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엔 감독의 <남색대문>(2002)은 정서적으로 한창 예민한 17살 세 청춘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그것이 첫사랑이든 짝사랑이 됐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잘 담아낸 청춘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요즘 제철인 아오리 사과가 떠올랐다. 초록색을 띠고 있어 시각적으로 여름과 잘 어울리는 과일이지만 사각거리는 식감과 풋풋한 향기를 갖고 있어 과일의 단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익숙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아오리 사과처럼 <남색대문>이 다른 청춘영화와 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아직 설익은 풋풋한 사과처럼 서툴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여고생 멍커로우가 첫사랑의 감정을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느끼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스하지 않아도 알고 있던 것
영화는 블랙 화면에서 “하나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라고 말하는 주인공 멍커로우(계륜미)의 목소리에서 시작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 계속해서 ‘안 보인다’고 말하는 그녀의 옆에는 단짝 친구 린위에전(양우림)이 있다. 두 사람은 운동장 한쪽에 앉아 미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중이다. 위에전은 결혼 생활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반면에 커로우는 미래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한 목소리에서 시작하는 이 한 장면이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녀의 혼란스러운 현재의 심정(위에전을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사랑한다는 감정)을 너무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감독은 왜 관객인 우리에게 미리 그녀의 심정을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영화의 초반, 위에전이 좋아하는 사람(장시하오)이 있다고 말하고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봐 달라고 말하자 “싫다”고 말하는 커로우의 마음도, 시하오의 얼굴 사진을 오려 커로우의 얼굴에 씌워주고 같이 춤출 때도, 마지못해 커로우가 위에전의 부탁으로 시하오에게 편지를 전해줄 때의 심정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 그녀의 감정을 우리가 미리 알게 됐다면 우리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행동이나 대화에서 아무런 의심이나 궁금증도 갖지 않고 단정적으로 그녀의 감정(동성애적 성향)을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섣불리 그녀의 감정을 보여주는 대신 의도적으로 조금씩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변화하는 그녀의 감정에 동참하게 한다.
영화에서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커로우가 체육관 2층 기둥 벽에 뭔가를 쓰는 장면일 것이다. 영화에는 이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녀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커로우는 위에전의 부탁으로 시하오에게 편지(‘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이 적힌)를 전한다. 그런데 그 편지가 학교 건물 바닥에 붙여져 공개되고 같은 학교 학생들이 다 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 편지의 발신인이 커로우로 적혀 있어 시하오는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 후 그녀는 위에전에게 “왜 내 이름을 썼냐”고 항의하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자 체육관으로 향한다. 그녀가 뭔가를 쓰고 있는 2개의 숏(쓰고 있는/벽에 등을 기댄)으로 나뉜 장면은 마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듯이 그녀가 기댄 벽과 그녀를 분할해서 보여준다. 이때 그녀가 쓴 글(‘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 아무것도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이 강조되어 보인다.
처음엔 이 글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팝송 제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혼자서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밝힐 때까지 더 기다려야 한다. 이후에 그녀가 뭔가를 쓰는 장면(그녀가 시하오에게 위에전을 소개해준 후)을 다시 보여주지만 그 내용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체육관’이란 공간이다. 이곳은 커로우가 시하오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한 장소이자, 두 사람이 첫 키스를 한 장소이고,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운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커로우가 자신의 감정을 글로 남긴 곳도 바로 체육관 2층 벽이었다. 그런데 감독은 왜 이런 중요한 장면을 체육관을 통해 보여준 것일까? 이는 오픈된 공간인 체육관이 학생이면 누구나 제약 없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1층과 2층으로 구분된 공간 구조로 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커로우는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 시하오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는 위에전이 좋아하는 남자다. 문제는 커로우도 그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시하오는 그녀와 헤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결단(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알게 되면 그가 더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하에)을 내린다. 그녀가 시하오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는 장면에서 그녀는 2층에, 그는 1층에 있다. 감독은 그녀가 커밍아웃(“난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할 때 체육관의 구조를 활용해 혼자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커로우의 비밀을 알게 된 시하오는 2층으로 올라와 그녀 곁에 앉는다. 커로우가 “남자와 키스할 수 있다면 레즈비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에 그녀에게 키스하고 “느낌이 어떠냐”고 묻는다. 하지만 커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우리는 커로우가 이 키스(레즈비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이 테스트를 위에전에게도 시도한다.
세 사람의 엇갈린 감정
영화의 후반, 영화의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위에전이 시하오와의 결혼 생활을 상상하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커로우는 위에전에게 기습 키스를 한다. 그런데 위에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커로우가 “위에전, 나…”라고 말하려는 순간 일어서서 뛰어간다. 위에전은 반 학생들과 농구를 하면서 옆에 있는 커로우를 피한다. 위에전도 커로우의 감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영화는 벽에 남겨진 커로우(“난 여자다. 난 남자를 좋아한다”)와 시하오(“장시하오, 2001년 내가 이곳에 있었다”), 두 사람의 글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앞서 두 사람의 대화 중에 시하오가 커로우에게 “나중에라도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나에게 제일 먼저 말해”달라는 장면에서 그녀의 감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란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정체성의 혼란을 시하오를 만나 조금은 위로받고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