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 [단독] CJ그룹 이미경 부회장, "할리우드 제작자들, 한국 감독 소개해달라는 요청 늘었다" > 에서 이어집니다.

샌프란시스코 <기생충> 개봉 기념 VIP 시사. 사진제공 CJ그룹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한국영화산업(특히 극장)이 침체기에 빠졌는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일단 단기적으로는 극장이 활성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만, 조금 역설적이게도 지금 한국영화계와 콘텐츠 산업 전체는 그 어느 때보다 몸값이 높아진 희망적인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생충> 효과로 한국 콘텐츠의 인지도가 높아지기도 했고, 코로나19로 인해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가치는 이전에 상상하지 못한 정도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또 지금 개봉을 대기하고 있는 기대작들이 연달아 극장가를 달구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극장에서 대작을 즐길 수 없어 축적된 잠재 수요들이 코로나가 꺾이면서 폭발적인 흥행을 만들어낼 수 있을것입니다. 또한 극장가는 홈비디오나 모바일 기기가 제공하지 못하는 경험을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음향, 스크린 등 영화적 경험을 더 확대할 수 있는 본질적인 방안을 고민하는 동시에 영화관을 찾는 경험 자체를 총체적으로 더 즐겁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부가적인 서비스와 활동에 대해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극장이 위기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뉴욕도 최근에서야 극장 영업을 재개했을 정도인데요. 극장 산업의 미래는 어떻게될 것으로 보시나요.

=라디오나 TV가 등장하고 대중화됐을 때, 그리고 컬러TV로 업그레이드되고 비디오 플레이어가 출시됐을 때처럼, ‘영화의 종말론’은 미디어 환경이 크게 변화할 때마다 대두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예를 들면, 컬러 TV의 대중화와 극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상황으로 영화가 위기를 맞았을 때, TV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볼거리로 관객들이 계속 극장을 찾도록 하기 위해 ‘블록버스터’가 발명되었고 이는 영화사업의 지형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활로를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OTT 플랫폼이 기존 영화의 여러 영역을 흡수하고 있고, ‘광장의 매체’로서의 영화는 또 그 내용과 형식을 진화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야 할 것입니다. 마블시리즈와 같은 프랜차이즈/이벤트 무비가 많은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이끈 최근의 대안 중 하나였는데,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이러한 해결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향후 몇 년 간은 어떤 형식과 내용이 유효할 지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반대되는 고민도 동시에 하고 있는데, TV 콘텐츠로 어떤 경험을 추가로 더 선사할 수 있을지, 과거에 영화관에서 느꼈던 즐거움 중 어떤 일부를 TV로 향유하도록 할 수 있을 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영상 콘텐츠의 경계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영화는 무엇인지, 또는 영화는 향후 무엇이 될 것인지 질문해야만 할 시점입니다. 크고 어려운 질문이지만, 두 가지질문에 대한 부회장님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 영화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거듭해왔습니다. 최근에는 OTT 서비스가 큰 성장세를 이루면서 영화를 보는 방식도 변모하고 있죠. 앞으로의 영화 소비는 취향에 따라 극장에서 보는 걸 선호할 수도 있고 집에서 보는 걸 선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고유의 특별함은 결코 다른 방식으로 대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단순 콘텐츠 소비가 아닌,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영상과 공간을 꽉 채우는 사운드, 함께 갔던 사람들과의 소통, 영화를 보면서 먹던 팝콘까지, 문화 향유의 집합체로서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디즈니 CEO였던 밥 아이거도 저에게 <기생충>을 너무 재밌게 봤다고 리뷰를 전하며, 가족들과 집에서 봤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 영화관을 다시 방문하겠다고 얘기를 전한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대표적인 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크고 작은 변화 속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영화가 꾸준하게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영화라는 콘텐츠가 주는 소통과 공감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를 보는 동안 온전히 그 세상에 들어가 모든 감각을 집중하며 느끼는 시네마 경험(Cinema Experience)가 바로 영화가 주는 감동이고, 그러한 영화를 만들어 전세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본인의 소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어린 시절 시네마스코프를 통해서 봤던 <사운드 오브 뮤직>의 경험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남아 있고 그 경험을 통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앞으로도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들과 관객들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꾸준한 사랑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작자들은 ‘어떻게 하면 영화가 대중의 삶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와 같은 대중 문화의 본질적 역할과 관련된 질문과 더욱 치열하게 씨름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영화를 계기로 각별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국내외 영화인들이 많을 것 같은데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영화인이 있나요.

=영화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한데 모인 값진 결과물이라고 하죠. 그간 CJ가 영화 산업을 성공적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수많은 감독님, 스텝, 배우들의 노력 덕분일 것입니다. 특히 긴 여정의 <기생충> 레이스를 함께한 봉준호 감독, 항상 깊은 영감을 주는 박찬욱, 류승완, 김지운 감독 등 한국 영화계의 르네상스 시대를 선봉에서 이끌어준 감독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 한국의 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각광받고 사랑받는데 기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콘텐츠가 디지털 플랫폼을 타고 국경, 세대를 초월해 보편적인 글로벌 대중문화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이후 기념 촬영. 사진제공 CJ그룹

-현재 가장 눈여겨보는 감독이 있나요.

