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의 펀(프랜시스 맥도맨드)이 자동차에서 살기 전 머물렀던 곳은 엠파이어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주 수입원은 유에스집섬(USG)이라는 석고를 생산하는 회사다. 이 회사가 건축 재료인 석고보드를 생산한다라는 사실과, 주택건설 경기에 영향을 받아서 이 회사가 파산한 후 펀이 자동차에 살고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노매드랜드>가 ‘집’과 관련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펀이 살던 마을은 이제 폐허로 변해버렸다. 유에스집섬이 서브 프라임 금융 위기 속에서 파산하고, 이 회사가 수입의 전부였던 마을은 회사와 함께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우편번호마저 삭제되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과 함께했던 장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펀은, 밴에서 살면서 자신이 살던 지역을 맴돌고 있다.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환영 플래카드를 거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펀에게 장소는 기억과 동일하고, 장소를 떠난다는 것은 기억을 잊어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부, 펀의 밴은 집보다는 자동차에 더 가깝다. 펀이 차를 타고 화장실을 찾을 수 없는 황야를 지나가다 들판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잠자는 것을 제외한다면 펀의 밴은 여전히 이동을 위한 자동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펀은 집에서 하는 모든 활동, 먹고, 자고, 쉬고, 생리 현상을 처리하는 일을 차 안에서 한다. 펀이 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동시에 그녀의 밴이 점점 집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펀의 자동차가 집이 되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펀의 밴이 고장났을 때다. 정비소에선 고치는 대신 중고 밴을 구입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펀에게 충고한다. 하지만 펀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미 그녀에게 밴은 자동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펀은 자신의 삶이 새겨진 자동차(집)를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소모품처럼 처분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영화에서 펀은 세번에 걸쳐서 자동차 대신 집에서 살기를 권유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세번의 장면을 통해서 영화는 펀의 자동차가 점진적으로 집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는 우연히 만난 옛 이웃의 제안이다. 펀은 이 제안을 거절하며 자신은 ‘홈리스’가 아니라 ‘하우스리스’일 뿐이라고, 자신에게는 집 대신 밴이 있다고 소심하게 설명한다. 두 번째 제안은 고장난 밴의 수리비를 빌리기 위해 찾아간 언니에게서 받는다. 집을 투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언니 가족들의 태도에 실망한 때문인지, 아니면 밴이 이미 자신의 집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펀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캠핑카 공동체에서 만난,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러세언)를 찾아갔을 때다.
데이브가 머물고 있는 집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이 장면이 나왔을 때, 어쩌면 이 집 마당이 펀이 그리워하는 자신의 집 뒷마당 풍경을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펀은 데이브의 집을 불편해한다. 침실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펀은 집을 나와 자신의 밴에서 잠을 청한다. 같이 지내자는 데이브의 제안을 뒤로하고 펀은 자신이 살던 집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펀은 폐허가 된 마을을 둘러보다 마침내 자신의 집 뒷마당을 향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문을 연 이후의 풍경은 꽤 인상적이다. 나는 이 장면이 펀이 데이브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풍경이 영화의 결론을 말하는 특별한 경험을 주고 있다. 눈앞에 나타나는 자연은 데이브 집에서 보는 종류의 자연이 아니다. 데이브 집 주변이 길들여진 자연이라면, 펀의 집은 자연 그대로다. 마치 서부의 개척자들이 처음으로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보았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자연을 펀의 집 뒷마당은 갖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펀은 임대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자신의 물건들을 이웃에게 나눠준다. 이 행동을 펀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자신이 소유하고자 했던 것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펀이 자신의 과거를 뒤로하고 뒷마당이 연결된 더 넓은 곳으로 밴을 타고 떠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를 건축과 공간으로 보려는 태도 때문인지 나에게 <노매드랜드>는 집을 사용해서 서사를 만들어가는 영화로 읽혔다. <노매드랜드>가 그런 면에서도 잘 구축된 영화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미 서부의 대자연에서 펀이 느꼈을 감정을 서울의 극장 스크린으로는 공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공간과 장소에서 몸이 느끼는 감정은 영화 스크린에서는 쉽게 빠져나가버린다. 공간과 장소를 통해서 서사를 풀어내려는 시도들이 쉽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들, 트레일러하우스, 캠핑카가 샷건하우스와 비슷한 공간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샷건하우스란 미국의 건축 역사에서 흥미로운 주택 형식 중 하나로, 19세기 말 미국 남부 지역에서 저소득층의 거주 공간으로 많이 건설되었다. 3.5m 폭의 단층 주택으로, 앞에서부터 거실, 방, 방, 부엌이 일렬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현관에서 엽총을 쏘면 열린 문들을 통해 총알이 뒷마당으로 빠져나간다는 의미로, 또는 총구처럼 길게 관통하는 공간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샷건하우스’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형식의 주택이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제한된 땅에 경제적으로 많은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레일러하우스, 캠핑카는 샷건하우스와 마찬가지로 폭이 공간의 특징을 규정하는 형식이다. 집을 많이 건설하기 위해서든, 도로를 통해서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든, 아니면 도로에서 운전하기 위해서든 모두 어떤 제한 속에서 존재하는 주거 형식이다. 하지만 현대의 캠핑카 주거는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 다른 주거가 주지 못한 자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돌아다니는 자유를 자동차 주거가 줄 수 있다는 사실은, 펀의 마지막 결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펀이 자동차에서 사는 삶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집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땅에 정착하지 않는 삶, 즉 ‘자유’을 알아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방랑자>의 원제목은 <Sans Toit ni Loi>다. 지붕도 없이, 규범도 없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방랑자>의 주인공 모나(상드린 보네르)에게 ‘규범’이 없다면, <노매드랜드>의 펀은 정해진 규범에서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 <방랑자>에는 “완전한 자유는 완벽한 외로움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다르게 표현하면, 완벽한 외로움만이 완전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