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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에이코는 전천후 뮤지션이다. 그 자신이 수십장의 앨범을 발매한 음악가이자 드러머이고, 호시노 겐이나 마에노 겐타 등의 뮤지션이 음반 작업과 라이브 무대 모두에서 키보디스트나 플루티스트로 적극 기용하는 연주자이기도 하다. 이시바시 에이코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드라이브 마이 카>로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와 무성영화 형식의 라이브 공연 <GIFT>를 기획 중이던 그는 어느 날 동일 영상을 활용한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각본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잘됐다!”를 외치며 영화를 위한 몇곡을 추가로 만들어갔다. 현재 <GIFT>의 월드 투어 중인 이시바시 에이코와 <씨네21>이 화상으로 만나 나눈 단독 인터뷰를 전한다.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영화의 배경인 자연환경 답사를 위해 야마나시현이나 나가노현의 거주민들을 직접 소개해주었다고. 해당 지역의 이미지가 스코어를 작업하는 데 영향을
[인터뷰] 관객이 사고하도록 돕는 영화음악,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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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마이 카>로 프로덕션의 규모와 만듦새, 기획력에 있어 점차 완연한 경지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음악가의 요청에 부응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것, 동시에 계획에 없던 소품을 만들어나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번 영화를 작업하면서 음악의 성질을 우선시했음을 밝히는 데 주저가 없다. 만약 음악이 가진, 우리 안에 내재된 기능을 즉각적으로 끌어올리는 힘에 동의한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 감독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자질과 직관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고한 연기 연출법에 근거해 대화의 작가로 자주 명명되었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장소와 풍경의 시적인 역량을 몽타주화할 수 있는 연출자임도 알맞은 시점에 귀띔해준다.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일본 동북부 지역을 살핀 그의 다큐멘터리(<파도의 소리> <파도의 목소리–게센누마편> &l
[인터뷰] 균형의 조정,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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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위 도중 트랜스 상태에 빠진 오토의 입 밖으로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가후쿠는 아내인 오토와 몸을 맞대며 최면에 걸린 듯한 그녀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그러나 그녀가 일상으로 돌아오면 전혀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를 듣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첫 장면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다루는 신체의 성질을 예시한다. 피부가 맞닿는 지점에서 몸은 내 것이 아닌 외부의 자극에 일시적으로 노출된다. 무의식 상태에서 출처 모를 이야기를 구술하는 오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 다음 날이면 여덟 살 아이의 인격을 드러내곤 했다는 미사키 엄마의 몸이 증언하듯 하마구치는 한 사람의 신체에 타인의 흔적이 겹쳐지는 이중화된 형상을 주시한다. <천국은 아직 멀어>에선 주인공 유조의 몸에 죽은 여고생 유령이 빙의되고, <우연과 상상>의 3부에서 나츠코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처음 만난 인물을 고등학교 동창으로 오해한다. 하마구치의 영화에서 (<아사코>의 두 주인공이
[비평] 감염과 면역의 몽타주 작가로서의 하마구치 류스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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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첫선을 보였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3월27일 일본보다 먼저 한국 극장가에 상륙한다.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 등으로 차세대 일본영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함께 작업한 음악가 이시바시 에이코로부터 라이브 퍼포먼스용 비디오아트 제작을 의뢰받아 나가노현의 깊은 숲속 마을을 탐구했다. 홀로 딸을 키우며 산골 마을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주인공 타쿠미는 중편 연출 경험이 있는 영화 스탭 오미카 히토시가 맡았다. <씨네21> 창간 29주년 기념 특별호 커버 인터뷰로 한국 개봉을 맞이해 단독 인터뷰에 응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세 주역을 만나보길 바란다. 장면만큼 두드러지는 선율과 침묵의 단초를 제공한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 대치하는 대화와 도끼질 사이에서 숲을 횡단하는
[커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만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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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좀 닫아줄래? 우리 학교는 4년에 한번, 4월9일 이후 첫 번째 수요일, 전교생이 게임을 하나 해. 투표용지야, 받아둬. 강제성은 없어. 설명, 이어갈게. 어느 반으로 갈지 선택하면 그에 따라 각자 등급이 정해져. 첫째, 우리 반이 아니면 F등급이야. 우리 반 말고도 여러 반이 있고 수업을 쨀 수도 있는 건데 이게 모두 같냐고? 응, 뭐든 우리에겐 1도 도움이 안돼. ‘다양성 존중’ 이러면서 놔두면 멀텅하게 지는 거야. “(이종섭 주호주대사 논란은) 공수처와 야당, 일부 언론이 결탁한 정치 공작.” “집에서 쉬는 것도 (기호) 2번을 찍는 것과 같다.” 높은 분들 입에서 이런 엮어치기, 갈라치기가 왜 나오겠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야. 적과 친구를 구별하지 않으면 학교생활 못해.
