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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얼마나 인상적인지와는 별개로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노래는 대부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노래는 호흡을 가다듬는 휴지부이거나 공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치트키이거나 팬서비스다. 노래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 영화라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래는 서사나 감정의 보충재이거나 관객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백에 가까운 혼잣말이다. 혹은 단체 군무를 위해 마련된 반주곡이다. 어느 쪽이든 감정전달이나 분위기 환기를 위한 친근한 매개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논의할 영화 속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 역시 크게는 영화 속 다른 노래 장면과 비슷한 한계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 이들 영화에서 노래가 기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과잉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그저 인상적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힘든 끈적함을 남긴다.
<키리에의 노래>는 버스킹하는 키리에의 노래를 영화 상영 환경에 맞춰 정제하기를 거절하고 현장음에 가까운 사운드로 들려준다. 이는 관객을 현장에
[비평]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앵그리 애니> <키리에의 노래>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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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진행한 ‘독립영화 쇼케이스’에 비평으로 참여한 나는 <괴인> 안에 한국영화 속 인물들이 관류한다고 평하며 명장들의 영화와 연결지었다. 특히 이창동의 <버닝>과 봉준호의 <기생충>을 결합한 형태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유는 인물 구성과 특정 세대의 감각 그리고 건축의 형태와 계급성이 <괴인>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웃음을 유발하는 특정 상황과 대화에서 홍상수의 영화 같다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는데 이후에 <괴인>에 대해 곱씹을수록 그 인상은 사라졌고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작품만이 떠올랐다. 그것은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따라서 <괴인>을 두고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영화”라고 평한 것은 반 정도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계보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영화다.
불안이 건져올린 비일상성
다
[비평] ‘괴인’에 녹아든 시대 감각,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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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이 났다. 겨울에 촬영 예정인 작품의 주요 배경이 방콕인데 그곳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둘러 가보아야겠다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일년이 지나서야 이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제 방콕 분량의 각색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방콕이라는 도시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어 촉감, 냄새, 색깔 무엇 하나도 어렴풋하게나마라도 잡히는 것 없이 부옇게 느껴졌다. 상식이 부족한 편이라 방콕은 정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로 방콕에 대해 무지했다. 차라리 우주 공간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더 쉬워 보였다.
지금까지 나에게 익숙한 것이 아닌 것을 써본 적이 없다. 충분히 겪어봐야지만 쓸 수가 있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들은 삶을 통과하며 밟아보고 닿아보고 스쳐갔던 것들을 모아 만들었다. 요즘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내 몸을 주물러보곤 한다. 글을 쓸 때 나는 거대한 식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생활 속에 부유하는 여러 무언가들을 부지런히 삼키고 소화시키고 양손으로
[김세인의 데구루루] 정글 없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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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빈이 연기하는 <소년시대>의 지영은 부여의 흑거미, 즉 부여의 ‘블랙 위도우’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릿 조핸슨)처럼 강인한 신체와 격투 능력을 지녔지만 그가 얼마나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지영은 생각한)다. 어느 날 지영의 집 마당에 임시완의 얼굴을 한 병태가 들어온다. 부여 시내 뒷골목의 무정한 협객은 엉겁결에 동거하게 된 세상 물정 모르는 남자아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근래 다양한 장르에서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준 이선빈은 <소년시대>에서 그간의 호쾌한 매력을 근간에 둔 채 거칠고 험한 80년대의 막바지를 살아가는 여고생 지영을 생생히 그려낸다.
- <소년시대>의 대본을 읽고 어떤 점에 끌렸나.
