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동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하필 그녀는 ‘국수’를 택했을까. 다른 식당에 갈 수도, 혹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단 한 차례, 그녀의 국수 먹기가 주저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후반부에서 진아(공승연)는 툭 끊긴 국수 가락을 삼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결말을 향한 도약을 진행한다. 가족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던 그녀가 작은 식당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관객은 이 지점에서 일상적 삶의 균형이 깨어진 것을 깨닫는다. 조금이라도 귀찮아질 여지가 있는 것은 모두 차단한 그녀였지만, 반복되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서 그간 이룩한 ‘혼자 살기의 법칙’은 뿌리까지 흔들린다.
내부의 평온함, 외부의 두려움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는 특이점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매일 걷는 복도의 끝에 위치한 그녀의 공간, 그녀가 머무는 방 안의 디자인이 특별하다. 의도적으로 거실을 배제한 채 주인공은 작은 방 안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온전히 혼자이며 평화롭다. 의도하지 않은 흔들림이 간혹 감지되지만 충분히 조정 가능하다. 예를 들어 케이블이 전파 방해를 받으면 차분하게 고쳐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흡사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지라도 원상 복구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처럼 갇힌 작은 방 안에서, 그녀는 매일 자신의 사회적인 가면을 다듬는다. 그렇게 다시 나아가는 외부의 세계, 영화는 그녀가 경험하는 세상을 총 3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첫 번째의 방해물은 ‘이웃’이다. 담배를 피우며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웃집 남자에게 대응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녀는 그에게 대꾸할 의무가 없으며, 그러니 그가 위협적일 이유도 없다. 때문에 간단히 그녀는 그를 무시해버린다. 이러한 방정식이 그녀의 일상을 지배한다. 이어서 두 번째로 ‘회사’가 등장한다. 카드사에서 진아는 고객대응팀의 직원으로 일한다. 고객과 회사의 연결 고리가 되는 역할이지만 그녀에게 이 직업은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고객이 아니라 직원 한명만 상대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응답해야 할 유일한 인물로 영화는 팀장을 소개한다. 그녀는 회사에서의 상사이며, 동시에 진아가 응답해야 하는 공적인 존재다. 그런 그녀의 요청으로 진아는 신입 사원 교육을 맡는다. 좀 귀찮긴 하지만 별일 아닐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가장 멀리 위치한 가상의 사회가 등장한다. 이 부분이 흥미롭다. 이 영화가 내놓는 ‘가정’이라는 테두리는 일반적인 모습과 다르다. 대다수 영화들이 개인을 둘러싼 가장 작은 집단으로 가족을 소개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은 정반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굳이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심지어 법적으로 유산 정리까지 마친 상태이기에 진아에게 아버지는 남남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매일 같이 그녀는 그를 들여다본다. 거실에 설치해둔 CCTV 화면을 통해 그녀는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몰래 관찰한다.
내부의 평온함과 반대로, 그녀를 둘러싼 외부 세계는 이렇듯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때문에 빛나는 평온함에 대립되는 어두움의 강도가 영화를 지배한다. 담배 피우던 이웃집 남자가 말을 걸까 짜증나고, 상사가 귀찮은 관계를 전가할까봐 걱정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현실이 된다. 만일 우리 삶에서 고통으로 찢어지는 순간이 존재한다면 그 순간은 다름 아닌 외부에서 도래하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이른다. 이를테면 혼자 점심을 먹으며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방해하는 신입 사원의 존재가 그렇다. 친근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새로운 이웃 사람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진아는 어머니의 죽음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웃 남자의 죽음에는 흔들리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그녀의 집 앞에 당도하는 순간, 진아는 깨닫는다. 자신이 겪은 사회의 외양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너무 달달해서 회피하고 있었던 인간 사이의 “사랑해”와 일상적인 “당신이 필요해” 사이의 연결 고리를, 그녀는 망각하고 지냈던 것 같다. 굳이 사랑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완전히 단절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사회를 둘러싼 무감각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그녀는 욕망과 정서의 충돌을 잊고 지냈다. 그래서 착각했다. 마치 증상이 없는 암에 걸린 환자처럼, 본인 마음의 상처를 괜찮다고 여겼다.
이 증상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영화가 제시하는 해답은 좀더 특별하다. 다시 처음의 이질감을 떠올린다. “하필 왜 국수인가?” 이 음식을 먹을 때는 ‘반찬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는 실질적인 장점이 있다. 그러니 진아는 국수를 먹으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볼 수 있고, 먹방 방송도 볼 수 있고, 심지어 아버지의 집도 여유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니 직접 의사소통하지 않고서도, 그녀는 아버지와 화해할 방안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아에게 남겨진 신기술을 통한 ‘외로움의 탈출 경로’를 이 영화의 국숫집은 매개해 보인다. 진아라는 캐릭터에서 시작된 작은 이야기가, 이렇듯 결말에 이르러 내놓은 해결책은 어찌 보면 끔찍할 정도로 기계적이다.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인물은 사랑받는 것이 어렵고 부차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국수를 먹는 동안은 슬픔과 증오의 감정을 잊을 수 있기에, 이 시간은 그녀에게 소중하다. 존재가 필연적으로 노출되는 위험한 세계에서, 이 가상의 시스템이 그녀를 보호한다. 어쩌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일상적인 안위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그러한 디지털의 방식을 이 이야기의 결말은 옹호하는 것 같다. 너무나도 재기발랄한 사고의 전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사랑’을 노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용납하는 세계
낭만적인 교류가 끊어진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용납하는 세계는 실제 우리의 삶과 몹시 비슷하다. 새롭게 표준화된 사회에서, 마음속의 감정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제 아예 사라지고 없는 듯 보인다. 생각해보면 회사를 떠난 진아가 누군가와 만나서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것을 상상하긴 어렵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그렇게 믿었다. 이 작품이 소개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본주의와의 관계가 히스테리화된 최고 수준의 도발을 선보인다고 말이다. 그녀는 혼자이며, 또한 혼자라서 완벽하다. 마치 컴퓨터처럼 고객을 응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직 디지털을 통해서만 소통하기를 희망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끝없이 펼쳐진 우리 모두의 현재 슬픔을 이 인물은 대변한다. 안전을 느끼고 싶어서 억압을 택한 우리의 슬픈 초상을 배우 공승연이 연기한다. 그녀가 짊어진 딱딱한 무감각의 시스템을 되돌아본다. 가상의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평범한 일상은 다소 혐오스럽지만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 있다. 이 영화가 말하는 가상을 통한 관계 유지 방식에 완전히 동의하긴 어렵지만 우리 사회의 일부를 수용하는 합리적인 방안임을 부정하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