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죽어도 좋아>가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던 날, 상영관인 모악관에는 칸 비평가주간에 선정된 작품이라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해외 게스트들이 유독 많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국영화통’으로 불리는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상영관 앞자리에 착석해 영화를 관람했고 이 새롭고 진귀한 영화의 출현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에서는 프레스용 영문소개자료를 만들기 위한 토니 레인즈와 박진표 감독의 만남이 해외배급과 국내배급을 동시에 진행하게 될 미로비전의 아늑한 응접실에서 마련되었다. “어떻게 보았냐”라는 박진표 감독의 질문에 “좋았으니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고 응수하던 토니 레인즈는 <죽어도 좋아>가 자신이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있는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으로 첫인사를 대신했다.
토니 레인즈 아마도 당신을 외국에 소개하는 첫 자료가 될 테니 영화에 깊숙이 다가가기보다는 꽤나 기본적인 의문을 충족시키는 인터뷰가 될 거예요. 좀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우리 나중에 하자구요. (웃음) <죽어도 좋아>가 첫 작품인가요?
박진표 그렇죠. 영화로는요. 대학다닐 때 단편 2편 찍었던 것과 10년 동안 TV다큐멘터리 찍었던 걸 제외하면 첫 영화죠.
토니 레인즈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고 했는데 영화만드는 데 좋은 경험이 되었겠군요.
박진표 글쎄요. 개인적으로 좋았지만 커다란 영향을 끼쳤거나 하진 않았어요. 영화란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토니 레인즈 영화과를 나와서 바로 영화계에 입문하지 않고 TV쪽으로 간 건 조금 의외네요.
박진표 나름대로 선택의 기로에 서긴 했지만, 그때 당시엔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송사에 입사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10년 동안 TV다큐멘터를 만들면서 수없이 많은 주제들과 사람들을 다루어야 했거든요. 쉴새없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하는 그곳에서 끊임없이 대상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았던 것이 극영화를 할 수 있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던 게 아닐까요?
토니 레인즈 영화에 출연하는 두 주인공과는 이미 TV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던 걸로 압니다. 그 작업과 영화작업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박진표 연관성요? 음… 애초에 영화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내가 할 수 있는 영화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러다 외로운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이란 3부작 TV다큐멘터리를 하게 되었죠. 총 7, 8쌍 정도의 노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엔 노인들의 욕망이란 것에 대해, 즉 사랑이나 성적 욕구들을 터부시하고 추하게 느끼는 사회적 통념이 자리잡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사랑이 없을까? 혼자 사는 데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의문들이 강하게 들었어요. 하지만 TV의 한계상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고 결국 영화를 하자고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토니 레인즈 7, 8쌍을 찍었다고 했는데 그중에 유독 이분들을 영화에서 선택한 이유라도 있나요.
박진표 당연히 이 사랑이 특별했기 때문이죠. 할아버지 할머니의 캐릭터라든지 그분들이 살아왔던 모습들,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고 내가 생각했던 주제와 일치했구요.
가족과 과거를 벗어난 절박한 사랑
토니 레인즈 영화를 보면 두 주인공의 과거라든지 가족이라든지 개인적인 디테일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듯해요. 그리고 현재의 감정적인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추죠. 이런 선택을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박진표 외롭게 살다가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사랑이란 말이죠. 이들의 격정적이고 배려해주는 모습 속에 이 세상 모든 사랑이 담겨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멈춰버렸으면 좋을 이 순간만을, 절대사랑의 순간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만약 역사나 가족이나 과거의 관계들이 보여진다면 이들의 사랑이 훼손될 여지가 많았던 거죠. 그저 이 사랑 자체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애타는 절박함을 담을 수 있도록.
토니 레인즈 할머니가 잠깐 친구 만나고 왔는데 할아버지가 기다림에 지쳐 화를 내던 그 장면이 바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하는 그들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드라마적 장치가 아니었나요.
