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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한 얼굴의 네 청춘배우들을 보고, 밝고 쾌활한 영화일 거라 짐작하면 오산이다. <글로리데이>는 스무살을 제대로 즐겨보기도 전에 꺾여버리고 마는, 성장통의 순간들을 서늘하게 응시하는 영화다. 그건 20대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구상한 최정열 감독이 30대에 비로소 <글로리데이>를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진실이라는 걸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30대를 살아가면서 어느새 나도 진실에 대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나도 내가 보았던 어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 이 영화가 첫 장편 데뷔작인 그는 30대인 자신의 모습,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로리데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속 친구들이 더 잔혹하게 무너져내려갈수록, 어른들이 더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짐작과 함께.
-<글로리데이&
“청춘영화는 영화산업 안에서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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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플라워>의 주인공 하담(정하담)은 영화 제목대로 삭막한 거리의 ‘강철 같은 꽃’(Steel flower)이다. 어떤 사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일을 구하고, 만만치 않아 보이는 무게의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살 집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따뜻한 손을 쉽사리 내주지 않는다. 그런 하담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라면 탭댄스를 추는 것이다. 전작 <들꽃>에 이어 두 번째로 함께 작업한 박석영 감독과 배우 정하담이 치열하게 고민해 빚어낸 덕분에 영화 속 하담은 당당하게 세상과 맞선다. 박석영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날것의 감정’이라고 얘기하던데 영화 속 하담의 행동과 감정은 매우 논리적”이라며 “그건 정하담이라는 배우가 하담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연기를 한 덕분이고, 카메라가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보면 박석영 감독이 무슨 뜻으로 한 얘기인지 알게 될 것이다.
-전작 <들
하담씨의 얼굴이 내 영감 속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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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극장가를 무서운 기세로 점령하고, <주토피아>가 역주행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화의 습격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는 존재하는 법이다. 지난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박석영 감독의 <스틸 플라워>와 다양성영화 부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최정열 감독의 <글로리데이>, 흡입력 있는 스릴러영화로 돌아온 이철하 감독의 <날, 보러와요>가 그들이다. 작품의 특성과 스펙트럼은 천자만별이지만 비수기 시즌의 한국 극장가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이 영화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세 작품의 감독과 배우들을 이 지면에 소개한다.
이 한국영화, 보러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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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경 뮤지션 |밴드 ‘9와 숫자들’의 리더 겸 보컬. 《빙글빙글》《보물섬》《유예》 등의 앨범을 냈다.
그날 이후 많은 고민을 했다.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잠시 같은 세상을 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힘을 보탤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떤 것도 진정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고민 끝에 미뤄둔 행동들이 사실은 모두의 의무였고, 나는 지난 2년간 무임승차를 해온 것이다.
음악인들은 애도와 위로를 담은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김창완 밴드의 앨범 《용서》다. 총 아홉곡 중, 표면적으로는 <노란리본>에서만 그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앨범 전체가 그날에서 비롯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중2> <괴로워> <용서> <무덤나비> <아리랑>…. 경쾌한 록에서 긴 내레이션과 연주곡,
노래할 수도, 노래하지 않을 수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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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 |시집 산문집 등을 펴냄.
오늘도 참담했다. 끊임없는 정부의 방해로 그 스스로가 난파선 형국인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가 간신히 2차 청문회를 연 날이다. 국회도 자리를 내주지 않아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지상파 3사는 침묵했다. 오늘 방송 메인은 중국인 관광객의 인천 치맥 파티였다. 청문회에 나온 사람들도 선원들이나 청해진 관계자들 등 말단 책임자들뿐이다.