순순히 우리 반에 들어온 친구들은 일단 C등급. 실망한 눈치네. 평소 뭘 얼마나 했어? 투표 한번으로 상위 등급이 될 거라 기대했어? 맨입으론 못 주겠다, 몸값 올리고 싶다? 그럼 잠깐 ‘부동층’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피라미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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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을 보며, 이상했다. 영화는 시종 벨라(에마 스톤)를 화려하게 비추지만, 진짜 보여주려는 건 따로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뭔가가 더 있다는 묘한 기분. 영화의 숨겨진 이면을 보기 위해, 한 여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영화의 초반, 벨라의 사랑스러운 순수는 돋보인다. 그런데 벨라의 순수함을 좀 유심히 뜯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순수는 물들지 않은 공백의 상태. 그러니까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벨라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에게 없는 것은 과거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있는 자신만의 역사가 벨라에겐 없다. 그러므로 지식과 교양도 없다. 세상을 모른다. 이것은 <가여운 것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벨라는 좌충우돌하며 세상을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코미디와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표면에 드러난 벨라의 공백이다.
매력적인 몸을 가진 성녀, 벨라
하지만 그게 다인가?
[비평] 반복된 것이 본질에 가깝다, <가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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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미완성 희곡 <성스러운 창녀>(La Sainte Courtisane)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인이 여행을 떠난다. 그 미모가 눈부신 나머지 남자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황제의 딸이라 여기거나 여신이라 여기거나. 여인은 청금석 잔의 안쪽처럼 파란 하늘 아래 붉은 모래언덕 사이를 지나 동굴에 기거하는 수도자를 만난다. 수도자가 청한다. “나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가 7가지 죄악을 맛보게 해주시오.” 이어 묻는다. “당신은 왜 나를 유혹하오?” 여인이 답한다. “당신이 화려한 가면 속의 죄를 보고 수치스러운 옷 속에 있는 죽음을 보게 하려고요.” … 미완성작이어서 그 결말이나 주제는 모호하지만, <가여운 것들>을 본 이라면 ‘성스러운 창녀’ 벨라(에마 스톤)가 짙푸른 하늘 아래 알렉산드리아의 빈자들을 목도하거나 종종 동굴 같은 공간을 탐험하고 상대 남성을 시험에 들게 하는 등 젠더 위상과 관련한 설정들을 보며 분
[비평] 보편적인 압축성장, <가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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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끝나고 2주가 지나도록 내가 살던 이 집이 낯선 것은 다 냉장고 때문이다. 냉장고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3개월간 방치한, 한달가량 열어본 적도 없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기란 외장하드 속 촬영 소스를 확인하는 기분이랄까. 냉장고 안에 내가 뭘 넣어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서운 마음에 냉장고 문을 열 수가 없었고 생수병이며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며 식탁과 싱크대에 쌓여만 갔다. 더이상은 이 시한폭탄 같은 냉장고를 끌어안고 살 수는 없었다. 날을 잡고 냉장고 청소를 했다. 5리터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몇번이나 내다버리고 재활용 쓰레기봉투는 큰 봉지로 두개나 나왔다. 하루 종일 냉장고 속을 닦고 또 닦았다. 하얗게 빛나며 찬기를 내뿜는 텅 빈 냉장고 속을 보고 있자니 이번엔 이것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가 막막했다. 내가 뭘 먹고 살았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일단은 바나나 한 송이와 요구르트 한 묶음을 사다 넣어놨는데 그 사이 또 그대로 검게 시들고 유통기한이 지나버
[김세인의 데구루루] 쓰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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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그림
집에 그림을 그리는 화방이 따로 있다. 아크릴, 크레파스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게 재밌다. 아웃풋을 계속 내기 위해선 그만큼 인풋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전시도 최대한 많이 보러 다니려고 노력한다.
청소
일정이 없을 땐 대청소를 한다. 가만히 있는 걸 잘 못하는 편이다. (웃음) 빨래하고 건조기 돌리고, 창틀과 거울을 돌아가면서 닦고, 화장실 청소까지 마친 뒤 먼지 한톨 없는 집을 바라볼 때, 정말 만족스럽다.
운동
일주일에 운동을 6~7번 한다. 하루에 두번 할 때도 있는데 예를 들면 아침에 PT를 한 차례 받았는데 몸이 덜 풀렸다 싶으면 저녁 때 복싱을 하러 간다. 운동하고 샤워하고 침대에 눕는 그 순간의 행복이란.
영화 <파묘>
작품 자체가 재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좋아하
[LIST] 류다인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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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 로얄: 신분 상승의 사다리>
Apple TV+ | 10부작 / 연출 아베 실비아, 스테파니 랭, 테이트 테일러 / 출연 크리스틴 위그, 조시 루카스, 로라 던, 앨리슨 제니, 레슬리 비브 / 공개 3월20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솔직함과 천박함 사이에서
맥신(크리스틴 위그)은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여성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상류 클럽 ‘팜 로얄’의 여왕 자리를 꿈꿔왔다. 거짓말을 보태며 자신을 한껏 뽐내보지만 진짜 상류층들 눈에는 어림도 없다. 그러나 의기소침해질 그녀가 아니다. 특유의 넉살로 허영덩어리들과 가까워지는 데 성공한 맥신은 조금씩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간다.