박진표 맞는 말씀이에요. 할머니가 ‘잠깐 나갔다 올게요’라고 한 그 몇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옛날 부인이 죽고 이 할머니를 만나기까지 가졌던 그 외로운 공간과 시간과 느낌을 다시 체험하는 거죠. 그 공포스럽고 두렵운 감정과 동시에 혹시 내 사랑을, 차마 도망갔을 거란 생각은 못하고, 누가 업어갔을까, 잡아갔을까, 하는 유치한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말 그대로 만감이 들어 있는 장면이에요.
토니 레인즈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가봐요.
박진표 크랭크인하기 3달 전에 두분이서 친구들하고 단체관광을 가셨는데 할머니가 옆방에 잠깐 놀러간 사이 할아버지가 찾아 헤맨 사건이 있었다는 걸 자료조사 때 듣게 되었어요. 결국 장소만 달라졌지 본인들에게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구요.
토니 그런가요? 전 정말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인 줄 알았어요.
박진표 음… 기쁘네요. 사실 연출이 안 보인다든지, 연출을 안 한 게 아니냐, 카메라 뻗쳐놓고 기다린 게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 감독으로서 뿌듯해요. 쾌감을 느끼죠. 영화란 설명이 필요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니까. 개인적으로 감독이 보이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구요. 실제로 연출되지 않은 장면은 ‘노래자랑’ 장면뿐이에요. 그 신은 과거에 다큐를 찍을 때 포착한 실제장면이죠. 신의 앞뒤 장면만 연결해서 연출해 찍었어요. 사실 그 장면 때문에 이 영화 전체가 기획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강렬한 장면이었어요. 왜 노래자랑에 나가서 할머니가 마이크잡고 “사랑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거다. 밥먹고 그것만 연구해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만 연구하라”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를 실제상황에서 들었을 때 아, 저들의 사랑도 젊은이들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죠.
토니 레인즈 진실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작품이다보니 영화를 보면 현실과 너무나 가까워서 과연 시나리오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거든요. 얼마나 문서화해서 작업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박진표 어차피 편집과정에서 드러내자는 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전체를 꿰는 게 아니라 신바이신으로 70% 정도 대사가 들어 있는 시나리오가 있어요. 그것은 자료조사 차원에서 찍었던 다큐멘터리 속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도 있고 제가 만든 것도 있고, 현장 느낌을 살려 추가된 것도 있지요. 20, 30% 정도가 그분들 생활에서 나오는 실제 애드리브였어요. 예를 들어 ‘할아버지, 일어나셔서 바지 입고 할머니 한번 보시고 나가시면 돼요’라고 지시하면 할아버지는 한두번의 디테일을 더 주신단 말이죠. 이불을 덮어준다든지…. 이런 할아버지의 자상한 마음이 연기로 표현되었고 그런 면에서 실제인물들이 연기하는 어드밴티지를 많이 얻은 것 같습니다.
토니 레인즈 이들의 성생활을 포함시키자는 건 처음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박진표 물론 제가 그랬죠. (웃음)
토니 레인즈 어려웠겠네요.
박진표 물론 어렵고 어색했지만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던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었죠. 이분들의 삶에 섹스란 즉 살아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어요. 그것이 단지 발기된 상태의 성기가 드러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일상들처럼 살아 있다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가 섹스라고 생각했고 그건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분들을 때려서, 강제로 찍었던 것이 아닌 이상은 설득이 어려웠느냐, 설득은 어떻게 했느냐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분들을 어떻게 만나고 또한 어떻게 컨트롤했는가가 과연 중요할까요? 영화는 영화 자체로 존재하는 건데 왜 궁금하지 하는 식의 의문 말이죠. 이말 역시 별로 중요한 말은 아니지만…. 그런데… 제가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토니 레인즈 물론이죠.
