구자였던 한대수의 음악과 삶을 현재에서 되짚어가는 <다큐멘터리 한대수>라는 선례가 있긴 하나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음악 다큐멘터리 제작은 계속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극장에 개봉됐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과 스폰지에서 수입, DVD로 출시한 <더 블루스> 연작에 대한 반응이 괜찮았기에 음악 다큐멘터리가 국내시장에서 전혀
<온 더 로드, 투>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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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곧 ‘길 위에서’란 문구가 갖는 어감이란 언어의 차이를 막론하고 비슷한 게 아닐까.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은 막연한 표랑, 또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거라는 미묘한 설렘이 함께 숨쉬는, 그렇게 끝이 아니라 아직은 진행 중인 미완의 여행 같은 정서. <온 더 로드, 투>는 2005년 봄 유럽 투어의 길에 오른 윤도현밴드의 궤적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이자, 음악이란 길 위에서 10여년 동안 쉼없는 여행을 계속해온 그들의 걸음을 곱씹게 만드는 현재형 기록이다. 국내 대중음악 환경에서는 쉽지 않은 꾸준함으로 대중적인 록밴드의 입지를 다져온 윤도현밴드와 공포영화의 얼개를 빌려 조숙한 십대 소녀들의 성장기를 촘촘한 세밀화로 담아낸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이후 6년 만에 장편 연출을 맡은 김태용 감독의 음악 다큐멘터리. 국내에서 전례가 별로 없는 장편 음악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생소함도 생소함이지만, <온 더 로드, 투>는 무
<온 더 로드, 투>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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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 호랑이와 유적과 인간을 보호하라
<투 브라더스>에는 30마리의 호랑이가 동원되었다.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표정이 풍부한 호랑이가 필요했지만, 액션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스턴트맨 역할을 하는 액션이 좋은 호랑이가 필요했다. 언제 어디서나 촬영에 투입할 수 있는 7∼12주 사이의 새끼 호랑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세계 방방곡곡에서 태어나는 모든 호랑이를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새끼 호랑이는 프랑스에서, 일부는 타이에서 데려왔다. 어미에게서 버려진 갓 태어난 새끼들을 데려다 젖병의 우유를 먹이며 키우기도 했다. 곰과 달리 호랑이는 눈, 입, 귀로 감정을 표현했다. 마치 사람처럼! 차이가 있다면 호랑이들은 나를 육체적으로 상처입히고 죽일 수 있고,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은 전화 한통으로 감독의 사회적 위신을 추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우리는 호랑이들을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안전을 고려해서 호랑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곳에 우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투 브라더스>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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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아노 감독은 표정이 풍부하고 친절하며 말을 즐긴다. 그는 호랑이의 표정과 몸짓을 흉내내가며, 마치 손녀에게 “옛날 옛적 숲 속에서…”로 시작되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생동감있게 두 호랑이의 로드무비 <투 브라더스>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투 브라더스> 제작기를 아노 감독의 목소리를 빌려 쓰고 싶었던 건 그래서였다. 다음 글은 2005년 제10회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있었던 장 자크 아노 감독과의 인터뷰와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제작과정을 쓴 <투 브라더스: 영화에 관한 우화, 그리고 촬영 뒷이야기>를 참고해 재구성한 것이다. 다음 글을 읽거나 <투 브라더스>를 볼 때, 솜사탕을 쓴 것처럼 하얀 머리칼을 한 인상 좋은 프랑스 할아버지가 호랑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영화를 찍는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우리가 ‘호랑이’라고 부르면 호랑이는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호랑이 님’이라고 부르면
<투 브라더스>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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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플레이보이> 창간
1956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로제 바댕) 발표. 가톨릭계 중심으로 반대 여론 거세
1959 최초의 소프트코어 영화 <불멸의 티즈씨>(러스 메이어) 발표
1965 <펜트하우스> 창간. <플레이보이>와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 창간 초기부터 여성의 성기와 음모를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1966 <나, 여성> 미국 개봉
1967 <졸업>(마이크 니콜스> 발표, <나는 궁금하다> 미국 개봉
1969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미드나잇 카우보이>(존 슐레진저) 발표
1970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상업영화관에서 처음 상영된 하드코어 영화 <모나>(빌 오스코) 발표
1971 “가장 친절하고 자연스러운 포르노”(리처드 콜리스) <스쿨 걸>(폴 거버) 발표
1972 최초로 미국 전역 동시개봉한 하드코어
성혁명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 [4] - 미국 포르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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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미국 포르노영화의 황금기였다. 16mm 또는 35mm 필름으로 포르노를 만들던 유일한 시대답게, 여러 편의 문제작들을 배출했다. 그중 3편을 소개한다.
