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죽었다. 직업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는 훈련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군인의 표정과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 사실을 직감한다. 이는 수년간 타지에서 가족과 떨어진 상태로 단체 생활을 했던 그가 보고 들은 수많은 사례를 통해 얻게 된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마르쿠스가 처음 겪는 일이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는 마르쿠스는 영화 초반부 아내에게 ‘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어기고 아내에게로 향하고, 그렇게 아내의 손을 만져보고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한 뒤에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같은 이야기를 겪고 있는 두 번째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은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아빠와 통화하고 있는 엄마의 표정만 보고도 아빠가 집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틸드(안드레아 하이크 가데버그)는 아빠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사고를 겪은 마틸드 역시 마르쿠스처럼 주어진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에 반응하는 모습에서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집으로 돌아온 마틸드의 첫 행동은 ‘엄마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메모하여 나열해보는 것이다. 정차 중인 화물 열차와 달리는 열차간의 충돌로 인해 열차 안에 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 일어났던 모든 정황과 선택들, 예컨대 ‘차가 고장 남’, ‘아빠가 오지 못한다고 전화함’ 같은 것들을 순서대로 메모지에 적어 피라미드 형태로 벽에 붙이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납득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하여,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인지 그 근원을 찾아보는 것이 마틸드가 슬픔을 극복하려는 방식이다.
그 메모의 가장 상단에 ‘자전거를 잃어버림’이 있다. 마틸드의 ‘피라미드’에 따르면, 자신이 자전거만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엄마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되돌아보면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의 오프닝은 독특하다. 영화는 덴마크에서 멀리 떨어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한 자전거 가게에서 시작된다. 한 소녀가 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파란 자전거가 갖고 싶다는 말을 하자, 그 이야기를 들은 점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장면이 바뀌면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다른 곳에서 파란 자전거가 누군가에 의하여 도난당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소녀의 작은 소원이 영화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의 시작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오프닝. 이 오프닝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것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명확해서, 이상하다.
사건의 진짜 원인을 찾는 불가능한 탐색
가장 눈에 띄는 특이점은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의 장르와 연결된다. 오프닝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명확함이, 다수의 복수 추리극들이 극 전개의 원동력으로 삼는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사건의 비밀을 활용하여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영화 속 인물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관객에게만 알려주어 관객을 완벽한 관찰자의 위치에 놓은 뒤, 등장인물들이 내놓는 예정된 오답들을 지켜보게 만든다.
장르적 재미가 배제된 이 영화에 그래도 나름의 볼거리가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예정된 오답’들이다. 우리는 마르쿠스를 비롯한 인물들의 추리가 엇나가는 것을 보며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퀴즈 게임을 보는 행위와 같다. 우리가 출연자의 오답 퍼레이드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이유가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정답을 알려주었기 때문인 것처럼,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의 명확한 오프닝은 관객을 영화에 몰입시키기보다는 한발 떨어진 채로 즐기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오프닝의 그 장면이 과연 모든 사건의 원인인 게 맞긴 한 걸까. 이러한 생각이 들 때 이 영화는 더이상 즐길 수 없는 것이 된다. 정확히 말해서 ‘파란 자전거를 갖고 싶다는 한 소녀의 작은 소원’은, 정말로 한 남자의 아내 혹은 소녀의 엄마를 죽게 한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일까. 혹은 마르쿠스가 만약 관객이 본 것을 봤다면, 그는 무너지지 않은 채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대답이다.
영화의 후반부, 마틸드는 통계학자 오토에게 자신의 피라미드를 보여주며 자전거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한다. 자전거가 있었다면 엄마가 자신을 태워다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차가 고장 나 열차를 타는 것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논리다. 그러나 오토는 모든 사건들엔 각각의 진행 과정, 즉 각각의 피라미드가 있다며 반박한다. 하나의 사건은 우리의 뇌가 헤아릴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 이유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장면도 있다. 사건을 겪으며 마르쿠스의 가족이 된 우크라이나인 보다시카는, 마르쿠스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며 자학을 한 다음 장면에서 우연에 관한 고향의 민담 하나를 얘기해준다. 스토리는 이렇다. 한 공주가 첫 보름달이 뜬 날 사냥을 나갔다가 반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을 곰에게 물어 뜯긴다. 그리고 10년 뒤, 공주는 다시 첫 보름달이 뜬 날 사냥을 나간다. 그리고 곰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 성공하여 배를 열어보지만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등장인물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이는 살면서 어떤 영화 같은 기막힌 우연을 믿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그렇게 딱 들어맞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속담일 것이다.
두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종합해보면, 오프닝의 그 명확함이 이상하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진다. ‘엄마의 죽음’이란 사건이 하나의 원인으로 비롯된 일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잃어버림’이란 사건 또한 오프닝에서 보여준 하나의 이유로 벌어진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이유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특정 결과가 실은 다 우연이라는 말을 하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인과관계를 의심하게 하는 이 영화가, 오프닝에서 우리에게 ‘소녀의 소원’이라는 원인을 보여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세상을 놓고, 내가 본 것에 대하여 각 장면들의 의미나 그것들을 배치한 순서의 의도를 헤아리며 글을 쓰는 것도 결국은 예정된 오답을 쏟아내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엔딩에 이르러 다시 한번 탈린의 소녀를 보여준다.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캐럴이 울리는 가운데 소녀는 마침내 원하던 자전거를 선물받는다. 그리고 선물을 받자마자 바로 그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모두 죽거나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파국적인 영화의 결말과 상반되는 평화로운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또 어떤 오답지를 내야 할까. ‘이상하다’가 그나마 각자의 감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영화의 메시지에 가까운 답인 것 같다. 남은 것은 이 소녀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자전거를,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눈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영화)을 대하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