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있다. 겸손병이라고, 조금이라도 참여한 걸 나의 성과로 자랑해도 모자랄 마당에 자신이 도맡아 한 일마저 “어휴… 아니에요…” 따위의 말로 얼버무리는 병이다. 연봉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자기 PR을 충분히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병은 이미 많은 여성들에 의해 비토된 바가 있다. 물론 나도 이 겸손병을 비토하는 동시에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이다.
누구나 자신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의 성취를 했지? 어느 정도의 보수가 적합하지? 누가 정해준 답이 있는 게 아니니 대략적인 짐작을 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아무래도 평가에 있어 조금 보수적이다. 혼자 하는 일이 많아 호응에 대한 체감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구독자가 19만명일지라도 촬영은 카메라 앞에서 혼자 하니까. 코로나19로 대면 행사를 하기가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 괴리는 더 커졌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는 자신의 성과를 촘촘히 그러모아 자랑하고 있을까?
이런 고민은 때로 복합적인 감정을 동반한다. 나는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건가?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내가 만약 등단한 작가였다면? 내가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생각과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이 시시각각 교차한다. 겸손병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과 그럼에도 나를 부풀려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이 결투를 벌이고 있다. 다른 남성 유튜버와 함께 참여한 회의 자리에서 담당자들이 한 시간 동안 그 유튜버만 바라보면서 이야기할 때, 내 책을 읽은 독자가 유튜브에 찾아와 젊은 여성인 나를 발견하고 의외로 묵직한 글을 잘 쓰신다며 자신은 지성적인 여자가 좋다는 댓글을 쓸 때 나는 혼란에 빠진다.
동시에 이런 글을 쓰는 일이 내 글의 보편성을 저해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를 괴롭게 만든다. 여성 청년에 대한 글을 쓰면 페미니즘 글로 분류되고 남성 청년에 대한 글을 쓰면 ‘이 시대 청년들의 생각’이라는 수사가 붙는 사회에서 ‘보편’이라는 단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보편’을 재정의하는 수고가 동반된다. 겸손병에 공감하는, 더 나아가 이 글에 공감하는 사람의 수를 측정해야 할까? 몇 퍼센트가 동의하면 그걸 보편이라고 정당하게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그게 퍼센트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를 통해 미국에서 시를 쓰는 아시안 여성으로서의 분투, 소수자로서의 감정을 낱낱이 분해한다. 그 감정은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휘몰아치는 모순이다. 자신을 부정하면서 인정하고 싶어 하는 갈망이다. 자신을 주류에 맞추고 싶어 하면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다. 이 현기증 속에서 보편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욕심이 난다. 나는 겸손병을 극복하고 싶다. 우리의 보편성을 증명하고 싶다. 우리가 다 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김하나 작가의 글처럼, “우리에겐 아직 겸손할 권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