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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만큼 디스토피아적인 소재가 있을까. 그런데 대다수의 재난영화는 사실 그다지 디스토피아적이지는 않다.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시종일관 디스토피아적인 상태의 불편함과 암울함을 견뎌줄 관객이 많지는 않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이들 영화가 다루는 재난은 주로 재난 자체의 기승전결 서사(敍事)를 갖는다. 임박한 파국을 예측해서 경고하는 소수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는 기존 시스템의 관성이 있다. 극의 초반기에는 답답하게도 후자의 힘이 압도적이지만, 결국 당도한 재난 앞에 전자의 예지와 역량이 빛을 발하고, 이들의 분투 덕에 재난은 ‘극적으로’ 그래서 ‘대충’ 극복되곤 한다.
이와는 다른 디스토피아적 영화의 서사는 주로 ‘재난 이후’를 소재로 삼는다. 인간이 멍청해서든 무력해서든 회복할 수 없는 재난의 결과로 펼쳐진 지옥도 위에서, 또 인간은 분투한다. 마치 재난이 소재인 듯하나 실제로는 정치가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이 새로운 ‘자연상태’에 대한 해석은 영화마다 조금씩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재난의 서사(敍事, 序詞, 署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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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멘탈>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6월14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24일째인 7월8일 토요일에 자신의 일일 최다 관객수(33만명)를 경신했다. 종전의 기록은 7월1일(개봉 17일차)의 28만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개봉 후 주말마다 우상향하는 중이었다. 개봉 31일차인 7월15일 토요일엔 그 기세가 26만명으로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이는 여전히 개봉 첫주 토요일의 수치(17만명)보다 높다. 이 숫자들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엘리멘탈>은 지금 역주행 중이다.
<엘리멘탈>과 관련해 두 번째 흥미로운 사실은 개봉 한달이 지난 시점에 새롭게 열린 특별 상영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극공감에프(F)관’이다. 이는 CGV에서 마련한 특별 상영으로, 7월15일과 16일 이틀간 수도권 5개 관에서 하루 1~2회차씩 진행됐다. 이 기획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MBTI 성격 유형 검사에 익숙한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예매 진행 시 안내되는
[비평] ‘엘리멘탈’의 흥행 역주행에 대하여(feat. MB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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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더라.” 새로 팀에 합류한 그레이스(헤일리 앳웰)가 상식을 벗어난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묻자 벤지(사이먼 페그)는 농담처럼 답한다. 실은 그 농담 같은 진심이야말로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해온 팀의 비결이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CG가 점령한 스크린에 저항해온 방식이다. 에단(톰 크루즈)은 달리는 기차에 침입하기 위한 작전을 짠다. 나름 정교한 작전을 짠다고 하지만 늘 그렇듯 계획은 틀어지고 결국 바이크를 탄 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너무 위험해서 제일 먼저 찍었다고 하는 절벽의 활강 장면은 아찔하면서도 이상하다. 에단의 멋들어진 질주와 스피드 플라잉을 생생한 각도로 찍은 장면은 최근 CG가 잃어버린 중력의 존재감과 진짜 같은 생동감을 전한다.
문제는 이어지는 장면이다. 에단의 낙하와 활강을 멋지게 찍은 카메라는 정작 중요한 기차로의 돌진 과정을 건너뛴다. 그레이스가 위기에 빠진 절체절명의 순간, 에단은 마치 달리는 옆 차량에서
[비평] 몸으로 저항하고 규모로 버티는 스펙터클의 고향,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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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홀리데이> 신간을 보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홀리데이> 매거진은 지역과 여행을 다룬 잡지로 세계에서 유명한 잡지 중 하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이 잡지도 사연이 있다. 1946년에 창간한 <홀리데이> 매거진과 현재의 <홀리데이> 매거진은 큰 차이가 있다. 1946년과 1977년 사이 뉴욕에서 만들어지던 <홀리데이>는 작가와 사진가에게 원고 길이도, 여행 경비도 제약 없이 전세계 곳곳의 지역과 여행의 본질을 탐구하기를 원했다. 헤밍웨이, 잭 케루악 같은 작가들은 <홀리데이>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판형도, 분량도 적어지던 <홀리데이>는 갑자기 폐간을 알린다. 모든 것은 끝난다는 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홀리데이>는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그때의 <홀리데이>와 지금의 <홀리데이>는 큰 차이가 있다. 37년 만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지역과 여행 섹션 -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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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바다를 낀 군천 지역의 해녀들은 근방에 들어선 화학공장으로 인해 바다가 오염되자 해산물 채취만으로 생계가 곤란해진다. 브로커 삼촌(김원해)은 이들에게 바다에 던져진 밀수품을 건져내기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건넨다.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을 필두로 한 군천의 해녀들은 밀수 운반 범죄에 가담하고, 이로 인해 잠시 호황을 누린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밀수품을 건지는 데 여념 없던 해녀들의 작업 현장을 세관 계장 이장춘(김종수)이 급습한다. 체포가 이루어지던 날 진숙의 가족들은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고, 춘자는 배에서 몰래 탈출해 종적을 감춘다. 2년 후, 춘자는 서울에서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를 만나 함께 밀수판을 점령하러 다시 군천에 내려온다. 징역살이 후 처지가 곤궁해진 진숙은 해녀들을 배신한 춘자의 귀환이 달갑지 않지만 밀수판에 재합류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몇년 새 군천의 순박한 청년에서 해운사업가가 된 장도리(박정민)와