참사 초기 웬만한 원인은 밝혀졌다. 이익이 최우선인 선주 집단에 국가의 각종 안전 관리 업무를 외주화한 국가. 그 자본과 결탁한 관피아, 해피아들의 부패의 사슬.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노후 선박을 불법 개축하고, 평형수를 덜어낸 자리에 화물을 과적하고, 대부분 선원들을 하루살이 비정규직으로 고용한 선박회사. 충분히 더 많은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었는데도 웬일인지 무능과 무책임으로 304명의 목숨을 눈앞에서 생중계하며 수장한 정부. 보도 통제와 왜곡 선전
기울어가는 시대의 선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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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카메라는 4•16연대미디어위원회(전 세월호 참사국민대책회의 미디어팀)의 이름으로 진도 팽목항, 안산, 서울을 오가며 꾸준히 현장을 기록해왔다. 일곱 감독들이 만든 7편의 기록 영상들은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이란 주제로 묶였다. 참사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는 이 옴니버스 다큐멘터리는 지난 3월30일 제16회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첫 공개됐다. 일곱개의 시선과 목소리를 차례로 소개한다(공동체 상영 신청 문의는 4•16연대 02-2285-0416).
세금 도둑은 국가
<도둑> 연출•편집 김재영 / 촬영 문성준, 박종필, 최종호, 김재영 / 구성 류미례, 김재영
2015년 12월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1차 청문회’가 열렸다. 1차 청문회에선 사고가 벌어진 직후 정부와 해경이 초기 수습에 태만했던 점, 박근혜 대통령이 팽목항을 방문
팽목항에서 안산에서 서울에서 귀기울이다,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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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4일에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업사이드 다운>이 개봉한다. 영화는 참사 피해자의 아버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에 꼭 필요한 정보들을 말해줄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그중에는 오보와 자극적인 보도로 얼룩진 한국 언론계에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현직 언론인, 실험과 연구를 통해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학자, 세월호 승무원들의 노동 현실을 꼬집는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 정책위원 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업사이드 다운>은 탐사보도형 다큐멘터리로 참사의 원인 규명에 접근해간다. 재미동포인 김동빈 감독과 세월호 참사를 재조명하려는 사람들이 재능기부로 완성한 영화다.
-미국 보스턴에서 나고 자랐다. 어떻게 멀리 한국 땅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됐나.
=2년 반을 들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유가족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Vermont Fallen>의 제
“한국 사회의 상식이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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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세월호 2주기에 부치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많이 괴로웠다. 세월호 참사의 비극 앞에서 이 작은 지면에 무엇을 쓸 수 있을지 몰라 앞이 캄캄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침몰의 원인도 참사의 책임자도 여전히 알 길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참사 이후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해왔나.’ 이 자문 앞에서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에 이름을 남기고 유가족들이 있는 광화문 천막 주변을 지날 때면 공연히 고개를 숙이는 게 고작이었다.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 <업사이드 다운>의 개봉 지원 소셜 펀딩 소식을 듣고 뒤늦게 참여한 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했다.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부지불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면서 세월호 2차 청문회를 지켜봤다. 참사 당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라는 선내방송이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진술이 나왔다. 해경과 해양수산부가 운영한 진도•제주 해
한국영화는 세월호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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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스틸>(2013)에 이어 DC 유니버스의 서막을 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은 오랜 시간 기획단계에 머물러 있던 꿈의 프로젝트였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워너브러더스와 손잡고 기획하던 프로젝트에는 <배트맨 이어 원>의 영화화와 함께 이 작품의 초기 아이디어가 있었으며, 2001년 볼프강 페터슨이 감독을 맡고 <쎄븐>(1995)의 각본을 쓴 앤드루 케빈 워커의 초고를 아키바 골즈먼이 다시 각색해 2002년에는 완성된 각본이 나온 상태였다. 이 당시의 각본에 담긴 설정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은퇴한 지 5년이 지나 동료인 알프레드, 로빈, 고든을 모두 잃은 배트맨은 엘리자베스 밀러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아내가 조커에게 살해당하자 배트맨은 복수를 다짐하게 되는데, 슈퍼맨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둘은 점차 대립의 각을 세우게 된다. 그 이면에는 조커와
