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문연구원 우주탐사그룹 선임연구원. 영화 속 혜성 충돌은 오늘날 우리 인류가 맞닥뜨린, 그러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전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문제들로 치환해볼 수 있다. 위기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대처하는 자세는 비슷할 것 같다.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돈 룩 업>을 봤다. 영화를 먼저 본 지인들은 내게 구체적인 힌트는 주지 않고 추천만 했다. 재밌는데 무섭다고 했다. 과학자와 정치가가 등장한다는 말에, 그거 참 재밌겠다 싶어 무선 이어폰을 끼고 개수대 맞은편에 태블릿을 올려두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고무장갑을 꼈다.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해치우는 동안 가볍게 영화나 보며 집안일의 지겨움을 쫓을 요량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찻주전자에 물이 끓는 휘파람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공포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찰나, 뜨거운 차 한잔과 간식을 들고 모니터 앞에 앉아 음악으로 지루함을 쫓으며 관측을 시작하는 천문학자가 보였다. 아니구나. 곧이어 기이한 소리가 또 등장했다. 얼핏 텅 빈 공장처럼 보이기도 하는, 금속성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거대한 망원경 위로 하늘로 난 창이 쿠구궁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낮은 목소리로 랩 비슷한 것을 읊조리는 주인공과 오르골 소리를 연상시키는 배경음악. 지인의 ‘무섭다’는 평가가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천문대에서 무슨 범죄가 일어나는 공포물인가?
민디 교수의 사실적 재현
다행히 곧 분위기가 바뀌었다. 영화가 시작한 지 3분도 지나지 않아 주인공은 뜻하지 않게 혜성을 발견했고, 나는 완전히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무장갑을 벗고 태블릿을 옮겨 식탁에 앉았다. 그러고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2시간20여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지구에 접근하는 혜성만큼이나 영화는 빠르게 전개되었고, 지독하리만치 신랄한 풍자와 울다가도 웃기는 블랙 유머를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며, 영화 속 음악의 리듬이 나의 심장 박동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이지 훌륭했다. 작은 화면으로 봐서 그랬는지 몰라도,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다 말문이 막히는 지도교수를 연기한 배우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아챘다. 대학원생이 발견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다 말문이 막히고, 미항공우주국(NASA)에 보고하자 하와이의 천문대에서 곧장 백악관으로 소환당하고, 대통령 알현을 기다리던 중 무료 스낵에 값을 치르는 사기를 당할 때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내가 사람 얼굴을 알아보는 데 영 젬병이긴 하다. 그러나 <돈 룩 업> 속 민디 교수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나 <타이타닉>의 잭보다는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 속 물리학자 레너드와 닮았다. 설마 일부러 저런 건 아니겠지 싶은 헤어스타일과 어두운 색의 뿔테 안경. 옷장 속 셔츠를 매일 하나씩 새로 꺼내 입어도 늘 비슷해 보일 것 같은 옷차림, 조금 굽은 등을 상보하려는 듯 자꾸만 앞으로 나오는 목과 집중할 때 생기는 주름진 미간. 평소에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구시렁대듯 말하지만 과학적 사실을 설명할 때는 어느 한 단어도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부자연스러워지는 호흡. 아, 나는 분명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수없이 많은 민디 박사로 가득한 학회장에 간 적이 있다. 몇 시간 뒤 학회장에서 마주칠 게 분명해 보이는 민디 박사들은 공항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 디카프리오를 금세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그는 민디 박사 그 자체로 보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영화 속 모든 배우들, 예쁘려고 애쓰지 않고 작중 인물 그 자체가 되어버린 연기자들이 보여주는 모든 장면이 끊임없이 감탄을 자아냈다.
영화는 곧 지구에 충돌할 위협적인 혜성과 그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 그 속의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그리 낯설지 않은 소재다. <아마겟돈>에서는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소행성을 찾아가 냅다 두 동강내버림으로써 충돌을 막고, <딥 임팩트>에서는 충돌 직전의 혜성을 폭파시켜 피해를 최소화하려 애쓴다. 이들 영화에서 감명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NASA는 지구 근처의 작은 천체에 인위적 충격을 가해 궤도를 바꾸는 다트(DART)라는 우주 실험을 올가을로 예정하고 있다. 물론 영화와 달리 사람은 탑승하지 않는다.
<아마겟돈>이나 <딥 임팩트>에 의하면 미국은 인류가 적어도 공룡과 같은 운명은 피하게 해줄 과학 기술, 그걸 단시간에 실현할 자본과 설비, 그리고 인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영웅까지 다 가진 듯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영웅들을 믿고 따르는 한편, 약자를 배려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돌본다. 소천체 충돌의 교과서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과학적 묘사도 신중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이전의 영화들에 비해 <돈 룩 업>은 천체 충돌 사건을 과학적으로 깊이 다루지 않는다. 대신 조금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이고, 당장 오늘이라도 실제로 일어날 것 같아 웃기고 두려운 이야기를 전한다. 공포물로 오해했던 영화 초반의 2분 남짓이 실제로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인류 멸망까지 남은 시간이 6개월14일뿐이더라도 연이어 닥칠 정치적 사건이 더 중요한 대통령, 과학계 소식은 껍데기만 다루거나 논란을 만들어 가십으로 이용하는 언론, 과학자의 엄중한 경고보다 연예계 소식이나 자극적인 밈에 더 집중하는 SNS 속 여론. 과학자는 물론 대통령도 손에 넣고 흔들어대는 기업가. 영화는 내내 이런 것들에 집중한다. 감독이 제대로 다루고 싶은 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이라는 듯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최근 몇년간 지구에 소행성이 충돌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를 두고 수많은 학자들이 계산에 계산을 거듭한 바 있다. 2029년 소행성 아포피스가 지구 아주 가까운 지점을 지나갈 예정이어서다. 다행히 충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돈 룩 업>이 비현실적인 가상의 시나리오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 속 혜성 충돌은 오늘날 우리 인류가 맞닥뜨린, 그러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전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문제들로 치환해볼 수 있다. 지구온난화, 기후 위기, 환경 파괴…. 위기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대처하는 자세는 비슷할 것 같다.
문제를 파악한 과학자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제대로 가닿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엉뚱한 방향으로 재생산하며 닥치는 대로 조롱하고, 정치권은 위협을 실감하는 대신 여론과 표심에만 집중하고, 대번에 문제를 파악해낸 기업가는 그 정보마저도 기회로 활용하고, 어떤 과학자는 그 ‘기회’의 편에 서기를 선택해서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 모든 에피소드가 마치 어제오늘 있었던 일처럼 실감난다. 내일은 어떨까? 한달 후에는? 일년 후에는?
영화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필요는 없다(‘돈 룩 업’)고 외치는 이들이 있듯이, 현실에도 이미 그런 이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고 ‘돈 룩 앳’을 주문처럼 외는 이들이. 누군가는 다시 한번 용기내 말해줘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말에 귀 기울여 들은 다음 더 크게 전파해야 한다. “이러다가는 다 죽어, 죽는단 말이야!” 그렇게 외치는 장면을 ‘짤’로 만드느라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망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