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독서의 계절인 이유는 독서를 하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라 다들 독서를 안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말도 살쪄야 하고 햅쌀이 나오니 나도 살쪄야 하고 날이 선선하니 나들이도 가야 하고 하여간 다들 바쁜데 말이에요.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부르는 유래를 찾아보니 농경 사회에서 추수 후의 여유 때문이라고도 하고, 온도와 습도가 적합해서라고도 하고, 가시광선이 독서에 적합해서라고도 하고, 줄어든 일조량으로 세로토닌의 분비가 줄어 마음이 가라앉아서라고도 한다. 하지만 정작 책이 많이 대출되거나 팔리는 시기는 한해를 시작하는 겨울과 피서를 가는 여름이라고들 하니, 이런 이유들은 일단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정해두고는 그다음에 붙인 이유가 아닐지.
그럼에도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만들어주는 게 있다면 가을의 스산함, 나뭇잎이 뚝뚝 떨어지고 거리에 똑같은 옷이 300개쯤 있어도 굳이 트렌치코트를 꺼내게 만드는, 잊었던 일도 뒤돌아보게 만드는 그 분위기일 테다. 그런 분위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나와 있게 한다. 함께 영화관을 가고 이어폰을 나눠 낄 수는 있어도 함께 한권의 책을 읽을 수는 없기에-강독 수업을 듣는 게 아닌 이상 독서는 내가 나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고, 또한 내가 나와 홀로 있을 때 그 사실을 슬프지도 허무하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해주는, 혹은 슬프거나 허무하더라도 그것을 애써 받아들이게 해주는 일이다. 삶을 충만히 살기 위해 내가 나를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에겐 독서의 이런 점이 무엇보다도 매력적일 것이다.
동시에 독서는 가장 깊숙이 다른 이를 만나는 일이다. 살면서 만나볼 일이 없는 사람, 이미 죽었거나 내가 만나기에는 너무 유명하거나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은둔하는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고, 살면서 들을 일이 없는 이야기, 과거나 미래,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 벌어진 사건이나 만들어지지 않은 시스템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독서를 하는 동안 나는 가본 적도 없는 남극에서 펭귄을 만나고 가볼 일도 없는 100년 뒤의 지구에서 먼지바람을 견디고 만날 일도 없는 옛사람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혹은 인간이란 원래 다 같이 모여서 외로워하는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각자 떨어지는 낙엽인 것도 같고 각자 갇혀 있는 코트인 것도 같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야만 누군가를 깊이 만날 수 있다는 역설, 그래서 독서는 가장 쓸쓸하고 가장 친밀한 이상한 일이 된다. 그 이상한 일을 하기에는 다 함께 쓸쓸한 가을만 한 때가 없다고, 가을은 아마도 그래서 독서의 계절인가보다라고, 멋대로 생각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