= 평소 웹툰 보기를 즐긴다. 그중에서도 학원물을 특히 좋아하는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교복을 입고 고등학생을 연기할 날이 앞으로 얼마나 있겠나. (웃음) 지영 캐릭터도
[인터뷰] 가장 나다운 나, <소년시대> 이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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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s, be ambitious!” 모름지기 소년이라면 야망을 가지라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의 격언을 격동의 1980년대를 살아가던 소년 병태(임시완) 또한 한번은 외워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병태의 이상은 그맘때의 남학생이 품을 법한 야망과 독자 노선을 견지한다. “소년은 꿈이 있어야 허는 법이여. 나의 꿈은 말이여 아주 소박햐, 안 맞고 사는 것. 딴 놈들맨치로 평범하게 사는 것.” 청소년기의 막연한 환상이 붕괴되는 순간 어른이 된다지만, 병태의 꿈은 다른 방식으로 좌절된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태는 전학 간 학교에서 전설의 싸움 짱 ‘아산 백호’라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조용히 살고 싶었던 병태는 일순간 부여농고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소년시대>는 배우 임시완의 가장 무구한 얼굴을 만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병태가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화면에 가득 차는 순간, 분위기에 휩싸여 마셔본 적 없는 소주와 피워본 적 없는 담배를 머금는 순간
[인터뷰] ‘생즉필사 사즉필생’의 마음으로, <소년시대> 임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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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이 TV에서 <소녀시대>를 노래하던 1989년, 부여 한복판에서 장병태(임시완)와 박지영(이선빈)의 ‘소년시대’가 펼쳐진다. 병태는 어느 여름 아버지(서현철)를 따라 부여로 야반도주한다. 그는 전학 간 부여농고 급우들로부터 이름의 음운 배열이 비슷한 정경태(이시우)로 오인된다. 경태는 숙맥 소년 병태와 달리 ‘아산 백호’라 불리며 부여 전체를 주먹으로 평정한 사나이다. 병태는 졸지에 희대의 싸움 짱이 되고, 심지어 이 역할극에 도취되기 시작한다. 한편 드라마의 제목에 명기된 소년(少年)이 사내아이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지영의 ‘소년시대’이기도 하다. 화려한 무술 실력을 감춘 채 살아가는 ‘부여 흑거미’ 지영은 한주먹 거리도 안되는 병태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매번 천변만화하는 모습을 보여준 두 배우, 임시완과 이선빈은 자신들이 언제 장성한 성인이었냐는 듯 교복을 입고 천연덕스럽게 10대 끝자락의 여름날을 연기해낸다. <
[커버] 지금은 소년시대, ‘소년시대’ 임시완, 이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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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수년에 걸쳐 거슬리는 인간들을 차례로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으며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한다. 이런 사이코패스를 독자가 응원할 수 있을까. 그가 주인공이고 그의 내면의 지도를 상세히 제시하면서도, 독자가 사이코패스를 미워할 수만 없도록, 심지어 그의 범죄 행각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날 상황이 되자 그가 상황을 무사히 피해가도록 응원까지 하게 만드는 놀라운 전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사이코패스 톰의 어두운 영혼으로 향하는 계단 층의 높이를 서서히 높여가며 독자가 그에게 동화되도록 만든다. 살인 후 덤덤하게 시체를 처리하고 감흥조차 갖지 않는, 도덕심은 없지만 미식가이고 탐미적인 취향을 가진 복잡한 톰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없건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톰의 시선으로 그를 둘러싼 사회와 고급 취향의 집 안 정경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톰 리플리가 거짓말로 올라탄 계급 사다리를 투영하기도 하며, 그
씨네21 추천도서 - <리플리 5부작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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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세 준코 지음 /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다. 조직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 일이 몰릴까.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업무의 경계가 불투명해서 정확히 구획을 나누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일을 못하거나 일을 안 하려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업무까지 다른 사람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부족한 아이, 월등한 아이가 있어 서로 협동심을 쌓아 사회로 나가는 것은 훈훈하겠지만 그게 회사라면 경우가 다르다. 민폐 직원은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고, 그 결과가 고가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불공정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또 이런 질문도 있다. “일을 잘하지만 성격이 나쁜 동료, 일은 못하지만 성격이 정말 좋은 동료. 당신이라면 누구와 일하겠습니까?” 일터에서 밥을 먹고 잡담을 나누고 야근을 하고 회식을 하는, 그 시간의 일들을 ‘작가가 내 회사 생활을 들여다봤나’ 싶게 쓴 것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이다. 식사
씨네21 추천도서 -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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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버라 리비 지음 / 권경희 옮김 / 비채 펴냄
