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점이 ‘페미니스트가 아니한 자’를 찾는 채용 공고를 게시했다. 이 공고는 삭제되었지만, 이와 같은 차별은 끝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애써 분노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민원을 넣고,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는 뒤끝 나쁜 결과를 본다. 차별은 잘못이 아니라 ‘논란’으로 남고, 이 일을 잊기도 전에 다음 차별 사건이 또 발생한다. 또 분노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본다.
이래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찬바람을 맞다 몸싸움에 밀려났던 게 2017년이었던가? 2016년이었던가? 2007년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 인권이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깔고, 콘센트가 있는 기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던 것은 2018년이었나? 2019년이었나? 소위 보수개신교 언론의 카메라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은 유엔의 권고사항이라는 토론회를 열었던 건 언제였더라? ‘차별금지법 반대세력’에 막혀 건물에서 나가지 못했던 건 또 언제였던가? 5년 전? 10년 전? 매번 말하고 매번 다시 밀려났던 이 모든 자리들. 내가 있었던 날도 있고 당신이 있었던 날도 있었던 날들.
이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 사회는 그저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가 아니었다. 차별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학습한 나라가 되었다. 이 ‘배움’은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채용 공고부터 개인간의 연애까지, 곳곳에 혐오와 차별의 가지를 뻗었다. 사람을 차별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차별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다. 페미니즘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상이다. 인권 개념이 남용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원하는 직원을 채용할 자유를 박탈한다. 인권감수성은 무슨 말을 못하게 한다. 평등은 불공정하다. 채용 공고에서, 면접에서, 언론 보도에서, 시민 인터뷰에서, 온라인상의 수많은 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대화에서 이런 말들이 반복된다. 보이고 들린다.
차별금지법의 부재는 소수자의 인권을 그저 추상적으로 외면하는 상태가 아니다. 차별적인 말, 결정, 행동이 모두 ‘해도 되는 일’의 범주에 있고, 그 결과 구체적인 차별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상태다. 제도로 쉽게 저지할 수 있는 차별에 개인이 저항해야 한다. 화장 좀 하고 다니라는 말을 들은 개인이 ‘업무와 무관하니 안 하겠다’고 목소리 내어 싸우거나, 저렴한 화장품을 찾거나, 조용히 다른 일자리 공고를 들여다보는 선택지 사이에서 방황한다. 차별 발언을 들을 때마다 지적을 할지 참고 넘어갈지 매번 고민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차별받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한 개인이 평생, 일상 속에서 계속 싸워 관철할 수 있는 신념이 아니다. 사회가 세워 가져야 하는 기준이다. ‘논란’과 반복을 끝내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