<팜 로얄: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줄리엣 맥대니얼의 데뷔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겉과 속이 다른 상류층의 속물적인 면이 가감 없이 드러나며 발칙한 웃음을 자아낸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에 집착하는 인물들과 ‘시즌 여왕’이라는 설정은
[OTT 추천작] ‘팜 로얄: 신분 상승의 사다리’ ‘셜리 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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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 13부작 / 출연 요코시마 도시히사 / 목소리 출연 다무라 무쓰미, 야마지 가즈히로 / 공개 3월20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매드맥스> + <드래곤볼 Z>/2 + FPS게임, 한마디로 도리야마의 종합선물세트
샌드 랜드는 비도 내리지 않고 물도 말라버린 황무지다. 설상가상으로 국왕이 수원지를 점거해 물을 독점하고 있다. 샌드 랜드 북부를 지키는 보안관 라오는 남부에 샘이 있다는 흔적을 발견하고 트럭 한대를 이끌고 마물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물 왕자 베엘제붑과 그를 모시는 시종 시프는 반신반의하지만 라오의 여정에 함께한다. 셋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강도의 습격으로 타이어가 터지자 국왕의 전차를 강탈해 여정을 이어간다. 샌드 랜드의 대장군 제우가 여론전을 펼치며 셋에게 현상금을 건다. 현상금을 노리는 사막의 도둑 스위머즈로 인해 라오의 정체가 드러난다.
<샌드 랜드: 시리즈>는 지난 3월1일 별세한 일본의 전설적인
[OTT 리뷰] ‘샌드 랜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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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작별이다.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가 2024년 3월2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5살. 1969년 태어난 이우정 대표는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이은 명필름 대표와의 인연으로 명필름의 창립 작품인 <코르셋>(1996)의 제작부 막내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명필름에서 <접속>(1997), <조용한 가족>(1998), <공동경비구역 JSA>(2000), <YMCA 야구단>(2002), <광식이 동생 광태>(2005) 등을 거쳤고 제작부장과 제작실장, 프로듀서를 맡았다. <YMCA 야구단>은 그에게 제10회 춘사영화제에서 올해의 기획제작상(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공동 수상)을 안겼다. 심재명 대표는 “명필름이 커가면서 후배들에게도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선량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고인을 회상한다. 뿐만 아니라 “기획자로서의 역량도 대단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를 제작으로까지 잇는 데
[obituary] 부조리를 좌시하지 않은 기획자, 이우정 제작자(1969~2024) 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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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영화상영관 입장권 부과금(이하 영화관 부과금)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주요 재원인 영화발전기금 마련에 적신호가 켜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27일 열린 제23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어느 정부도 추진하지 못한 과감하고 획기적인 수준으로 국민과 기업에 부담을 주는 부담금을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서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내년부터 영화관람료에 징수하던 ‘그림자 조세’ 성격의 부과금을 폐지”하겠다고 공고했다. “내년 1월1일까지 관련 법 개정과 부과금 폐지를 목표”하겠다며 “부과금 폐지를 영화관람료 인하로 잇겠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국내에선 2007년부터 관객이 구매하는 영화관 티켓 가액의 3%가 영화관 부과금으로 거둬지고 있다. 영화관 부과금 폐지는 영진위가 진행하는 영화계 지원 사업에 큰 영향을 끼칠 예정이다. 영진위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부과금 수익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정부 영화관 부과금 폐지 발표, 영화발전기금 마련 적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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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생일 챙기는 게 머쓱해 종종 까먹곤 한다, 는 게 자발적 망각에 대한 현재 나의 공식 입장이다. 모래 더미에서 기어이 바늘을 찾겠다는 각오로 긍정 회로를 돌린 결과, 나이 먹어 편해진 것 중 하나는 주변에 이렇게 말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솔직해지자면 어릴 적부터 생일이란 피곤한 기념일로부터 도망쳐왔다. 이유야 복합적이지만 제일 큰 건 내가 소심한 외톨이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INFP라는 편리한 간판으로 한방에 설명 가능한데, 나는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렇게 안락한 자기 합리화 속에서 세계는 점점 좁아져갔다. 지금 와서 꼭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생일 파티 사진 한장 없는 앨범을 볼 땐 조금 쓸쓸한 게 사실이다.
요즘은 무리가 되어도 기념일을 꼭 챙긴다. 없는 기념일도 핑계처럼 만들어 주변에 선물을 한다. 그때 못 챙긴 한이 맺혀서 그런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기념
[송경원 편집장] 그래봤자 잡지 한권 그래서 더 소중한 잡지 한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