=앞서 언급한 한국의 대표 감독들의 뒤를 이을 재능을 가진 감독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영화관을 가지 못하다 보니까 넷플릭스나 티빙으로 영화를 자주 보는데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나 이옥섭 감독의 <메기>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승리호>는 아시아도 우주를 컨셉으로 한 블록버스터를 만들 수 있고, 오히려 더 독특하게 잘 만들어낼 수 있다 라는 것을 글로벌에 보여준 멋진 시도 같아 좋았고, 이옥섭 감독의 <메기>는 색감을 활용한 영화 특유의 분위기와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 연출이 돋보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청년 경찰>, <사자>를 만든 김주환 감독은 장르와 무관하게 탁월한 연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몇 년 전부터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김주환 감독은 배급사 홍보팀에서 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양한 본인의 경험이 영화 연출시 발휘되는 것이 아닐까 싶고, 감독 개인의 뛰어난 어학능력도 글로벌 무대에서도 경쟁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처럼 감독들이 가진 다양한 경험과 능력들이 감독으로 하여금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신선한 소재를 개발할 수 있는 탄탄한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독특한 스토리, 뛰어난 감각으로 중무장한 한국의 신진 감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신진 감독들이 그들의 재능과 창의성을 글로벌 시장에서 발휘할 수 있도록 든든한 연결 고리가 되어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능 있는 젊은 창작자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산업적으로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그동안 한국영화 시장에서도 그래왔듯이 단기적인 기회비용이나 손실을 감수하고 꾸준히 투자하고 도전할 수 있는 중장기적인 비전과 그에 수반되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드맵을 이어나가기 위한 가장 근간이 되는 CJ ENM의 사업 철학은 크리에이터들에 대한 과감한 투자입니다. 재능있는 크리에이터들을 지속 발굴하고 서포트 하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둔 것이 결국에는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인 콘텐츠 메이커 역할을 하는 값진 결과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또한, 문화 사업은 스마트폰처럼 편리한 제품의 개발 하나로 해외시장 개척이 이루어질 수 없어서 긴 시간동안 입체적으로 접근하여 인내심 있게 성과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생충> 오스카 캠페인 과정에서 그랬듯이 비영어권 사업자로서 주류 시장의 여러 골리앗들과 경쟁 또는 협력해야 하니, 단순히 대규모 투자나 물량공세로 가능하지 않고, 우리의 상대적인 강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중심으로 시장의 약한 지점을 파고들어가는 어찌 보면 지극히 기본적인 전략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내수시장만으로 안주하기 쉬운 문화산업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업을 세계 무대로 확대해서 과감하게 재정의하고,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과감한 시도들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 중요해 보입니다. 문화적, 언어적 장벽이나 선진 시장의 규모의 무게에 압도당하지 않고 차분히 자기 페이스로 임하다 보면 언젠가 의미 있는 보답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동안 CJ가 해외시장에서 만들어낸 의미 있는 성과가 있었다면 모두 이러한 태도를 유지한 덕분일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 머물며 한국 영화, 드라마, K-POP 아티스트를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글로벌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업계의 많은 사람을 만나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기회들을 찾고, 영화/TV/음악 모든 분야에서 연결점을 찾아 성과를 만들어낼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기에 미국에서 머물면서 그런 기회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영화와 드라마를 기획하는 일도 하고, 음악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하는 일도 준비하고 있죠. 작품에 대해서는 좀 더 가시화되면 언급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전부터 준비하던 일이 최근 가속도가 좀 붙은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일종의 부업으로, 할리우드에서 업계의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한국의 창작자나 배우, 뮤지션들이 진출할 기회가 있으면, 기존에 만난 적이 없던 이들까지 추천 리스트에 올리고 미팅을 주선하곤 합니다. 그래서 ‘매치메이커’나 ‘영업사원’ 같다는 말을 듣기도 하죠. 사실 이 업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제대로 매칭된 관계에서 결실을 맺고, 앞서 말한 ‘영업’이 이 모든 일의중요한 출발점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할리우드에서는 무수한 영업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복잡한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 속에서 걸작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흥행작이 나오기도 합니다. 송강호 배우가 우연히 오디션장에서 조감독 시절의 봉준호 감독을 만났던 인연이 <살인의 추억>으로 이어졌고, <기생충>이라는 엄청난 성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관계를 하나라도 더 발견하고 한국과 글로벌 시장 사이에 접점을 만드는 게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국 아티스트들과 작품에 당장 필요한 글로벌 플랫폼 역할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영화가 있습니까.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 감독 로버트 와이즈)이 생각나네요. 처음 접한 컬러 영화로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상당히 매력적인 영화였고, 영화관에서 70mm 시네마스코프를 통해 관람했던 그 경험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관에서 12번이나 관람 했었죠.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노래 <My Favorite Things>를 부르며 가정교사 마리아가 아이들을 위해 커튼으로 옷을 만들어주는 생각을 하는 장면이 특히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도 집이나 할머니댁에 있는 커튼을 치마처럼 두르기도 하고, 모자처럼 머리에 뒤집어 쓰기도 하고 옷을 만들어 입는 상상을 종종 했기 때문이죠. 그 장면을 봤을 때 ‘어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며 재미를 느끼면서, 이 영화를 계기로 영화와 음악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죽기 전에 한 편의 영화를 보아야 한다면 어떤 영화를 보고 싶으십니까.

=떠오르는 위대한 영화들이 많아 한편을 꼽기가 너무 어렵네요. 이 질문에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는 영화를 죽기 전까지 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