“내 꿈은 끝났다.”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석사과정으로 성취가 이어졌으나 로즈가 병이 나 박사과정을 중도탈락하면서 꿈은, 끝났다. 로즈는 주인공 소피아의 어머니인데 ‘간헐적 다리 마비’라는 원인 불명의 통증으로 걷지 못한다. 아버지가 그들을 떠난 뒤, 로즈는 소피아를 위해 살아왔다. 집을 저당잡힌 그들은 스페인 남부의 고메즈 클리닉에서 다리 통증 치료를 위해 애쓴다. 이 신비한 클리닉은 무엇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곳으로(고메즈가 돌팔이는 아닐까 우리는 의심하게 된다), 소피아와 로즈는 해변 별장을 빌려 지낸다. 소피아는 그곳에서 후안, 그리고 잉그리트와 성관계를 갖는다. 잉그리트는 소피아에게 “사랑받는”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옷을 선물하는데, 이 글씨가 사실은 “머리 잘린”이라는 뜻임을 소피아는 뒤늦게 깨닫는다. “내 실크 톱에 수놓인 ‘사랑받는’은 유로라는 단어보다 내 삶을 더 많이 바꿨다. ‘사랑받는’은 무대 한가운데에 꽂히
씨네21 추천도서 - <핫 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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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말이 통하는 누군가를 사회생활에서 만나면 반가울 것이고 마음을 터놓고 싶을 것이다. 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능동적 행위의 연속이라, 어느 순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일이 생긴다. 그렇게 관계가 갑자기 끝나버릴 수도 있다.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지만, <자전거와 세계>의 주인공에게는 그리 쉽지 않다. 한때 친밀했던 동료가 갑자기 냉랭해져 애가 타고, 또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가 뭔가 속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 혼란스럽다. 그렇지만 직장에서는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은근히 경고할 뿐이다. 내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나의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외롭고 애타는 마음은 사그라들고 대신 현실의 이해관계를 빠르게 계산하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 것이다. <산무동 320-1번지>의 호수 엄마는, 철거를 앞둔 동네의 건물주 장 선생 대신 발품 팔아가며 월세를 척척 받아낸다.
씨네21 추천도서 - <축복을 비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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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 지음 / 창비 펴냄
열한 가구가 사는 집에서 그나마 왕래가 있던 윗집 할아버지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났다. 집주인은 나중에 들어올 새 세입자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비어버린 집을 홀로 기웃거린다. 막걸리 한잔과 샤인머스캣을 윗집에 남겨두고, 그가 남긴 오래된 책 한권을 가지고 온다. 그렇게 일상에서 개인적인 장례식을 치르며, 마음에 일어난 파동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그 파동의 중심에는 한동안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와 어느 순간 관계가 끝나버린 사건이 있다. 솔직한 관계는 무엇인지, 다정하고 용감한 마음은 또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의문들이 일상에 내려앉아 있다.
<해피 엔드>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악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잔잔하고 차분하게 밀려드는 안개 낀 강물 같은 이야기다. 문득 생각나 사 먹은 구슬 아이스크림은 맛있고, 공장에서 키우는 개는 밥을 잘 먹고 똥도 잘 싼다. 유튜브를 열심
씨네21 추천도서 - <해피 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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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 - 이주란 지음
축복을 비는 마음 - 김혜진 지음
핫 밀크 - 데버라 리비 지음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 - 다카세 준코 지음
리플리 5부작 세트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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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아카데미극장 위법 철거 규탄 4차 시민대행진을 다녀왔다. 폐허가 된 원주 아카데미극장을 보며 문득 광주극장(사진)이 떠올랐다. 우리 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단관 극장들의 현실은 단지 건물이 없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과 기억이, 문화적 유산이 소멸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1935년 개관해 88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지금 상영 중인 음악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의 무대가 된 곳이 바로 광주극장이다. 만약 한국판 <시네마 천국>이 있다면 여기 광주극장이 바로 그곳 아닐까.
[ARCHIVE] 오래된 극장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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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숀 레논 <Parachute>
친구들과 밴드를 하면서 관련 음악을 많이 듣는데 그중 숀 레넌의 <Parachute>가 내 마음에 정확히 꽂혔다. 멜로디와 가사가 좋다. 드라이브 할 때 들으면 좋은 노래. 추천한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
어려서부터 유학 생활을 했다. 그래서 계나(고아성)가 해외에 가 경험하는 외로움이 온몸으로 공감됐다. 통신이 지금처럼 원활하지 않던 시절이라 부모님과 화상 통화를 할 때 계속 버퍼링이 걸리곤 했다. 전화가 끊긴 뒤 몰려오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시간들이 떠오른 작품이다.
드라마 <무빙>
원래 판타지 장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무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특히 배우들의 열연이 눈에 띄었다. 순수한 극적 재미가
[LIST] 주종혁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