[리뷰] ‘밀수’, 영화에 돛을 다는 고민시와 닻을 내리는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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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바비 인형들과 바비의 짝 켄 인형들이 사는 바비랜드는 매일 핑크빛 행복으로 가득하다. 이곳에 사는 수많은 바비 인형 중 하나인 전형적 바비(마고 로비)의 삶 또한 그렇다. 하루하루 놀이와 파티 속에 살던 바비는 문득 생의 유한함에 관해 고민한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던 바비는 어느 날 이상함을 느낀다. 구취와 피로를 느끼고, 힐에 최적화되어 있던 발도 형태가 변한다. 바비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딴 성에 사는 이상한 바비(케이트 매키넌)를 찾아가고, 이상한 바비는 문제 해결을 위해 바비에게 현실 세계에 사는 인간 주인을 찾아가보라고 조언한다.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바비의 여정에는 언제나 바비와 짝으로 붙어다니는 켄(라이언 고슬링)이 함께한다. 바비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주인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를 만남과 동시에, 바비랜드와 달리 현실의 인간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을 체감한다. 한편 켄은 현실 세계에선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권력
[리뷰] ‘바비’, 남성성의 폐단을 전복하는 여성들의 명징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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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비닐하우스에 머무는 돌봄 노동자 문정(김서형)은 종종 자신의 뺨을 후려갈긴다. 왜 그는 이런 기행을 벌이는 걸까. 무채색의 고요에 감싸인 서사에 발작적인 소음을 불어넣는 이 자해 행위의 원인은 오래지 않아 명확해진다.
문정이 돌봄 노동을 하며 마주치는 존재는 문정의 선의와 헌신을 감사 대신 불가해한 행동으로 되돌려주는 요령부득의 타자이며, 노동과 일상에서 겪는 소외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해결할 가능성도 요원해 보인다. 불모에 처한 구조적 조건을 문제시할 도덕적 자의식도 소진된 상황에서, 문정은 여전히 몸을 일으켜 오늘을 살아야만 한다. 소년원에서 출소를 앞둔 아들과 동거할 자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택지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며 감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여를 개의치 않고 지속되는 악몽 같은 현재를 견디기 위한 가학적인 자기암시의 몸짓일 뿐이다.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는 더 나은 대안과 연대를 도모하는
[리뷰] ‘비닐하우스’, 명확한 주제의식으로 그려내는 웰메이드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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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기 경력 10년에 이른 배우 도경수. 20대의 온종일을 노래와 연기로 채웠던 그가 <더 문>으로 돌아왔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멤버로 활동하며 2014년 영화 <카트>,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로 이름을 알린 이래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와 <스윙키즈>로 배우의 입지를 공고화했던 그가 군 공백기 이후 5년 만에 극장가를 찾은 것이다. 무대와 스크린에서 보여줬던 강직하되 청아한, 아주 큰 눈망울은 변함이 없다. 마침내 이 눈빛은 달에 홀로 고립된 우주비행사 황선우의 외로움과 흔들림, 그리고 이것들을 이겨내는 강직함까지 두루 섞어낸 최적의 무기로 거듭났다. 그는 “지금까지의 배우 경력 중 감정의 크기와 폭이 가장 크고 넓은 인물을 연기했다”라며 촬영 당시의 설렘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은 향후 10년의 세월을 또다시 거뜬하게 빛낼 만큼 영롱했다.
- 영화로 관객을 만나는 건 대략 5년 만이다.
= 너무 떨
[인터뷰] 가장 크고 깊은 감정으로, ‘더 문’ 도경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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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의 재국은 실패를 직시하기보다 숨어버리기를 택한 비겁한 남자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인 달 탐사선 나래호 프로젝트가 예상치 못한 엔진 결함으로 공중에서 폭발했을 때 우주센터장에서 물러나 잠적해버린다. 두 번째 도전에 나선 우리호가 또 한번 사고로 대원들을 잃자, 정부는 유일한 생존자 선우(도경수)의 귀환을 위해 사령선을 가장 잘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을 소환한다. 소백산 천문대에 은둔하던 재국은 우주센터로 돌아온 후에도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함을 보인다. 그랬던 재국이 과거를 반추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낸 <더 문>은 어떤 의미에서 재국의 성장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 의외로 김용화 감독과는 첫 작업이다.
