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단일한 존재로 묶어 논할 수 있을까. 여성 작가, 여성 서사, 여성 감독을 비롯, ‘여성’을 떼면 자동으로 남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에 속한 듯 가정되는 표현들이 있다. 문제는 ‘여성’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개별적 특성이 간과되며, 성별만으로 구획지을 수 있는 공통적 특색이 있다는 믿음을 소수자 혹은 약자 집단에 부여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는 데 있다.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결정, 삶, 선택이 아닌 여성적인 특성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수전 손택과 에밀리 브론테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말고는 비슷한 면을 찾기 힘들다.
평가절하되는 소수를 보다 가시화하기 위해 구분하는 표지를 붙이는 일과 그들의 작업을 정당한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은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문에서 학자의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백인 남성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캐서린 그랜트의 머리글에서 인용)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창작하는 여성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여성으로 겪는 차별을 간과하지 않고 발언해야 한다는 여성주의의 요구와 자신의 작업이 ‘여성적’인 것이라고 남성 중심적인 주류 사회(혹은 평단)에 한정지어질 위기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발표 50주년을 맞아 출간된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는 페미니즘 미술사 분야의 고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주류 예술사가 놓치는 것들 전반에 대한,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담고 있다. 위대한 예술이 제작되기까지의 ‘조건’은 좀처럼 말해지지 않고 천재성을 칭송하는 전설만이 확대 재생산된다. 린다 노클린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 피카소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되, 그가 여성이었다 해도 피카소가 될 수 있었겠느냐고. 특히 미술계의 여성들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누드 크로키를 배울 기회를 받지 못했다(이 책에는 여성들이 인체 수업 시간에 남성 누드 대신 암소를 제공받아 그리는 사진이 실려 있다). 19세기 영국의 화가 에밀리 메리 오즈번이 그린 그림의 제목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는> 자체가 과거 예술계 여성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