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필름 위에 빛으로 새겨낸 역사의 한 페이지. <동주>의 성공 공식을 <자산어보>에서 다시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동주>를 시작으로 <박열> <변산>까지 이준익 감독의 연이은 작품들은 ‘청춘 3부작’이란 카테고리로 묶인다. <자산어보>도 그 명맥을 잇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은 왜 청춘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가? 특히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말이다. 이준익 감독이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본 청춘들이 스크린에 맺힐 때, 그것이 동시대 청춘들과 조우할 가능성이 열릴까?
이러한 질문은 <동주>부터 차곡차곡 쌓여 의문의 형태로 <자산어보>에 이른다. <동주>와 <박열>은 색상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방식을 추구한다. 정확히는 <박열>이 <동주>의 성공 공식을 답습한다. <동주>는 나머지 작품들에 비해 가장 탁월하다. 암흑 같은 일제강점기란 시대상을 그리는 데 있어 흑백필름의 사용은 영화에 확실한 명분을 제공한다. 흑백필름의 콘트라스트를 살려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을 수놓은 별 이미지. 그것이 영화가 표현하고 싶었던 하나의 청춘의 이미지다.
다른 하나는 청춘의 얼굴이다.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의 취조 장면을 교차편집하여 마치 하나의 얼굴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타까운 청춘의 초상을 그리려 한다. 이 몽타주 방식은 영화 속에서 시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이 집착하는 ‘시’를 이미지로 구현한 순간이다. 영화에서 시적인 순간은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선 이미지를 몽타주하는 과정에서 어떤 심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정의하겠다. 오히려 윤동주가 시를 읊을 때 등장하는 이미지는 시 내용에 부합하며 지나치게 친절해진다.
<박열>은 심지어 시와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의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동안 대중에게 덜 알려진 역사 속 실존했던 펑키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데 방점이 있다. 흑백이란 색감으로 톤 다운시켰던 이준익 감독 특유의 펑키함이 영화에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박열이란 인물을 소개하는 데 그친다. 또한 <동주>에서 청춘의 초상을 만든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박열(이제훈)과 후미코(최희서)의 일심동체의 형상은 <동주>에 비해 강렬하진 않다.
<박열>은 전작 <동주>에 비해 무게감을 덜어냈지만, 실존 인물을 다룬 전기영화로 가지는 카리스마로 인해 다시 무거워진다. 시작부터 충실한 고증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문구는 이 영화를 더 무겁게 만든다. 이 무게감으로 인해 두 영화에서 재현한 일제강점기에 저항했던 청춘들은 스크린에 묶인다. 무게감에 거리감까지 더해진 스크린은 일종의 제의적 효과까지 만들어낸다. 이들의 숭고함을 기억하고 기리는 효과는 있지만 동시대 청춘들의 고민과 조우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역사의 충실한 재현. 이것이 이준익 감독의 장점이다. 이 점 때문에 그의 영화들이 과대평가되는 측면도 있다. 그의 영화의 단점은 영화적 상상력의 부재다. <변산>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고 증명했다. 역사란 프리즘과 흑백이란 색감은 그간 단점을 덮었던 보정 필터에 가까웠다. 영화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동시대 청춘들의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데도 실패했다. 영화에 담긴 것은 감독 특유의 펑키함뿐이었다. <변산>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할당된 지면으로는 부족하기에 <자산어보>로 연결되는 지점만 이야기하겠다. 그것은 아버지와 고향이다. <동주>와 <박열>이 인물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변산>과 <자산어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 중심엔 아버지와 고향이 있다. 이 지점에서 동시대의 청춘들과 조우하는 문이 열린다. <변산>은 그 문을 철저히 걸어 잠근다. 학수(박정민)는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으로 고향 변산을 떠난 사람이다. 아버지가 심각한 병이 걸렸다고 해서 학수가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영화는 억지로 화해와 용서를 끌어낸다. 친구들까지 나서서 학수를 ‘후레자식’이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다시는 돌아오기 싫었던 고향은 갑자기 머무르고 싶은 곳으로 바뀐다.
이러한 전개는 <자산어보>에서도 반복된다. 영화는 정조에서 순조로 왕위가 계승된 이후 신유박해로 정약전(설경구)과 정약용이 유배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정약전은 어부 청년 창대(변요한)를 만난다. 서로의 지식을 교류하면서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집필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둘의 케미스트리는 극을 흥미롭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갈라선다.
뭍으로 나가 출세를 꿈꾸는 창대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길을 걷고자 한다. 정약전은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 그는 창대가 좀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바란다. 하지만 창대의 시각은 섬에 붙들려 있다. 창대의 시각을 교정하는 의미에서 영화는 컬러 장면을 도입한다. 총 3번의 컬러 장면이 나오는데 모두 정약전의 사상에 감화된 이미지다. 의아함을 남긴 컬러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창대는 <목민심서>에서 봤던 관리들의 폭정을 실제로 목도하고 책의 지침에 따라 일을 수행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자산어보> 서문에 이름이 등장하는 창대는 영화적 상상력이 부여된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빌려온 디제시스는 유한한 세계다. 창대라는 한 개인은 부패한 조선 후기의 실상을 비추는 카메라에 불과했다.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대가 정약전의 가르침을 아무리 받아도 자신을 낳고 떠난 친부의 승인 없이는 관직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창대는 부패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다시 고향 흑산도로 향한다. 영화가 창대에게 제시한 해결책은 일종의 정신승리에 가까웠다. 그래도 고향 흑산도가 낫지 않느냐는 부인의 말에 흑산이 아니고 자산이라고 말하면서 화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된다. 흑이나 자나 모두 검다는 의미다. 여기서 창대가 말한 자산은 아마도 정약전의 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대가 돌아간 곳은 정약전의 품이다. 비록 정약전은 죽고 없지만 흑산이 아닌 자산이라는 교정술을 통해 그는 되살아난다. 영화는 창대를 정약전을 조명하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소비한다. 따라서 영화가 선보인 교정술로 창대가 자유로운 파랑새가 됐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자산어보>는 역사란 프리즘과 흑백필름으로 극을 진행시키지만 <변산>의 톤 다운된 버전으로 느껴진다. 이준익의 최근 영화 속 청춘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 세상에 꺾인 형상을 하고 있다. 이들의 고민에 대한 영화적 해결은 죽음, 출소, 낙향이었다. <자산어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주는 소소한 재미와 따뜻함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창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안타깝다. 그것이 동시대 청춘들이 겪는 희망 없음과 맞닿은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컬러 장면은 창대를 자유롭게 날지 못하게 하고 다시금 영화 스크린에 묶어둔다. 숭고함이 아닌 방관에 가까운 시선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