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첫 시리즈 연출작 <지옥>이 11월19일 공개됐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 작가가 제작한 동명의 웹툰을 바탕으로 한 6부작 시리즈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지옥>의 전 회차를 모두 본 송경원, 김현수 기자가 <지옥>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스포일러 없는’ 감상을 전한다.
김현수 기자
신이 인간을 벌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중세 시대 명화에서나 상상해서 그릴 법한 일들을 21세기 서울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온다. 천사가 나타나 누군가의 사망 일자를 고지하고, 그 날이 되면 지옥에서 괴물들이 그 사람을 갈기 갈기 찢고 태워 죽이는 상황이 매스컴을 타고 전 국민에게 생중계된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예언한 정체 모를 젊은이는 추앙받고 돈을 가진 자들은 이 재앙을 눈 앞에서 직접 보기 위해 거액을 투척한다.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상상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지옥>이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는 지점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는 풍경이 너무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아비규환의 모습은 인간이 인간을 해치기 시작할 때 분명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재난 상황을 종교 지도자,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 법조인, 언론인 등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극대화시킨다. 죽어서 죄를 지으면 가게 된다는 불구덩이 같은 그 상상 속 지옥이 현실에서 펼쳐지면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1부와 2부로 구분된 원작 웹툰의 구성은 전체 6부작으로 이뤄진 시리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신이 직접적으로 인간세상에 개입한 것 같은 기현상이 벌어지면서 기댈 곳을 찾게 되는 사람들의 어긋난 두려움이 맹신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공포심과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웹툰의 1부에 해당하는 1화부터 3화까지의 이야기이고, 2부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뒤틀려버린다. 4화에서 6화에 이르는 2부에 해당하는 이야기에서는 거대한 집단 시스템으로 성장한 신흥 종교 집단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어떻게 정보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조종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극중 등장하는 새진리회의 정진수 의장과 화살촉 무리들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법한 비극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정진수 의장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은 속을 알 수 없는 뒤틀린 카리스마의 면모를 훌륭하게 보여주며 이 작품에서 가장 이성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민혜진 변호사를 연기하는 김현주 배우는 그동안 많은 드라마에서 익히 봐왔던 정의로운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여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옥>을 본 모두가 김현주의 연기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송경원 기자
어느 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당신의 죽음을 고지하고, 약속된 시간이 되면 지옥의 사자가 찾아와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 후 새까맣게 불태워버린다. 이 설명 불가능한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지옥>은 판타지적인 세계관의 설정 놀이에 매달리는 작품이 아니다. 불가항력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 인간의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다. 첫 인상은 생각보다 무겁고 느리고 깊고 어둡다. 하지만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면 훨씬 묵직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당신을 빨아들인다.
<지옥>은 묵직하지만 마냥 철학적인 질문을 되새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들이 늘 그랬듯 전개는 간결하고, 감정은 정확하며, 필요한 장면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한다. 그 결과 지옥은 자극적인 볼거리와 깊이 있는 질문 사이 익숙한 이야기의 밸런스를 유지한다. 가볍게 보려면 장르물로 즐길 수 있고, 깊게 파고들면 원죄, 신념, 믿음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6부작 시리즈지만 매 에피소드 완결성이 있으며 구성적인 측면에서 영화적인 요소도 다분하다. 1부는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일단 상황이 세팅 되고 나면 생각보다 훨씬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4부부터 전혀 다른 주제가 펼쳐지는 것도 좋다.
새진리회가 시연(試演)이라고 부르는, 지옥사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과격하고 잔혹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장면들은 폭력적인 이미지를 과시하고 소비하는 방향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사실 현세에 재현된 지옥도의 압도적인 이미지는 이를 목격한 인간군상의 다양한 반응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리트머스지에 가깝다. 다시 말해 주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지옥>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대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해부하는 길을 택한다. 여기서 우리가 정확하게 목격하는 것은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들의 생생함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공포와 재난 상황 앞에 놓인 인간들의 리액션이다. 누군가는 저항하고 누군가는 망가지고 누군가는 믿음으로 도피하고 누군가는 사적복수심에 불탄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의 거울이자 압축이다.
과격한 묘사, 신과 죄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들,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까지, 이질적일 수 있는 요소들을 하나의 호흡 속에 묶어내는 건 결국 연상호 특유의 상상력과 독특한 세계관이다. 물론 곳곳에 아쉬운 지점들도 적지 않다. 특히 ‘화살촉’ BJ가 나오는 어색한 인터넷 방송은 흐름을 잘라먹는다. 전개과정에서 퉁 치고 어물쩍 넘어가는 허술한 부분도 자주 눈에 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도드라지는 장점이 아쉬운 지점을 효과적으로 가려주는, 대중적으로 제대로 조율된 이야기다. 과격한 묘사에 불편하거나 진이 빠지거나 혼란스러울 순 있어도 이 도발적인 상상력 앞에 지루할 틈은 없다.
무엇보다 박수를 보내고 싶은 건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 작가)이 오리지널리티에 집착하지 않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도를 심는데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창작가로서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오직 주어진 현상에 대한 리액션, 인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오락물로서의 재미 그 자체다. <지옥>은 호러, 스릴러, 디스토피아, 판타지 장르의 관습을 적극 차용하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 익숙한 것을 제대로 조합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요컨대 극적인 재미를 제공할 수 있다면 어떤 수단이든 적극 활용한다. <지옥>은 서브 컬처의 쾌감을 기반으로 창조된 세계다. 마이너한 감성의 메이저화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넷플릭스는 좋은 놀이터다. 여기서 감독의 의도 따윈 크게 중요치 않다. 창작자가 깔아준 판 위에서 각자의 해석과 감상이 난무할수록 세계는 풍성해진다. 끝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주변의 누군가와 자신의 견해를 나누고 싶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