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배경인 가장 유명한 픽션은 <크리스마스 캐럴>일 것이다. 욕심 많은 수전노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유령들을 만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돌아보고 개과천선한다는, 찰스 디킨스의 그 소설 말이다. 이장욱의 신작 소설 <캐럴> 역시 크리스마스이브가 배경이다. 솔직히 주인공 윤호연은 약간 재수가 없는 인물이다. 자기 스스로도 ‘재수 없다고? 알고 있다’라고 할 정도다. 그는 부유하고 지적이며 곧잘 타인을 조종한다.
무엇보다 그가 재수가 없는 이유는, 자신이 보통의 천박한 부자들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점이다.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 투자 자문 컨설팅 회사 대표인 윤호연은 한강이 보이는 74평 고급 아파트로 퇴근한다. 중후한 분위기의 거실에서 바흐의 평균율을 듣는 중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다짜고짜 “나는 댁의 아내 선우의 전 남친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나는 지금 자, 자살할지도 모릅니다”라며 협박한다. 윤호연이 “내 알 바 아니”라고 하자 수화기 너머 상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오늘, 주, 죽을지도 모릅니다. 믿어주십시오.”
<캐럴>은 바흐의 평균율처럼 문장이 반복되다가 변주된다. 윤호연에게 전화를 건 상대는 도현도라는 인물인데 그는 1999년에 산다. 20년을 사이로 이름도 상황도 다른 두 남자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읽다 보면 이 둘은 다른 시공간에 사는 도플갱어 같다. 현실적으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인물 사이에는 선우정이 있다. 윤호연과 도현도의 서사는 다른 시점으로 각장에서 서술되는데, 둘은 ‘박’이라는 친구, 선우정과 고양이 등을 함께 소유한다.
서로 교차되던 두 사람의 인생은 채권추심통지서를 통해 만난다. 도현도가 80억원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데 그 연대채무자 이름이 윤호연이다. 도대체 과거의 인간이 어떻게 미래의 빚을 대신 질 수 있을까. 캐럴이 음산하게 흐르는 어느 날 밤 주인공들은 낯선 골목을 헤맨다. 골목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캐럴>에서 중요한 것은 1999년이 2019년보다 20년 앞서 있다는, 모두가 아는 상식 따위가 아니다. 삶이 원래 그렇듯 나쁜 일은 예고도 없이 발생하고 두 사람이 겪는 불행의 징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가 정교하게 짜놓은 미로에 기꺼이 발을 들인다면 올해 이보다 더 지적인 독서 체험은 없을 것이다.
반복과 변주
그것은 윤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이어져 있다는 것. 그게 이 세계의 원리다. 고고한 개인이나 단독자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