최초의 유성 하드코어 영화
<모나>(1970)
“섹스 영화계의 <재즈 싱어>.” <타임>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리스는 잘라 말한다. 그가 이 영화를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에 비유하는 것은 <모나> 이전의 하드코어 영화에는 사운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나>는 대사뿐 아니라 클라비코드 연주, 흘러간 팝송 등 다양한 음악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은 엄마에게 결혼식 날까지 순결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결이란 양성의 성기를 ‘조합’하는 것만 피하면 된다는 의미다. 젊은 여성은 약혼자의 유혹을 받고, 엄마 또한 딸의 약혼자와 이상한 관계를 맺게 된다. 강한 오럴 섹스신을 포함하고 있는 이 영화의 필름이나 비디오테이
성혁명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 [3] - 70년대 포르노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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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깊숙이>의 폭발
완성된 이 영화가 개봉 초기부터 큰 흥행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뉴욕 개봉 초 뜨뜻미지근했던 반응이 갑자기 폭발한 것은 존 린지 뉴욕 시장이 ‘포르노그래피 일소’를 내걸고 이 영화 프린트를 압수하면서부터였다. 이 사건이 뉴욕의 모든 일간지 1면을 장식하면서 일반인들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포르노그래피는 문화적 전투 지대의 이름이었다”는 린 헌트의 이야기는 들어맞는다.
물론 영화 자체의 힘도 있었다. 특히 코믹한 요소는 적나라한 화면에 대한 부담을 중화해주었다. 주인공 린다 러브레이스는 섹스를 해도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여성이다. 의사(해리 림스)는 러브레이스의 클리토리스가 하체 어딘가가 아니라 목구멍 깊숙이에 있다고 말한다. 의사가 “여기에라도 클리토리스가 있다는 데 감사해야 해요”고 하자 러브레이스는 “남 얘기라고 참 쉽게 말하네요. 당신 고환이 귀에 달려 있다면 어떻겠어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의사가 답한다. “뭐 어때요?
성혁명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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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혁명이었다. 1972년 미국에서 개봉한 <목구멍 깊숙이>는 성인영화, 포르노, X등급영화, 음란물,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건 그들 영화의 역사를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목구멍 깊숙이>는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그 성기와 상대방 이성의 입맞춤을, 그리고 적나라한 살색의 파노라마를 대형 스크린 위에서 보여줬다. 이 영화는 포르노를 중산층의 문화로 승격시켰으며, 검열에 대한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또 다른 할리우드’를 만들어냈다. 1월12일 개봉하는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바로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가 일으킨 혁명을 차분하게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목구멍 깊숙이>와 그것이 일으킨 포르노 혁명의 ‘인사이드’를 깊숙이 들춰보자. 혁명은 어떻게 이뤄졌나, 그리고 어떻게 무너졌나.
그해, 세계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베트남에선 미군들이 마지막 발악 중이었고, 이스라엘 공항의 일본 적군파와 뮌헨올림픽 선수촌
성혁명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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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엔 ‘싸부’가 넘쳐난다. 아무리 문제아라도, 아무리 힘이 없어도,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들과 만나기만 하면 새로운(궁극적으로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싸부’들은 별로 없다. 만나기도 힘들다. 그래서 정리했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모시고 싶은 ‘싸부’들의 특징을. 뭐 따라해보며 스스로 ‘싸부’가 돼도 좋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비슷한 사람을 찾아 ‘싸부’로 모셔도 괜찮다.
챕터1 - 싸부의 정의
[싸부 생활백서1-비슷한 말] 고수, 영웅, 지존, 신 등 여러 단계가 있지만 이중 최고는 단연 ‘싸부’. 되도록 산속, 지하실 등지에 숨어 지내려고 노력함. 전문용어로 은둔생활. 하지만 타고난 재능 때문에 발각되는 경우가 다반사. ‘싸움의 달인’ 오판수(백윤식)의 경우 후미진 독서실의 독방에서 숨어 지내지만 이내 들켜 골치 아픈 수제자까지 들이게 된다. (참고 문헌: <싸움의 기술> <쿵푸 허슬>)
[싸부 생활
챕터별로 학습하자! 싸부 생활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