= 30년 동안 연기하면서 같이 작품을 한 적이 없는 배우도 많고, 같이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감독님은 더 많다. 감사하게도 김용화 감독님이 다른 작품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로 내 이름을 얘기
[인터뷰] 현장의 에너지와 직면하며, ‘더 문’ 설경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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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도 높은 팬덤을 가진 두 배우가 만났다. 장르가 퍽 달라서 더 흥미로운 조합이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이후 탄탄한 팬덤을 구축한 설경구, 최근 4년 만의 엑소 컴백도 예능 프로그램의 화제성도 고르게 챙기다 드디어 영화로 돌아온 도경수가 <더 문>으로 조우했다. 2029년, 대한민국의 달 탐사선 우리호가 사고를 당한 후 황선우 대원(도경수)은 홀로 달에 남겨진다. 그의 무사 귀환을 위해 5년 전 폭발 사고가 났던 나래호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이자 지금은 산속에 은둔 중인 전임 센터장 재국(설경구)이 다시 소환된다. 설정상 두 배우가 직접 만나는 장면은 없지만 지구와 달, 떨어져 있는 공간에서 생사를 두고 소통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은 오히려 두 캐릭터의 감정적 진폭을 극적으로 요동치게 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배우 설경구, 도경수와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커버] 전설이 될 귀환, ‘더 문’ 설경구, 도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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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조의석, 김병서 감독의 <감시자들>에서 다람쥐 역을 맡았던 2PM의 멤버이자 배우 이준호. 이때만 해도 가수 출신의 배우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 않나. <옷소매 붉은 끝동>에 이어 <킹더랜드>까지, 연속 홈런을 날린 그에겐 이제 ‘배우’라는 단어가 전혀 낯설지 않다.
[ARCHIVE]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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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Merry Christmas Mr. Lawrence>의 멜로디를 떠올리는 데 걸린 시간은 30초 정도였다고 한다. “피아노 앞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순간에는 이미 화음을 갖춘 멜로디가 악보의 오선지 위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투병으로 인해 죽음을 눈앞에 둔 류이치 사카모토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단 1분, 2분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그만큼 새로운 곡이 탄생할 가능성도 커지지 않을까요.”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유고 산문집이다. 2014년 중인두암이 발견된 이후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 그가 중인두암 치료 이후인 2020년 4월 직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거듭하다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차분한 고백으로 책의 서두를 연다. 특정한 컨셉이 있다기보다는 죽음을 앞두고 신변 정리를 하듯 지난날에 대해 써내려간 책이어서인지,
[리뷰]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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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책 <노가다 칸타빌레>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해서 찾아보게 됐다. 육체노동에 판타지가 있었던 작가가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책에 담았다. 너무 재밌게 읽어서 작가의 인터뷰까지 찾아봤다. 책을 읽은 뒤론 공사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너무 멋져 보이더라.
치앙마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엔 가족과 한달 살기를 고려했을 정도로 좋아하는 도시다. 한동안 가지 못하다 얼마 전에 다녀왔는데 불교 사원도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었다. 아이도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콩국수
집에 검은콩이 많아 최근에 요리해봤다. 만들기도 쉬운데 뜨거운 물에 1시간 가까이 콩을 끓이고 믹서기에 간 뒤 삶은 중면과 얼음, 오이를 넣어주면 된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다.
<미드소마>
낮에도
[LIST] 박하선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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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지 않는 세대가 늘어나고 시청률의 의미가 달라진 시대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엇을 고민할까. CJ E&M 산하 스튜디오 ‘에그이즈커밍’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십오야>에는 얼마 전 ‘침착맨에게 배워왔습니다’라는 카테고리가 생겼다. 웹툰 작가에서 유튜버로 성공한 ‘침착맨’ 이병건은 자신의 라이브 방송에 출연한 나영석 PD에게 ‘집중 안 해도 되고 안 들어도 전혀 안 아까워야 사람들이 방송을 켠다’라고 조언했다. 이서진, 김종민, 차승원 등이 나영석 PD와 마치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나영석의 나불나불’은 그렇게 나왔다.
<채널 십오야>의 장점이 연예인 섭외만은 아니다. 에그이즈커밍 작가, 조연출 등이 등장하는 ‘스탭입니다’, 나영석 PD와 함께 일하다 이직한 PD들이 출연하는 ‘집 나간 PD들’은 예능판 <미생> 같은 방송이다. 촬영에 필요한 음원 CD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술 마신 뒤 잠들어 답사 갈 비행기를
[최지은의 논픽션 다이어리] 유튜브 '채널 십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