그래픽노블에서 시네마노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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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완벽한 작품과 거리가 멀고 헛발질도 만만치 않게 많기에,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에 대한 호의적인 의견 개진은 적극적인 옹호보다는 방어적인 변명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일반적인 평판에 대해. <배트맨 대 슈퍼맨>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평론가들과 일반 관객 사이의 의견 차이로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취한다. 분명히 눈에 들어오는 메타크리틱(44), 로튼토마토(29)의 점수 차이는 주류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적대적일 생각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에 가장 비판적인 사람들은 영화비평가가 아니라 코믹북 팬들이고, 이들의 비판 방향과 지지 방향은 세부까지 들어가면 그렇게까지 일관적이라고 할 수 없어 하나의 의견으로 묶기 어렵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맹렬한 불평
뻔뻔스러운 난장판의 생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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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던 DC가 내놓은 회심의 역습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예상대로 박스오피스를 뒤흔들고 있다. 저스티스 리그의 출발을 알리는 이 중요한 기점의 영화에 쏟아지는 팬들의 찬사와 불평 모두 이미 나올 만큼 나온 상태. 영화평론가 듀나와 조재휘가 그 속을 들여다봤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보는 두 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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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2일 CGV압구정 ‘한국영화인 헌정 프로젝트’ 개관식. 스크린 속 <서편제>의 송화(오정해)와 유봉(김명민), 동호(김규철)가 판소리 가락을 읊으며 봇짐 지고 고개를 넘고 있을 때, 극장 앞 무대에서는 모그 음악감독과 연주팀이 연주하는 <아리랑>이 울려퍼진다. 오정해의 춤사위를 따라 극장 계단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리꾼이 소리를 하며 무대로 향하고 있다. 12분으로 구성된 연극은 이날 CGV 아트하우스에서 열린 개관식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연식 감독이 임권택 감독과 안성기 배우의 대표작을 모아 콩트식으로 꾸린 것이다. 헌정관은 한국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과 국민배우 안성기의 이름을 딴 것으로 CGV압구정 아트하우스에는 안성기 상영관이, 부산에 위치한 CGV서면 아트하우스에는 임권택 상영관이 각각 열린다.
<서편제>를 비롯해 <고래사냥> <칠수와 만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취화선&
그들의 한길 영화인생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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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떤 존재도 단 한방에 무찌르는 능력자 원펀치맨, 사이타마라는 청년이 주인공인 액션 활극 <원펀맨>은 ‘이웃집 영점프’라는 웹사이트에 연재되던 중 창작자들 사이에서 재미있다고 먼저 소문이 났다. 그중 만화가 ONE의 원작을 본 작가 무라타 유스케는 리메이크 작업을 스스로 자청했을 정도다. 결국 TV애니메이션은 그의 리메이크작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작화 감독 구보타 지카시의 작화 총지휘, <스페이스 댄디>의 나쓰메 신고 감독의 연출, <타이거 앤 버니>의 스즈키 도모히로 작가의 구성 아래 탄생한 이 작품은 존재감을 잃어가던 매드하우스를 다시 회생시켰다. 심지어 주요 캐릭터인 사이타마와 제노스의 성우로 출연한 후루카와 마코토, 이시카와 가이토 역시 이 작품 때문에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영웅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일이 없어 취미로 히어로 행세를 하는 <원펀맨>의 사이타마는 우주 최강의 괴물이 와도 거
전통 스튜디오의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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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볼을 던지는 시늉만 해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외칠 수 있을 거다. “피카츄! 너로 정했다!” OLM(Oriental Light & Magic)의 킬러콘텐츠 <포켓몬스터>(1997)는 말 그대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역사를 갈아치웠다. 닌텐도의 동명 게임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며 독보적 캐릭터 피카츄와 동행한 소년, 소녀들이 몬스터들을 모으거나 친구들을 사귀는 동안 겪는 긴 여행의 과정을 그린다. 다른 여러 지역을 여행한다는 내용의 후속 시리즈가 현재까지도 출시되고 있다.
1994년, 중소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출발한 OLM은 진입장벽이 높지 않아 쉽게 접할 수 있고 오랜 시간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도록 단순하고 반복되는 구조를 갖춘 시리즈 애니메이션에 강한 제작사다. 제작팀을 예닐곱팀으로 나누어 팀별로 개별 작품을 제작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다. <포켓몬스터>로 재미를 보아서인지 <다마고치>(2009), <요괴워치>(2014)
게임 원작의 아동물에 주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