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를 보고 <라쇼몽>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구성적인 특징에서 그렇다. 영화는 1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장(맷 데이먼)과 자크(애덤 드라이버)의 결투에 얽힌 사연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간다. 그러다 2장에서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이것이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사람의 관점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까지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를 포함한 세 인물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같은 사건이 두번 혹은 세번씩 반복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란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라쇼몽>식’ 영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된 지 오래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라쇼몽>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2장이 시작되는 순간 영화의 전개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어지는 세개의 챕터에서 상이한 진실이 나올 것을 예상하며 과연 누구의 말이 진짜인지 판가름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런데 <라스트 듀얼>이 <라쇼몽>식 영화들과 크게 다른 부분은 감독이 n개의 관점 중 무엇이 ‘진짜 진실’인지를 명백히 정해두고 이를 관객에게 알린다는 점이다. 리들리 스콧은 세 번째 챕터를 시작할 때 다른 글자들을 모두 지우고 ‘진실’(The Truth)이라는 글자만 화면에 남겨두며 이를 분명히 한다. 마치 이 이야기에서 진실에 관한 어떤 논란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리들리 스콧의 이 선택에서 의문이 생기는 지점은 그가 자신의 선택을 관객에게 알린 타이밍이다. 아직 이야기를 시작도 하기 전에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는 사람에게 주지시키는 것. 일종의 스포일러 같은 이 방식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TV 프로그램인 <신비한TV 서프라이즈>를 떠올리면 된다.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는 이유는 어떤 에피소드가 진실인지 그 정답을 이야기가 끝난 뒤에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비한TV 서프라이즈>나 <라쇼몽>식 영화가 주는 재미의 상당 부분은, 관객이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화면 속의 주어진 단서를 통해 조각을 맞춰나가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답을 공개하는 리들리 스콧의 이 선택은, 특히나 152분이라는 비교적 긴 상영시간을고려하면 의아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리들리 스콧은 왜 ‘진실’을 미리 알렸을까
감독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확정지음으로써 영화에서 약화시킨 것은 장르적 재미뿐만이 아니다. 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의미를 확정하지 않으며 무수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영화의 모호한 매력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타이밍의 문제가 아닌, ‘마르그리트의 관점만이 진실이다’라는 설정이 정해진 순간 이미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가능성을 지닌 영화의 매력’에 관해서는 최근 <씨네21> 지면에 실린 김병규 평론가의 글을 언급하고 싶다(<씨네21> 1324호, ‘<팜 스프링스>와 영화의 반복에 관한 짧은 단상’). 그는 ‘두개 이상의 오케이컷이 공존하는 영화의 역량과 그 매혹성’에 관해 얘기하며 몇 가지 예시를 제시했는데, 나는 같은 사건을 반복하며 각자가 옳다고(‘오케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n개의 시선을 보여주는 영화 또한 이에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해선 추가적인 부연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의 진실, 하나의 오케이컷만이 존재하는 영화를 여러 개의 오케이컷이 존재하는 영화와 비교했을 때, 특정 역량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들리 스콧이 그 모호함을 구태여 저버리면서까지 마르그리트의 진실만이 ‘오케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천명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얼까. 무엇보다 그는 어떤 것을 근거로 ‘오케이’를 선택한 것일까. 나아가서 (김병규 평론가가 같은 지면에서 언급하기도 한) ‘한 연출자가 자신의 영화에서 오케이컷과 엔지컷을 구분하는 직관의 근거’란 과연 무엇일까. 실은 그것이야말로 감독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고, 모든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아닌 역사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사에 있어선 오직 진실만이 오케이컷으로 선택받으며, 그 역사는 항상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승자의 말이 진실로 여겨지고 패자의 말은 거짓으로 치부되는 것. <라스트 듀얼>을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장과 자크가 벌인 결투 재판을 떠올릴 것이다. 말하자면 결투 재판이란 곧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라는 말이 실체화된 결과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들리 스콧이 마르그리트의 역사가 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선택은, 이 이야기에 있어서만큼은 여성이 승자인 것으로 기록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확실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라스트 듀얼>은 여성 인권에 관한 울림 있는 메시지를 내는 데 성공했으며, 감독의 초기작 <델마와 루이스>와 비견될 만한 성과를 낸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복되는 역사를 멈추기 위해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감독은 왜 구태여 <라쇼몽>식의 구성을 취하여 똑같은 이야기를 세번씩이나 반복한 것일까. 하나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 승리 서사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면 이 영화의 3장만으로도 충분히 한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3장의 각본을 쓴 사람과 1, 2장의 각본을 쓴 사람이 다르다. 그러니까 리들리 스콧이 한명의 각본가가 쓴 하나의 이야기 대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구성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종종 누군가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가, 훗날 내가 들었던 것과 다른 사실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실은 이랬다”라는 말과 함께. 이때 진실과 함께 거짓 이야기를 한번 더 듣게 될 때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거짓이다. <라스트 듀얼>로 예를 들자면, 이미 진실임을 인지한 상태로 3장을 볼 때 더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앞서 본 장과 자크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구린지이다. 진실과 다른 장면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거짓을 말한 자들의 얼굴은 초라해 보이고, 이를 보는 관객은 장과 자크처럼 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반복을 통해 반복되는 혐오의 역사를, 이 이상한 결투를, 야만의 시대를 멈추게 하려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을 따라 이 결투 재판은 다행히도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결투가 되었다. 자막에 의하면 더욱 다행인 것은, 마르그리트가 이 모든 사건이 끝난 다음에도 꽤 오랜 시간 행복한 삶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르그리트는 진정으로 행복했을까. 제2, 제3의 장과 자크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고통받지는 않았을까. 그로부터 몇백년이 지났음에도 세상에 여전히 ‘마지막’이 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