박진표 그 약 7분간의 섹스장면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토니 레인즈 부러웠어요. (웃음)
박진표 그 장면이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섹스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한컷이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찍었느냐, 왜 그렇게 길게 갔느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아요. 저한테는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고민됐던 장면이었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포장하지 말자 솔직함만이 그 사람들의 삶을, 사랑의 순간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에 앵글을 예쁘게 간다거나 음악을 깐다거나 조명을 어떻게 한다는 식의 장치가 더해진다면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늙고 추레하고 건조한 데서 드러나는 솔직한 아름다움이 훼손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사랑장면에는 젊은이들의 사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배려가 있거든요. 준비가 될 때까지 서로 기다려준다든지 하는 것들요. 젊은이들에게 보고 배워라 하는 구체적인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성기노출보다 그들의 사랑이 크게 보이더라
토니 레인즈 좀 민감한 이야기를 하자면, 영화제 외에는 일반 개봉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만들었을 것 같아요. 심의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나요.
박진표 먼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가 궁금한데요.
토니 레인즈 한국에서는 영화에서 성기노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에요.
박진표 글쎄요. 저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의 영화정책에 반기를 들겠다거나, 한국에서 금기시돼오던 소재를 다룸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겠다는 식의 의도는 추호도 없었어요. 그냥 이 영화를 만들다보니 성기노출이나 오럴섹스가 나오는 클로즈업이 정말 필요했거든요. 필요하지 않았으면 집어넣지도 않았을 거구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분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런 장면들이 상영할 수 없는 이유로 작용한다면 양보할 생각은 없어요. 그저 나에게는 그런 논란이나 제지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굉장한 부담이고 혼란스러운 일이에요.
토니 레인즈 그래도 조금은 예상하지 않았나요.
박진표 예. 솔직히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를 본 관객 중 대부분은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분들의 사랑으로 느끼지 성기노출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거죠.
토니 레인즈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는 건, 내가 장선우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 <장선우 변주곡>을 만들었을 때의 시기가 <거짓말>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장 감독도 그 영화를 누군가를 자극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고 관객 역시 그렇게 받아들였지만 등급위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박진표 저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고 읽는 사람이 있다고 보는데 영화는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 영화의 경계가 다큐멘터리나 극영화냐는 것의 구분조차 읽는 사람의 것이고 그게 어디에 귀속되든지 관객에게 불필요한 거거든요. 만약에 등급을 못 받는다 해도 언젠가는 받을 날이 오겠죠. 저는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있어요.
토니 레인즈 진심으로 잘되길 빌어요.
박진표 영화에 대한 촌평을 하신다면 어떠세요. 보셨나요, 읽으셨나요?
토니 레인즈 그 중간쯤이었던 것 같네요. 금방도 이 영화에 대한 리뷰 하나를 썼는데 단순하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했어요. 가끔 어떤 영화는 제발 나를 분석해다오 외치는 영화들이 있는데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에게 보게 만들지 읽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아요. 또한 아까 말씀한 대로 감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성공하신 것 같고 그 강한 캐릭터들을 표현해낸 것이 놀라웠어요.
박진표 다른 나라에서도 보편성을 띠고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하시나요?
토니 레인즈 당연하죠. 물론이에요. 어떤 사회든지 노인들의 삶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잖아요. 노인들에 대한 편견이나 나이든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는 문화가 있죠. 그런 면에서 상당히 도전적인 영화라고 봐요. 그나저나 두분이, 즉 할머니 할아버지가 완성된 영화를 보셨나요?
박진표 그럼요, 영화에 표현된 모든 것에 대단히 흡족해하세요. 모르죠. 사랑은 가끔 깨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현재까지는 자신들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된 데 대해 만족해하고 행복해하시던 걸요. 정리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70대의 사랑 담은 박진표 감독의 다큐멘터리 <죽어도 좋아>
▶ <죽어도 좋아>는 어떤 영화?
▶ <꽃섬>의 감독 송일곤, <죽어도 좋아>의 경이로운 힘에 감탄하다
▶ 토니 레인즈,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를 인터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