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을 찍어와라. 언젠가 어른이 되어 그 시절의 이야기를 돌아본다면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사진반 동아리 선생님이 내준 다소 당황스러운 여름방학 과제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중학교 1학년 같은 반 친구인 시연, 연우, 소정, 송희 네명의 소녀는 난감한 숙제를 받아들고 고민에 빠진다.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설사 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한 친구가 1호선 전철의 종착역인 신창역까지 가보자는 제안을 하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소녀들은 길을 떠난다.
외형만 보고 판단한다면 <종착역> 앞에는 성장 로드무비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녀들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짧은 여정 와중에 피어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보는 이를 흐뭇하게 만든다. 하지만 <종착역>이 익숙한 이야기와 친근한 상황을 담아내는 방식은 사뭇 새롭다. 길 위에서 계속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주인공이 이를 돌파한 뒤 성장하는 책 속의 서사와는 다르다.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이미 연우, 소정, 송희를 만난 시연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영화는 이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색한 시간을 지나 친구가 되는지 그 과정을 일일이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떨어진 물건을 줍는 걸 돕는 한 장면이면 충분하다. 진짜 일상에서 벌어지는 시간의 허리를 잘라 그대로 보여주는 것. <종착역> 전반에 깔려 있는 태도는 이와 같다.
<종착역>은 소녀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대신 정확한 프레임으로 매 장면을 한장의 스틸 사진처럼 정성스럽게 포착한다. 숏을 자잘하게 나누지 않고 카메라를 화면 한구석에 놓은 뒤 소녀들의 수다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연출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특히 실제 네명의 배우가 나눈 자연스러운 대화를 바탕으로 대사를 구성한 이 영화는 극적인 대화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어지는 말들, 비유하자면 덩어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건 이렇게 길이 딱 끊어진 거였는데.” “아쉽다. 근데 나쁘진 않아.” “야, 근데 저 버튼 한번 눌러보고 싶지 않냐?” 길가에 앉아 있는 강아지만 봐도 꺄르르 웃음이 터지는 소녀들의 맥락을 종잡기 힘든 대화를 듣고 있으면, 지나가면서 우연히 스쳐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경꾼이 된 기분이다.
권민표, 서한솔 감독은 단국대학교 영상콘텐츠대학원 졸업작품이기도 한 첫 장편영화에서 소신 있는 시도를 한다. 롱숏, 생생한 대사, 현장 녹음 등의 장치를 활용해 한자리에 서서 소녀들의 여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쪽을 택한 것이다. 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동동의 여름방학>(1984)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인물들이 사라진 뒤에도 잠시간 머물며 공간의 여백을 찍는다. 마치 스틸 사진 혹은 정물화 같은 프레임 위를 소녀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가득 메울 때 관객 역시 그 시절의 싱그러움에 흠뻑 젖어들 수 있다.
이것은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에 대한 답도 아니다. 신창역이 세상의 끝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안다. 소녀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납득 가능한 타당한 과정이라는 것을, 세상을 겪어보지 못한 어린 소녀들도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관문이다. 실현 불가능한 과제를 받아들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떤 창의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를 묻는 과정. 길 위에서 어떤 순간들을 발견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혹은 늙어갈 수 있을지)를 확인하는 시간. 앞으로 계속 부딪치게 될 통과의례. 끝인 줄 알고 달려갔는데 도착하고 나면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미션들. 삶은 그렇게 철로 위의 열차처럼 처음 만나는 역을 차례로 통과해간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는 <종착역>은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와 제23회 타이베이영화제 국제 신인감독 경쟁 부문에 오르며 전세계 영화인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CHECK POINT
공동연출로 완성한 싱그러운 데뷔작
<종착역>은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동기로 만난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공동연출작이다. “예전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에게 특강을 받은 적이 있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과 공동연출을 한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2017)의 제작 과정에 대한 수업을 받고 언젠가 공동연출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서한솔)
네 소녀의 생생한 연기
설시연, 배연우, 박소정, 한송희 네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의 상당 부분은 이들의 진짜 행동에서 출발했다. 오디션 후 따로 연기를 시키지 않고 여러 번 만나면서 진짜로 친해지도록 한 것이 비결이었다고.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활용해 생생한 것을 담아내고 싶었다.”(권민표)
<동동의 여름방학>부터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까지
<종착역>을 보면 연상되는 영화들이 꽤 많지만 실은 정확하게 어떤 작품을 직접 오마주한 것은 아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촬영이나 사운드,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두 감독은 “여러 영화들에서 받은 영감을 참고하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