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말을 하지만,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만큼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소년은 바다에서는 초록색 생물이고, 육지에서는 인간이다. 그는 바다에 살면서 육지 위의 세계를 동경한다. 루카 안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고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자식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엄마에게, 오래 살며 여러 꼴을 목격했던 그녀에게 자식의 호기심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는 미지의 세계를 투박하고 자극적인 용어들로 환원해 자식의 호기심을 잠재우려 한다. 괴물. 위험. 우리를 죽이러 오는 자들. 그럼에도 어린 소년은 이세계(異世界)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감추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 다양한 정체성을 품고 있고, 누군가는 당신의 여러 조각들 중 하나를 싫어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스스로를 적당히 감추고 사회에 녹아들기를 바라지만 마냥 숨길 수만은 없기에 아이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그렇다면 루카는 이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까. 그는 마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루카>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시작된다.
아이라서 가능한 즐거운 상상
그런데 이 영화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대면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먼저 루카는 육지에서 흘러들어온 물건들을 관찰한다. 그것은 물컵, 전축처럼 바다 속에서는 전혀 무용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는 물컵을 망원경처럼 눈에 갖다대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이 소년의 천진무구함은 ‘무용’과 ‘유용’ 같은 관념을 뛰어넘고,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사뿐히 관통한다. 그리고 루카는 알베르토(잭 딜런 그레이저)를 만나 자신에게 인간의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중력을 처음 느끼며 그 묵직한 압력에 짓눌리는 대신 그것에 몸을 맡긴다. “중력아 나를 받아줘!”(Take me, gravity!)를 외치며 바다로 풍덩 빠져드는 소년의 모습은 뭉클한 해방감을 안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가 이때 등장한다. 루카와 알베르토는 바다의 수면 위아래로 점핑하며, 인간과 바다 생물 사이의 모습을 장난스럽게 그리고 자유롭게 오간다.
이때 소년들은 두 가지 정체성 사이를 오가며 오로지 순수한 유희 속으로 빠져든다. 처음 루카가 바다 속에서 물 밖을 바라보며 ‘수면’(surface) 위로 고개를 내밀지 못해 끙끙대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수면은 루카의 꿈을 가로막는 투명하고 찐득한 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루카와 알베르토가 바다의 위아래로 점핑하며 노니는 장면에 이르러, 수면은 그들을 순식간에 다른 정체성으로 변신시키는 마법의 문으로 탈바꿈한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으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정체성의 간극 사이에서 순수하게 유희할 것. 그것이 <루카>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대면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은 루카의 상상이 펼쳐지는 장면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허무맹랑한 상상을 훔쳐보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의 상상이 변해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루카는 처음 ‘베스파’라는 스쿠터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을 타고 물 위를 달리는 상상을 한다.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즐거운 상상이다. 이 장면에서 구름은 하얗고 동그란 원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해, 달, 구름의 단순한 형태를 연상하게 한다. 루카가 무지한 아이의 시선에서 하늘을 상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상상 속 하늘은 알베르토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환상적인 멸치들로, 줄리아(엠머 버만)와 책을 보고 난 후에는 멋진 고리를 두른 토성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그의 세계가 아이 특유의 명랑한 환상에서 시작해, 점차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미지로 채워짐을 보게 된다. 그 과정은 새로운 친구들과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우리는 이것을 성장이라 부른다. 영화가 상영되는 90분 동안 루카는 엄마, 알베르토, 줄리아의 세계를 차례로 자신의 내부로 소화하며 왕성하게 성장해나간다.
생각하자면 자신의 정체성을 유희하고, 주변인으로부터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특권이다. 이것은 그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안전한 놀이터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는 성장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루카는 ‘포르토로소컵’ 대회에 참가하며 이런 순간을 맞이한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면
결정적인 순간은 비 오는 날에 찾아온다. 온 세상에 물이 내리는 날 말이다. 그전까지 루카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사고’에 해당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루카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결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는 비를 맞겠다고 응답한다. 과연 아이는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영화의 대답이 인상 깊다. 그에게 ‘괴물’이라는 말이 쏟아지는 순간, 줄리아의 아빠 마시모(마르코 바리첼리)는 아이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호명한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 ‘루카’이고 ‘알베르토’라는 대답. 그리고 ‘포르토로소컵의 우승자’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이 말들은 정체성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을 건네는 것 같다. 공포스럽고 추상적인 관념(괴물) 대신, 그들의 이름을 부를 것. 그들이 누구인지를 상기시키는 구체적인 이름을. 그리고 이 세계를 지탱하는 룰(Rule)과 그들이 성취해낸 것들(포르토로소컵 우승)을 기억할 것. 루카 할머니의 말대로 광장에 모인 사람 중 누군가는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하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룰을 견고하게 지키고, 구체적인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누군가는 자신의 터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이들의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루카의 외출을 눈감아주는 할머니와 아이들의 뒤에 서는 마시모 아저씨, 무심하게 룰을 일러주는 심판까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루카는 줄리아와 함께 학교로 간다. 아이들에게 환상의 여정을 선사하던 베스파는 이제 티켓으로 변해 루카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할 터다. 그리고 함께 유년기를 보내다 각자의 길을 선택한 두 소년이 헤어지는 순간, 영화에서 다시 한번 비가 내린다. 이 비는 대회 날에 내린 비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했던 아이들을 위해, 영화는 슬그머니 땅과 육지의 경계를 허문다. 이 순간만큼은 지극히 구별되던 바다와 육지도 서로 닮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된다. 마치 유년기의 지독한 성장통을 끝내고 각자의 길을 선택한 아이들을 축복하듯 말이다. 루카와 알베르토는 비를 맞으며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 순간은 <루카>가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영화적 마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