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고 있는 책들을 소개하라는 유명 잡지의 한 코너에 초대받았다. 명사들이나 어울릴 법한 자리에 나올 수 있어 감사했지만 어떤 책을 들고 나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근”과 “책”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었다. 활자가 넘치는 시대, 무엇이든 하루 종일 읽고 있지만 책이라는 매질로 한정하고 최근이라는 시간으로 제한하니 범주가 줄어들 듯해도 막상 그렇지가 않다. 게다가 이것저것 손대며 닥치는 대로 읽어내는 악습을 가진지라 몇권만 고르기엔 아쉬워진다. 그만큼 읽을거리가 풍요로운 세상을 사는 듯하다.
어릴 적 방학 때면 내려가서 며칠을 보내던 시골 할머니 댁은 읽을거리가 귀했다. 퀴퀴한 향이 가득했던 다락에는 해서체로 가득 찬 정체 모를 고문서들이 있었지만 한 글자도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또래가 없어 하루가 길던 나에게 별무소용이었다. 책상에는 사촌 형의 유물 같은 사전 몇권이 전부였기에 무료로 배달된 것이 분명한 농민 잡지를 몇번이고 읽으며 부모님이 언제 데리러 오려나 기다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부모님은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소년소녀문고 전집을 사서 책장을 채워주셨다. 귀한 책이 닳을까봐 하얀색 달력으로 책의 표지를 감싸고 제목까지 써주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끝까지 읽지도 않은 책들도 잔뜩 들어 있는 지금 나의 거대한 책장들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크기였지만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그때의 활자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재료였음을 이제야 느끼고 있다. 대형 서점을 갈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책들에 둘러싸여 행복해하지만 방문의 주기가 짧아지면 이마저 새롭지 않다. 이럴 때 독립서점에 들르면 또 다른 기운을 받을 수 있다. 구텐베르크 선생님의 노력에 디지털 기술이 결합되니 이제 1인 출판도 충분히 가능해져 논리적으로는 누구나 책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최근 힙지로의 독립서점에서 인디음반 같은 신기한 책들을 잔뜩 보고 시간을 보내며 다시 행복해졌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구색에 몇권이나 되냐는 질문을 하니 1천종이 넘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수급하냐고 물으니 작가가 직접 책을 들고 팔아달라 온다는 말에 “산지 직송”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원고지를 구겨가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 극히 일부가 신춘문예라는 등용문을 통과해야 주어지던 출판이라는 영예가 이제는 직장을 다니며 언젠가는 전업으로 글쓰기를 꿈꾸는 예비 작가들의 자비출판 시장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종의 다양성은 생태계의 건강함을 이루는 전제가 된다. 웹툰에서 웹소설을 거쳐 독립출판에 이르는 창작의 산지 직송이 더 굳건한 산업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더이상 사무실에 갇혀 영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 위의 글자에 담긴 생각을 파는 지식의 자영업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독립서점에서 한 아름 책을 사며 예비 작가들에게 조용한 응원을 힘차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